소설리스트

152화 (152/245)

152.

두 사람이 호텔을 나왔을 때는 해가 완전히 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어스름한 하늘 서쪽으로 샛별이 홀로 반짝거렸다.

“이번에는 네가 운전해.”

노아는 팅팅 부은 눈으로 차 열쇠를 내밀었다.

열쇠를 받은 레토가 가볍게 그것을 공중에 던지고 받더니, 장난스럽게 웃으며 열쇠를 도로 내밀었다.

“또 운전해도 괜찮은데.”

“됐어. 눈앞이 아직도 시큰거려서 운전 못 해.”

노아는 아예 먼저 나가서는 조수석에 떡하니 앉았다. 코를 훌쩍이는 노아는 아직도 울음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반면 운전석에 앉은 레토는 어느 때보다 개운한 상태였다.

마치 저도 몰랐던 허물을 깨달은 뒤, 그것을 힘겹게 벗겨낸 것처럼 후련하고 가뿐했다.

태어나서 이렇게나 가벼운 마음은 처음이었다.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아.”

시동을 켠 레토가 차를 몰며 말했다.

“지금이라면 정말로 닉스 소장을 안 들키고 죽일 수….”

“야!”

“농담이야, 농담.”

“농담으로라도 그런 소리 하지 마.”

매섭게 눈을 치켜뜬 노아가 으르렁거렸다. 레토는 그 이상 자극하지 않고 순순히 사과했다.

그제야 한풀 꺾인 노아가 투덜거리며 안전띠를 둘렀다.

“응?”

노아가 안전띠를 만지작거렸다.

“야, 이거 구멍 났는데?”

튼튼한 안전띠에 조그만 구멍 4개가 위아래로 두 개씩 나 있었다.

“설마 사고 차량인가? 하지만 아드벨로가 그런 걸 가지고 있을 리가….”

“…….”

놀란 노아가 중얼거리는 걸, 레토는 못 들은 척하며 운전에만 집중했다.

저 구멍은 노아가 운전할 때 저도 모르게 움켜쥐었던 흔적이 틀림없었다.

두 사람은 금방 오케아누스 저택에 도착했다.

“언니이이이이!”

온다는 소식을 미리 아드벨로에서 전화로 알렸는지, 클라레가 현관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으아아앙!”

울면서 달려온 클라레가 냅다 노아에게 주먹질했다.

작지만 굳센 두 주먹이 노아의 다리를 퍽퍽 때렸다.

“왜 나 두고 갔어! 말도 안 하고!”

“아야, 아파라….”

“아프라고 때린 거야! 나빴어! 언니 바보! 형부도 바보야아! 아스도 바보고오오!”

아침에 일어나서 혼자 남겨졌던 게 어지간히 충격이었는지, 클라레는 참았던 분노와 서글픔을 계속 토해 냈다.

그러다 제 분을 못 이겨 바닥에 주저앉았다.

“으아앙!”

성질대로 팔다리를 마구 휘두르더니, 좀 지쳤는지 씩씩거리며 털썩 드러누웠다.

“흑, 흑….”

그러고는 냅다 엎드리더니, 두 팔로 얼굴을 가린 채 훌쩍거렸다.

“아이고, 우리 아기가 삐쳤어?”

조심히 옆으로 다가간 노아가 클라레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심통 난 클라레는 고개를 휙 돌리며 노아를 피했다.

“많이, 흑, 삐쳤어….”

“언니가 많이 미안해.”

“나보다 일이 더 좋은 거야….”

“그럴 리가 있겠어?”

클라레를 번쩍 안아 든 노아가 눈을 마주치며 단호히 말했다.

“언니한텐 네가 가장 소중해. 알면서 왜 그래.”

“몰라.”

“정말로 몰라?”

“…알아.”

절 달래 주는 목소리에 기분이 풀렸는지, 클라레가 코를 훌쩍이더니 샐쭉한 눈으로 노아를 노려봤다.

“하여튼 우리 집 어른들은!”

그러곤 괜히 투덜거렸다.

“어린이만 내버려 두고 일하러 가다니! 그건 나쁜 거야!”

“언니가 미안해. 많이 섭섭했을 텐데, 그래도 기다려 줘서 고마워.”

“흥, 나니까 기다려 준 거야.”

클라레가 노아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다가, 어깨 너머로 절 바라보는 레토와 눈이 마주쳤다.

“형부도 잘못했죠? 사과!”

“죄송합니다.”

레토는 순순히 고개 숙여 사과했다.

그제야 성이 풀린 클라레가 콧김을 세게 내뿜으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노아의 품에서 내려온 클라레는 두 사람을 응접실로 데려갔다.

며칠 좀 지냈다고 제집처럼 돌아다니는 모습이 퍽 웃겼다.

“고생들 했다.”

기다리고 있던 알버스가 무사히 작전을 수행하고 돌아온 둘을 반겼다.

옆에 있던 아이트라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형님!”

마찬가지로 레토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던 카리나가 의젓한 표정으로 반겼다.

“오셨어요?”

레토는 절 보며 기쁘게 웃는 카리나를 잠시 말없이 바라봤다.

제 인사에 답이 없자, 카리나의 미소가 조금씩 무너지더니, 이내 풀이 팍 죽어 버렸다.

혹시 저가 뭔가 잘못하기라도 했나, 괜히 소심해졌다.

“카리나.”

하지만 아이의 예상은 완전히 틀렸다.

“음, 잠깐 안 본 사이에 키가 또 큰 건가?”

레토가 제법 심각한 표정으로 카리나의 정수리에 제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그러고는 강아지 쓰다듬듯이 벅벅 어루만졌다.

“어, 어어!”

당황한 카리나는 이내 다시 웃음을 찾았다.

“시, 실은요! 키가 조금 큰 것 같다고 어머니가 그러셨어요.”

“역시.”

“제 생각에는, 편식 안 하고 골고루 먹기 때문인 것 같아요.”

“쳇.”

클라레가 얄밉단 듯이 표정을 찡그렸다.

“쟤, 얄미워 아주 그냥!”

그리고 노아에게 고자질했다.

“오늘 내가 당근 안 먹는다고 잔소리를 얼마나 했는지 알아?”

“너 또 편식했어?”

“어린아이라면 편식 하나 정도는 기본이지!”

“으이구, 골고루 먹어야 키가 크지.”

“언니 다시 일하러 가라, 응?”

잔소리가 귀찮아진 클라레가 노아의 품에서 도망쳤다.

“카리나! 우리 가서 박물관에서 만든 거 보여 주자.”

“좋아.”

“그러면 나도 같이 갈까?”

레토는 두 아이를 양팔에 하나씩 낀 채로 복도를 달렸다. 아이들의 자지러지는 웃음소리가 기분 좋게 전해졌다.

이제 응접실에는 노아와 아이트라, 알버스만 남았다.

“…클라레를 돌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선, 노아는 두 사람에게 감사를 전했다.

“사돈아가씨는 언제나 환영이랍니다.”

“그렇고말고! 같이 있으면 우리가 더 즐겁단 말이지!”

아이트라와 알버스가 흐뭇하게 웃었다. 짧았지만 이곳 저택에서 클라레가 보여 준 행복은 무척 귀한 것이었다.

하지만 노아의 얼굴에 드리운 씁쓸한 미소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사실.”

몇 번이고 망설인 뒤에야.

“레토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노아는 레토에게 모든 것을 들었다고 두 어른에게 말했다.

아이트라와 알버스는 노아의 고백에 적잖게 놀라워했다. 하지만 곧 감정을 갈무리하곤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심지어 알버트는 대놓고 안도까지 했다.

오히려 이렇게 되어 무척 기뻐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랬군요.”

입을 먼저 연 건 아이트라였다.

“그래서 레토의 눈이 부어 있었군요. 물론 노아 양의 눈도 마찬가지고요.”

“티가 많이 났나요?”

“레토와 함께 울어 준 것이지요? 정말 고마워요.”

“큰 꼬맹이가 정말 결혼 하나는 잘했군.”

알버스의 진심 어린 칭찬에 노아가 수줍게 웃었다.

자신은 그리 대단한 일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건만, 저 두 사람이 진심으로 고마워하니 드물게 무안해하는 중이었다.

게다가 노아는 아직 둘에게 물어볼 것이 있었다.

그리고 말해야 할 것도.

“이런 말씀 조심스럽습니다만.”

단어 그대로 조심스럽게 운을 띄운 노아가 물었다.

“레토가 7년 전에 역공전에 참전했던 이유가, 그….”

“죽으러 간 것이냐고?”

노아가 차마 뱉지 못한 질문의 마무리를, 알버스가 굳은 목소리로 완성시켰다.

노아는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였다.

“…그래.”

대답하는 알버스의 표정이 어두웠다.

노아는 차마 바라보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그것도 레토가 말했느냐?”

“제가 눈치챈 거예요.”

의심의 시작은 수도에 온 첫날에 방문했던 군사 박물관이었다.

군사 박물관을 바라보던 레토의 곤란한 표정.

7년 전, 졸업을 앞둔 생도가 짊어졌다는 80kg의 묵직한 무기, 전쟁 당시에 착용했다는 낡아빠진 군복과 군화.

그리고 박물관을 다녀온 뒤, 참전한 이유를 물어보자 돌아온 그의 대답.

“그냥 효도 한 번 하려고.”

자살행위 같다는 생각은 얼핏 들었지만, 그래도 설마, 설마 했었다. 죽음을 각오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니까.

하지만 이번에 레토의 비밀을 알게 되면서, 그가 평소 오케아누스를 향해 가지고 있던 의미 모를 죄책감의 근원을 알게 되면서.

노아는 확신했다.

7년 전 레토의 참전은 명백한 자살행위였다.

그는 정말로 죽기 위해 전쟁터로 떠난 것이었다.

“…왜, 레토를 입양하신 건가요?”

노아가 조심히 물었다.

솔직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만약 자신이 아이트라의 입장이었다면, 전남편의 사생아를 입양하여 제 자식처럼 소중히 돌볼 수 있을까?

노아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내심 원망도 들었다.

그 때문에 레토가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오케아누스에게 이런 죄책감을 계속 품게 되는 것이라면, 노아는 결코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

한참 말을 아끼던 아이트라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속죄하기 위해서였어요.”

“속죄, 요?”

누구한테?

의아해하던 노아의 눈이 살짝 커졌다.

“…설마 레토의 생모요?”

아이트라가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였다.

“얘야.”

알버스가 그만 말하란 듯이 딸을 불렀다.

하지만 아이트라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계속 이어 갔다.

“어떻게든 그 남자의 밑바닥을 보여 주고 싶었고, 그래서 그의 사생아와 불륜 상대를 공개했죠.”

“하지만 그게 왜….”

“그 때문에 그 여자가 죽었으니까요.”

말을 잠시 멈춘 아이트라가 숨을 잘게 떨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여자도 나와 같은 피해자였어요. 아니, 나보다 더 끔찍한 피해자였죠.”

“…….”

“적어도 나는 그 남자를 직접 선택했어요. 남자 보는 눈이 없어서 호되게 당했다고 넘어갈 수 있었어요. 복수할 수 있는 힘도 있었고.”

그러나 레토의 생모는 아니었다.

“그녀에겐 자신을 도와줄 가족이나 친구도 없었죠. 재산은커녕, 제 몸 하나 건사하기 어려운 처지였어요.”

“그래서 레토를 데려온 건가요?”

“이혼한 당시에는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아이를 떠나보낸 지도 얼마 되지 않아서….”

점점 줄어드는 아이트라의 목소리는 끝내 점멸해 버렸다.

노아는 가슴이 미어졌다.

레토만이 아니라, 아이트라도 유난히 레토에게 조심스럽고 미안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이 집은….’

이렇게 얽히고 꼬여 있었구나.

아이트라 역시 레토에게 죄책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그녀의 옆에서 괴로운 표정을 짓는 알버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

간신히 짜낸 아이트라의 말이 노아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손으로, 흙을 파먹던 그 아이의 처참한 몰골을, 나는 평생 잊지 않을 거예요.”

그 역시, 아이트라의 또 다른 속죄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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