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
졸음이 사라진 붉은 눈동자는 겁먹은 토끼처럼 불안하게 흔들거렸다.
제 어깨에 얹어진 두 손이 제 목을 당장이라도 압박할 것 같아 무섭기까지 했다.
그러나 노아는 스르륵 손을 치울 뿐이었다.
그리고 올라탔던 허리 위에서 내려왔다.
“역시.”
확신에 찬 목소리가 레토를 더욱 압박했다.
“미리 말해 두는데, 거짓말할 생각 마. 방금 네 근육이 움찔거리면서 힘이 바짝 들어서는 거, 다 느꼈으니까.”
그래서 안마를 해 준 거였나.
조금 섭섭해지려던 중, 노아가 이어 말했다.
“레토 넌 닉스 소장과 관련된 주제에만 유달리 이상했잖아. 이런 이야기를 다른 사람이 있는 곳에서 함부로 묻기도 그렇고.”
“…….”
무어라 말하려던 레토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대신 몸을 슬그머니 일으켰다.
레토의 샤워가운은 앞섶이 많이 흐트러진 상태였다. 노아가 열심히 해 준 안마 탓이었다.
레토는 일단 그것부터 묵묵히 고쳐맸다.
‘…아, 좀 웃기네.’
진지한 분위기가 잡힌 와중에 옷고름 고치려니 어이가 조금 없었다. 그래서 맥 빠진 웃음이 튀어나올 뻔했고.
“저기.”
레토가 물었다.
“옷 입고 이야기해도 돼?”
“역시 그렇게 헐벗은 가운 차림은 좀 그렇지?”
노아의 말에 레토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가운을 고쳐 입어도 앞섶이 계속 벌어지는 건, 지금부터 나눌 중요한 이야기와 어울리지 않았다.
그리고 아까부터 노아의 시선이 묘하게 제 가슴에 꽂힌 것 같아서, 조금 곤란해질 것 같았다.
여러모로.
특히 신체적으로.
어쨌건 옷을 갈아입은 레토는 다시 침대에 앉았다.
“그.”
하지만 차마 들지 못한 고개는 애먼 카펫 바닥에 고정된 채였다. 배 앞에 가지런히 모은 제 두 손은 이미 깍지를 꽉 낀 상태였다.
“그러니까….”
깍지 낀 손에 힘이 어찌나 들어갔는지, 손가락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의 얼굴색만큼이나.
“그게….”
“레토.”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노아가 그의 깍지 위에 제 손을 올렸다.
“내가 먼저 말해도 될까?”
노아는 레토의 깍지 낀 손을 풀어, 그 사이에 제 손을 끼워 넣었다. 반사적으로 그 손을 잡으려던 레토는 순간 멈칫했다.
“내가 왜 너한테 화가 났는지 알아?”
“계속 뭘 숨겨서 그런 거잖아. 넌 비밀을 만드는 걸 싫어하….”
“아니야.”
겁쟁이의 손을 꼭 쥔 노아가 힘줘 말했다.
“난 그런 거로 화를 낸 게 아니야.”
그리고 다른 손으로는 레토의 볼을 감싸 제 쪽으로 돌렸다.
노아의 올곧은 푸른 눈빛은 처음부터 계속 레토만을 향하고 있었다.
“네가 계속 위험한 짓을 자처하니까 화를 낸 거야.”
“…내가?”
말을 이해 못 한 레토가 영문 모를 표정을 지었다.
그는 진정 자신이 위험을 자처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바보도 아니고, 그런 무식한 짓을 왜 할까.
“난 그런 적 없어.”
“했어.”
“아니, 진짜로 내가 뭘….”
“계속 디모네 닉스 소장을 네가 죽이려고 했잖아!”
노아가 다그치듯 말했다.
“우린 이미 그자를 궁지로 내몰았어! 증거 적부심 재심사가 이어지고 재판이 진행되면 그자는 곧 체포될 거야.”
“노아, 그것과 이건….”
“잡히면 그 새끼는 사형이 확실해! 아니야?”
“…….”
“그런데 왜 계속 네가 그 더러운 놈을 직접 죽이려고 하는데? 나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데!”
닉스 소장은 노아에게도 철천지원수였다.
부모님을 죽인 원수, 가문의 원수.
더 나아가 7년 전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 중 하나.
그래서 노아는 레토의 의아한 반응을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닉스 소장 이야기만 나오면 대화 주제를 슬쩍 돌리고, 이해 못 할 말을 내뱉고, 겁에 질린 표정을 감추지 못하던 모습들.
“…이럴 땐.”
노아가 기운 빠진 미소를 그린 채로 힘없이 중얼거렸다.
“내가 너무 똑똑하고 눈치 빠른 게 싫어지더라.”
조금만 생각하면 답은 금방 나왔다.
“이번에는 거짓말해도 괜찮아. 만약 아니라면 개소리하지 말라고 욕해도 돼. 난 지금 너에게 아주 무례하고 잔인한 말을 할 거니까.”
경고라기엔 상냥하고 다정한 음성이었다.
그래서 레토는 제 얼굴을 고정하는 노아의 손을 피할 수 없었다.
불안하게 떨고 있는 제 손을 꼭 쥔 노아의 또 다른 손도 뿌리칠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
아무것도 못 해?
“…….”
불현듯 떠오른 의문 하나가 레토의 머리를 세게 때렸다. 눈앞이 아찔해질 만큼 서늘한 기운이 그의 흔들리는 이성을 매섭게 나무랐다.
그 진실이 노아의 입에서 나오게 할 거냐고.
또 그렇게 겁먹고 피할 거냐고.
“레토, 넌….”
“노아.”
레토가 서둘러 말했다.
“디모네 닉스 소장은 내 생부야.”
“…….”
“그간 말 안 해서 미안해.”
진심 어린 레토의 사과에, 노아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넓은 가슴에 제 몸을 기대듯 안겼다.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네 잘못이 아니니까.
그 말을 끝으로, 노아는 레토의 등에 두른 제 팔에 힘을 가득 실었다. 절대로 놓치지 않겠단 듯이 꽉.
“…….”
두 팔에 한가득 안긴 커다란 몸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역시 너는 한결같구나.’
눈물을 뚝뚝 흘리는 중에, 레토는 잠시 잊었던 중요한 사실을 가슴 깊이 새겼다.
‘너는 항상 나를 지켜 줘.’
노아는 멍청한 실수 따위를 저지르는 저를 포기하지 않았다.
한 번 더 기회를 준 뒤엔, 제 부족하고 서투른 면을 하나하나 고쳐 주며 곁을 지켜 줬다.
저도 힘들고 지칠 때가 있을 텐데도.
그래서 레토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었다.
“‘너를 위해서’라는 말이 정말 이기적이구나.”
자신이 겁을 먹고 이를 숨기려 했던 건, 결국 레토의 이기적인 발상이었다.
이 사실을 알면 노아가 괴로울 거라고 혼자 멋대로 판단해 버린, ‘너를 위해서’라는 나쁜 버릇이 발동해 버린 것이었다.
못된 습관을 아슬아슬하게 멈춘 레토는 냉정하게 판단했다.
이건 자신의 입으로 직접 말해야 하는 진실이었다.
그러지 않고 노아가 먼저 이 진실을 말해 버린다면, 그녀는 저에게 계속 미안해하고 마음을 쓸 것이다.
받지 않아도 될 상처를 뒤집어쓰게 되는 거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엔 헤어지게 될 테고.
그래서 레토는 모든 것을 용기를 쥐어 짜내 고백했다.
“잘했어.”
그런 레토의 생각을 알아챈 것처럼, 몸을 살짝 뗀 노아가 씩 웃으며 칭찬했다.
“역시 장해. 너랑 결혼해서 정말 다행이야.”
“바보야….”
눈물로 범벅이 된 레토가 끝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네 부모님을 죽인 원수가 내 생부인데, 뭐가 다행이야….”
“그게 무슨 상관이라고.”
“앞으로 날 보면 그 인간이 계속 생각날지 모르잖아.”
“하나도 생각나지 않아.”
노아가 눈물 젖은 눈을 둥글게 휘며 자신 있게 말했다.
“그딴 새끼, 우리 인생에 어떤 가치도 없어.”
앞으로 행복해질 일만 가득할 텐데, 뭐하러 그런 더러운 놈을 끌어들이겠는가.
눈앞에 있는 쓰레기는 치우면 그만이었다.
***
어린 시절의 기억은 대체로 두 가지였다.
“새하얗거나, 새까맣거나.”
실컷 울고 난 뒤, 그리고 조그만 냉장고에 있던 차가운 물을 두 잔이나 들이켠 뒤에야.
레토는 벌겋게 부은 눈으로 어릴 적 이야기를 들려줬다.
“새하얀 건, 엄마의 머리칼이었어.”
“너랑 똑같은 은발이셨나 보네.”
젖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레토를 보니, 노아는 그의 생모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분명 레토처럼 아름다운 미인이었을 거다.
레토의 기억 속 생모도 그러했다.
“나보다 더 하얗고 예뻤어. 촛불을 켜고 생활했었는데, 엄마가 웃으면 어두운 방이 환해지는 기분이 들었지.”
“촛불?”
“좀 외진 곳에서 살았던 거 같아. 눈도 많이 내렸던 거 같은데, 아마 북부 어느 산골 마을쯤…?
알아보려면 알아볼 수 있었지만, 구태여 그러지 않았다.
절 거두고 키워 준 오케아누스에게 몹쓸 짓을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마, 그때의 엄마는 지금의 나보다 어렸을 거야.”
“그런데 그런 남자와 만났던 걸까?”
“속았던 것 같아.”
레토는 새까만 저의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비가 제법 오는 날이었어. 밖은 시커멓고, 난 엄마가 켜 둔 등불 앞에서 낡은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었어.”
가지고 논 장난감이 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의 옆에서 엉엉 울던 엄마는 선명하게 기억했다.
그녀의 앞에 펼쳐진 신문도.
“20년 전이었으니까, 아마 후작님의 이혼 소식이 기재된 신문이었을 거야.”
왜냐하면 그날 이후로 엄마가 저를 창고에 숨겨 뒀으니까.
“그 새끼가 오는 날이면, 엄마는 늘 날 낡은 창고 구석에 숨겨뒀어.”
“설마…!”
충격으로 머뭇거리는 노아의 입술은 당장 욕이 튀어나올 것처럼 바들바들 떨렸다.
“응. 그 설마야.”
정작 레토는 평온한 얼굴이었다.
“…맞았지. 그 새끼한테.”
“아니, 왜?”
“자기가 이혼당한 게 나랑 엄마 때문인 줄 알았나 보지, 뭐.”
“뭐 그런…! 아니, 지가 한 짓은 생각 못 하는 거야?”
“생각 못 하는 인간이니까 아직도 그러고 있는 거 아닐까.”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말라며 레토가 피식거렸다.
답답해진 노아는 웃음이 나오냐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애써 담담한 목소리로 설명하는 레토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아직 남아 있단 걸 깨달았다.
그래서 그냥 입술만 꾹 다물었다.
“불도 안 켜진 그 창고에서 눈 감고 귀를 막고 기다렸지.”
“어머님을?”
레토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그러면 어머님은….”
“당연히 죽었지.”
“그 새끼가 어머님을 죽였어?”
“아니.”
자살했어.
생각지 못한 대답이었다.
“…….”
노아는 저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엄마는, 날 한참이나 끌어안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모습이었어.”
널 사랑한단다.
이렇게밖에 못 해 줘서 미안해.
내 아가, 내 아가.
제대로 먹지 못해 바싹 마른 입술로 아들의 얼굴 여기저기에 입 맞춘 그녀의 손가락은 피범벅이었다.
그리고 목을 매달기 전, 아이에게 말했다.
“도망치렴.”
엄마가 그렇게 세상을 떠나는 걸 지켜본 아이는, 덜덜 떨리는 몸을 힘겹게 움직여 낡은 나무로 짠 문 아래 개구멍 밖으로 도망쳤다.
레토가 도망쳤던 개구멍은 어딘가 시커멓고 비린내가 났다.
왜냐하면 그의 엄마가 손으로 구멍을 파 만든 탈출구였기 때문이다.
“나중에 알게 된 건데, 누군가가 집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문을 전부 잠갔다고 하더라고.”
“…….”
“그 뒤는 이제 노아 너도 아는 이야기야.”
혼자 빠져나온 아이는 거리를 헤매고, 굶주리다가, 끝내 허기를 참지 못하고 눈앞에 있는 한 줌의 흙을 입에 넣었을 때.
아이트라와 만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