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
아침 해와 함께 왕국을 횡단한 화물열차는 당일 오후에 수도 아들라보르 역에 도착했다.
“오셨습니까.”
북적이는 인파를 피해 기차역 뒷문으로 향하니, 아드벨로의 충직한 집사 베닝이 차를 몰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무사히 돌아온 여섯 명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저씨, 오랜만이에요.”
아티가 베닝에게 알은체했다. 베닝 역시 오랜만에 보는 도련님에게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아이고, 우리 도련님은 훤하던 신수가 거지꼴을 못 면하셨군요. 꼬라지가 그게 뭡니까. 주인님들이 보셨다면 머리를 삭발시켰을 겁니다!”
아들 같은 도련님인지라, 베닝은 보자마자 잔소리를 퍼부었다.
“이런.”
아티는 그저 웃는 얼굴로 잔소리를 묵묵히 들었다.
어릴 적부터 절 돌봐 준 사람이라, 그에게 베닝은 부모님이나 마찬가지였다.
잔소리를 마친 베닝이 물었다.
“도련님은 바로 왕궁으로 가실 겁니까?”
“예. 검사 측에 증거를 가져다주기 전에, 국왕에게 한 번 보여 줘야 하니까요.”
“그럼 저 차를 타십시오.”
베닝은 주머니에서 차 키 하나를 건넸다.
“저기에 주차해 둔 파란색 마동력차를 타시면 됩니다. 혹시 몰라서 어제 미리 주차해 뒀습니다.”
“역시 아저씨는 준비성이….”
“그리고 인제 그만 집으로 돌아오십시오. 명색이 아드벨로의 장손이신데, 뭐 부족하다고 테네브레 따위를….”
멈췄나 싶었던 베닝의 잔소리는 다시 이어졌다.
덩달아 옆에 있던 다른 대원들도 귀에서 피가 나올 지경이었기에, 노아가 눈치껏 끼어들었다.
“베닝 아저씨. 피곤해서 그런데 그만 출발해요.”
“죄송합니다. 그럼 여러분들은 제가 저택까지 모시겠습니다.”
“증거는 내가 가져가지.”
아티는 폐광산에서 가져온 증거들을 모아 챙겼다.
“국왕에게 먼저 보여 주는 겁니까?”
레토가 물었다.
“어차피 거기에서 검사가 기다리고 있을걸?”
먼저 차에 올라탄 아티는 차창을 내려 아스를 바라봤다.
“…….”
“…….”
눈이 마주친 둘은 어떤 대화도 주고받지 않았다.
하지만 그 기묘한 기류는 애먼 주변 사람들만 불편하게 했다.
“우리도 가죠.”
먼저 시선을 돌린 건 아스였다.
그런 아스를 보며 싱긋 입꼬리를 올린 아티도 차를 몰아 기차역을 떠났다.
나머지 다섯 명도 베닝이 몰고 온 마동력차에 올라탔다.
가장 덩치가 큰 레토는 자연히 앞 조수석에 앉았고, 나머지 넷은 뒷좌석에 꾸겨 앉았다.
“락소 씨 괜찮아요?”
“괘, 괜찮습니다….”
그 가운데 낀 락소가 조금 힘들어했지만, 그래도 견딜 만했다.
“어쨌건 이제야 끝났구나!”
아미의 환호가 그 이유였다.
“집사 아저씨! 저는 가서 거품 목욕을 하고 싶습니다! 시중도 누가 들어주면 좋겠어요!”
“이미 다 준비되어 있답니다.”
“얼핏 들었는데 저택 지하에 수영장도 있다면서요? 수영해도 돼요? 빨대 꽂은 야자수도 마시고 싶어요!”
아미는 이미 돌아가서 자신이 누릴 것들을 다 계획해 두고 있었다.
저택에서 충분한 휴식을 즐긴 뒤엔 수도 백화점에 가서 크게 휩쓸 예정이라고 한다.
아드벨로 저택에 도착하는 건 금방이었다.
“목욕물을 대령해라!”
가장 먼저 차에서 내린 아미가 저택으로 들어갔다.
“치티아 중위는 나이를 저리 먹었는데도 처제처럼 구는군.”
“클라레가 왜.”
“아니, 씩씩해서 보기 좋단 뜻이지.”
서둘러 변명한 레토가 싱글거리며 안전띠를 풀려던 찰나였다.
“잠깐.”
일어서려는 레토의 어깨를 붙잡은 노아가 다시 그를 의자에 앉혔다.
“넌 여기서 기다려.”
그러고는 혼자 차에서 내려, 베닝에게 뭔가를 부탁했다.
말 잘 듣는 대형견처럼 얌전히 앉아 기다리던 레토는 살짝 불안해졌다.
잠시 후 노아는 베닝이 건네는 가방을 받아 다시 차에 올랐다.
그것도 운전석으로.
“…운전하게?”
레토는 이제 식은땀까지 흘렀다.
“응.”
노아는 너무도 당연하단 듯이 안전띠를 둘렀다.
그 모습이 어찌나 섬뜩한지, 레토는 제 가슴을 가로지른 안전띠, 아니, 생명선을 꼭 붙들었다.
“피곤하지 않아? 내가 할까?”
“너도 피곤하잖아. 가끔은 내가 운전해야지.”
신이시여.
레토는 서둘러 신께 사죄했다. 아까 기차에서 욕했던 건 어리석은 치기였습니다. 제발 노아가 운전하지 않게 해 주소서.
하나 안타깝게도, 레토의 간절함은 통하지 않았다.
바퀴 헛도는 소리가 날카롭게 들리더니.
“…아, 기어.”
서둘러 기어를 고친 노아가 액셀을 밟았다.
두 사람을 태운 검은색 마동력차는 도로 위를 난폭하게 달렸다.
레토는 아직 수도에 마동력차가 많이 보급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남부만큼 차가 많았다면, 분명 다음 날 신문 1면에 자신들이 탄 차가 크게 올라왔을 거다.
마동력차 연속 추돌 사고의 범인이라고.
기적 같게도, 노아가 모는 검은 마동력차는 아슬아슬하게 신호를 준수했고, 아슬아슬하게 주변 차를 피해 갔다.
사실 주변 차량이 다 알아서 피한 것이지만.
“휴우.”
기적적으로 주차장에 차를 댄 노아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
반면 레토는 죽음의 문턱을 아슬아슬하게 오간 탓에 얼굴이 사색이었다. 안전띠를 꽉 쥔 손등 위로 핏줄이 툭 튀어나왔다.
“어휴, 피곤했나 보네.”
노아가 안쓰러운 얼굴로 레토를 살폈다. 차마 네 운전 때문이란 말도 못 한 채, 레토는 어쩔 수 없이 고개만 끄덕여야 했다.
도착한 곳은 예상 밖의 장소였다.
바로 자신들이 출장 중에 머무는 중으로 되어 있는 호텔이었다.
“여기서 좀 쉬었다가 오케아누스 저택에 들르자.”
차에서 내린 노아는 뒷좌석 문을 열곤 베닝에게 받은 가방을 챙겼다.
“안 내려?”
“어?”
“안 내리냐니까? 그런 꼴로 오케아누스 저택에 못 가잖아.”
“…….”
노아는 멍하니 있는 레토를 잠깐 바라보다가, 이내 어깨를 으쓱하곤 직접 안전띠를 풀어줬다.
그리고 손을 잡아 밖으로 끄집어냈다.
부부는 사이좋게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이 많은 오후 시간대였지만, 아티가 줬던 마도구 때문에 눈에 띄진 않았다.
그렇게 자신들이 예약한 방으로 올라간 뒤.
“누가 먼저 씻을래?”
그 말에 레토가 정신을 퍼뜩 차렸다.
“씻는다고?”
“아까부터 왜 이래, 진짜.”
살짝 답답해진 노아가 허리에 손을 올린 채로 잔소리했다.
“말했잖아. 이 꼴로 오케아누스 저택에 못 간다고. 어떤 시댁이 피로 범벅인 옷차림을 좋아하겠어.”
“그럴 거면 아까 아드벨로 저택에서….”
“거기엔 아스랑 아미가 있잖아.”
거기서 어떻게 그러겠냐며 노아가 시선을 슬쩍 피했다.
‘세상에!’
레토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를 뻔했다.
지금 노아가 엄청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저의 촉이 분명하다면, 지금 이건 부부의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신호였다.
‘저 신호가 향하는 곳은…!’
자신들이 서 있는 복도를 지나 오른쪽 옆으로 꺾으면 있는 침실 내 1인용 침대 2개.
그것 말곤 없었다.
출장 비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1인용 침대만 있는 방이었지만, 레토는 오히려 그래서 좋다고 생각했다.
좁은 침대는 또 그만큼의 장점이 있었다.
‘…하지만.’
잔뜩 흥분했던 레토는 금방 침착해졌다.
‘상황이 그럴 상황인가?’
노아는 분명 저에게 혼이 날 각오를 하란 듯이 말했다.
저 역시 디모네 닉스 소장과 관련해서 물어볼 줄 알았기에 긴장했던 것이고.
거기다 노아가 딱히 야한 걸 바라는 것 같지도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금방 알아차렸을 텐데.’
더더욱 혼란스러운 와중에.
“누가 먼저 씻을래?”
노아가 폭탄을 던졌다.
“아니면 시간도 아낄 겸 같이 씻어도 되고.”
조금 흔들렸지만, 그래도 레토는 눈치껏 먼저 씻으라고 순서를 양보했다.
***
씻고 나온 노아는 근래 본 얼굴 중 가장 개운한 모습이었다.
“역시 사람은 씻어야 한다니까.”
그럴 만도 했다.
피니치 구역으로 잠입하는 작전 때문에 사흘 내내 씻지 못했다.
사실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던 레토도 노아가 씻는 물소리에 음흉한 욕정보다 청결 욕구가 더욱 샘솟았다.
“확실히 사람은 씻어야 해.”
뒤이어 씻고 나온 레토 역시 노아와 같은 말을 했다.
씻는다는 게 이렇게 행복한 거라니.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닦고 나오는 레토는 호텔 문양이 큼지막하게 박힌 샤워 가운 차림이었다.
상체 부분이 크게 파였는데, 워낙에 넓은 가슴 때문에 준비된 가운이 상대적으로 작았기 때문이다.
“다 씻었어?”
먼저 씻었던 노아는 멀끔한 옷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씻으니 개운하지?”
“어. 이대로 한숨 푹 자면 좋겠….”
“그건 조금 있다가 하자.”
툭툭.
노아가 자신이 걸터앉은 침대 위를 손바닥으로 쳤다.
“누워.”
“…누우라고?”
레토는 서둘러 가슴 위로 손을 얹었다. 안 그러면 심장이 가죽을 뚫고 튀어나올 것 같았다.
“너 오늘 진짜 왜 그러냐.”
다시 말하기도 귀찮아진 노아는 레토의 손을 잡아당겨 침대에 눕혔다. 그대로 엎드려 누운 남편의 허리 위로, 노아가 올라앉았다.
레토가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이런 도전을 한다니!’
작전이 가져온 흥분이 가시지 않은 건가?
그래서 이런 색다른 시도를 하려는 건가?
‘저택에 처형이랑 치티아 중위가 있어서 곤란하다고 했던 게 이것 때문이었나!’
꾸욱.
“…….”
하지만 안타깝게도, 레토의 예상은 다 빗나갔다.
대신에 들끓던 흥분이 싸늘하게 식어 버리는 감각을 또다시 경험했다. 상당히 서글프고 맥 빠지는 경험이었다.
“시원하지?”
노아는 레토의 뭉친 어깨 근육을 풀어주며 말했다.
“오러로 싸운 뒤엔 이렇게 몸을 풀어줘야 해. 안 그러면 나중에 엄청 힘들거든.”
“응….”
“그래도 넌 평소 군에서 늘 단련한 덕인지 크게 무리는 없는 거 같네.”
정말 다행이라며 안도하는 노아의 목소리가 어찌나 선량한지, 레토는 스스로가 너무 더럽게 느껴졌다.
어쩐지 기차 안에서도 저를 계속 힐끔거리며 살피는 것 같더라니.
그러나 슬퍼하기엔 노아의 손길은 참으로 시원했다.
딱 무리했던 근육들을 찾아내 풀어주니, 레토는 자연히 몸에 힘을 빼고 즐기기 시작했다.
안락한 기분에 눈이 절로 감기면서 졸음이 몰려왔다.
‘나도 나중에 노아한테 해 줘야지….’
그리 생각하며 졸린 눈을 끔뻑이던 중.
“레토.”
노아가 어느 때보다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닉스 소장이랑 아는 사이야?”
질문을 듣는 순간, 레토는 전신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푹신한 침대가 지옥의 구렁텅이로 변해 버리는 건 순식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