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
신성청이 플랜시 전 소장을 변호하려고 했던 건, 디모네 닉스 소장이 증거로 저를 빼내 달라 협박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피니치 구역에 보냈던 성기사 전원이 사망했고, 전투의 흔적까지 있었다.
심지어 오랫동안 찾고 있던 성녀까지 흔적을 남겼다.
“신성청은 어떤 식으로든 그곳에 다시 사람을 파견할 거야. 그러면 자연히 닉스 소장이 가짜 증거로 자신들을 속였단 것도 알게 될 테지.”
왜냐하면 닉스 소장이 눈속임으로 남겨 둔 가짜 증거가 그곳에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면 신성청은 닉스 소장을 도울 필요가 없어진다.
노아의 추론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성녀를 숨긴 것도 닉스 소장이라고 의심할지 몰라. 거기에 성녀가 북부에 은거 중이라고 착각할지도 모르고….”
“아아, 제발 그랬으면…!”
아미는 벅차오르는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제발 신성청이 X되기를, 매일 간절히 기도했었다.
“하늘에 계신 어머님께서 이 부족한 딸의 바람을 들어주시려는 모양이야.”
“그거 편애 같은데.”
레토는 말도 안 된단 듯이 투덜거렸다. 그럴 거면 묶음 상품처럼 닉스 소장도 X되게 해 줄 것이지.
어쨌건 이번 작전으로 두 집단에게 아주 크고 아름다운 골탕을 먹인 것만큼은 확실했다.
“그런데 노아.”
제 이야기를 마친 아미가 노아를 불렀다.
“너도 우리한테 해야 할 말이 있지 않아?”
“뭘?”
“중장님이랑 둘이서 시퍼런 번개를 휘두르면서 싸웠잖아!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
“아, 그거?”
노아가 별것 아니란 듯이 순순히 고백했다.
“그거 오러야.”
아미와 락소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입을 쩍 벌렸다.
“오, 오러?”
“애들 동화책에나 나오는 그 괴상한 마법 말이야?”
“엄밀히 따지자면 마법은 아니거든?”
가볍게 정정한 노아가 잠시 이걸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했다.
조금 의외였다. 아무래도 저 두 사람은 아미가 성녀인 것보다 노아가 오러를 쓰는 것이 더 신기한 모양이었다.
‘왜지?’
이유를 몰라 의아해하던 찰나.
“…성녀는 적어도 7년 전까지 생존이 확인된 인물이니까.”
레토가 그 이유를 설명해 줬다.
“성녀를 직접 본 사람들도 제법 있었고, 마찬가지로 성녀의 기적이라 불리는 성력을 체험한 사람도 많았지.”
“아, 그때 생각하니 다시 빡치네….”
울컥한 아미가 혀를 짧게 찼다.
신성청을 위한다는 명목하에 제 성력으로 효과는 적은데 화려하기만 한 기적을 발휘하던 때가 떠올랐다.
“X발, 신도들한테는 싸구려 기적만 시키게 하고, 정작 자기들 아플 때는 치유해 달라고 엄살이란 엄살을!”
“…어쨌건 저런 성녀 때문에.”
레토가 조금 서글픈 표정으로 아미를 바라봤다.
구태여 내색은 안 했지만, 그도 아미가 성녀란 사실이 내심 충격이었다.
“반면에 오러는 고전소설이나 동화책에서나 등장하는 가상의 힘이니까.”
락소 역시 레토의 추측에 동의했다.
“역사서에도 간간이 등장하지만, 역사가들조차 오러를 믿지 않으니까요.”
“오러 보유자가 없으니까?”
“바로 그거지.”
레토의 수긍에 노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는 스윽 손을 내밀어, 손바닥 위로 푸른빛 기운을 조그맣게 모아냈다.
“…와아!”
“세상에!”
무릎걸음으로 다가온 아미와 락소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노아의 손바닥에 고인 난폭한 푸른 번개 같은 것이 제 존재를 강렬하게 입증했다.
바로 전설로만 전해지던 오러였다.
“이게 오러구나! 나 처음 봤어!”
“세상에, 보는 것만으로도 피부가 따가운 기분입니다.”
“그러게나 말이에요….”
오러를 빤히 바라보는 아미의 시선이 날카로웠다.
“…조금만 통제력을 잃어도 주변을 전부 파괴할 힘이에요.”
지금 노아의 손바닥에 모인 건 아주 작은 양이었지만, 아미는 그 속에 응축된 파괴력을 감지할 수 있었다.
“너 진짜 성녀였구나?”
오러를 도로 흡수한 노아는 그제야 놀랐다.
아미가 코웃음을 치며 한껏 잘난 표정을 지었다.
“어때? 이제 좀 존경하는 마음이 생겨?”
“아니, 이 나라가 정말로 망조가 들었단 생각은 여전히 변함없어.”
“확 저주해 버릴까 보다…!”
“그렇다면….”
뭔가를 떠올린 락소가 레토를 바라봤다.
노아는 피에타 가문의 핏줄이지만, 레토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도 푸른 번개 같던 오러로 적들과 싸웠었다.
“피에타 가문의 보물이라 불리는 검을 지닌 사람은 오러를 쓸 수 있다고 하는 전설이 마냥 거짓은 아니었군요.”
“그렇게 와전되긴 했던데….”
노아가 일부 내용을 정정해 줬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건 부부검이라고 불려요.”
이름처럼, 피에타 가주와 그 반려는 두 검을 하나씩 나눠 지녔다.
오랫동안 제국을 위해 무력을 써 온 만큼, 상대적으로 약한 반려가 가문의 큰 약점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피에타 가주는 또 다른 부부검에 제 오러를 흡수시켜 반려에게 건넸다.
자신이 자리에 없는 상황에서도 살아남으란 뜻으로.
“이 두 검은 오러를 흡수하고 방출하는 성질을 지녔거든요.”
“무척 신기하군요!”
“근데 이 정보가 국왕에게 흘러갈 가능성이 있을까요?”
노아의 날카로운 물음에 락소가 염려치 말란 듯이 빙긋 웃었다.
“정보상이란 본디 눈치가 빠른 편이죠.”
아드벨로는 노아를 단순히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양녀로 들여 가족의 구성원으로 삼았다.
즉, 노아를 함부로 자극했다간 아드벨로의 보복이 이어질 거란 뜻이었다.
“아드벨로를 적으로 둘 만큼 멍청하진 않습니다.”
“현명하시네요.”
“애초에 이 모든 판이 국왕과 아드벨로의 합작이잖습니까.”
“음….”
노아는 그 의견엔 조금 회의적이었다.
이번 작전을 통해 느꼈다. 카일리코 국왕은 분명 엄청난 계략가란 것을.
그는 자신이 가진 패를 이용해 닉스 소장과 신성청에 엄청난 한 방을 먹였다.
‘하지만 할머니는 그런 국왕을 이용하는 것 같단 말이지.’
아미를 시켜 부부검과 락소를 수도까지 올려보낸 걸 보면, 글로리아는 국왕의 머리 위에 있었다.
어쨌거나 노아는 안심했다.
자신의 비밀은 언젠가 국왕에게도 알려질 테지만, 남의 입을 통해 전해지긴 싫었다.
“그나저나 대단하군요.”
락소가 조금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모인 사람들 다 엄청난 인재들인데….”
피에타 가문의 마지막 생존자, 행방불명이던 가출 성녀, 7년 전 전쟁의 젊은 영웅, 불법 사병 단체의 생존자, 아드벨로 출신의 테네브레.
“저만 평범한 정보상이니.”
락소는 어째 기가 죽는다며 머쓱하게 웃어 보였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레토가 짓궂은 표정으로 반박했다.
“특수 부대 저격수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지.”
특함이 창설되기 전만 해도, 해군 특수 부대 저격수는 엄격하게 선발하는 최정예요원이었다.
지금이야 특함에 유명도가 조금 밀리긴 했지만, 선발 조건이 까다로운 특함과 비교하면 능력껏 올라갈 수 있는 자리였기에 꾸준한 인기를 유지하는 중이었다.
거기다 군에선 함정과 출신 장교가 저격수 경력까지 지녔다면 출세는 따 놓은 당상이란 소문도 있었다.
“결국 다 대단하단 소리네.”
묵묵히 듣고 있던 아티가 불쑥 끼어들었다.
아티를 본 그들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너 그새 또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노아가 아티의 뺨에 난 기다란 상처를 가리키며 물었다.
사선으로 길게 난 상처에 피가 흘렀다.
“사랑의 흔적이랄까.”
“넌 제발 좀 가만히 있어. 아스 심기 좀 건드리지 말고!”
듣는 척도 않은 노아가 아스를 찾았다.
아스는 한쪽 구석에서 눈을 질끈 감은 채 분을 삭이는 중이었다.
꼭 성난 황소가 숨을 거칠게 내 뿜는 듯했다.
심지어 아스의 손에는 날카로운 표창이 들려 있는데, 그 끝에 피가 묻어 있었다.
“저, 형님.”
레토가 이왕 이렇게 된 거, 용기 내어 물어보기로 했다.
“처형과 헤어진 건 불법 사병 단체를….”
“그딴 거 한다고 내가 좋아할 거 같아요?”
질문하는 중간에 아스가 매섭게 끼어들었다.
괜히 혼난 레토는 조금 억울해졌다.
“…처형이 그렇다고 하시는데 말이죠.”
“아, 당연히 그것 때문만은 아니지.”
아티는 생각보다 순순히 인정했다.
“이제 다들 알겠지만, 내가 좀 성격이 더럽거든.”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반론의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집안의 반대로 테네브레를 한번 해 보고 싶었고, 하는 김에 아스의 발목을 잡을지도 모르는 불법 사병 단체를 완전히 부서트리고 싶었지.”
“그냥 저 새끼가 부서졌다면 좋았을 것을.”
진심이 담긴 아스의 혼잣말이 살벌했다.
그래도 뭐가 좋은지, 아티는 마냥 싱글벙글이었다.
“이것 봐. 근사하지 않아?”
“어?”
영문 모를 질문에 노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근사한데? 욕 처먹는 게 넌 근사하냐?”
그 와중에 레토는 아티의 마음을 조금 알 것 같았다.
저도 노아와 사이가 틀어졌을 때, 그녀가 제 욕을 했단 사실에 무척 두근거렸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건….’
레토의 생각을, 아티가 동시에 말했다.
“…날 잊지 못한단 뜻이잖아.”
아티는 진심으로 기뻐하는 표정을 지었다.
정작 주변 사람들은 갱생 불가 쓰레기를 발견한 것처럼 역겨운 표정을 지었다.
노아와 아미는 서둘러 거리를 벌렸고, 락소는 ‘돌아이 보존의 법칙’이 적용되는 상황에 충격을 금치 못했다.
“…….”
“…….”
레토는 저보다 더한 미친놈을 신기하게 구경했고, 아스는 미간에 주름이 잡힐 정도로 눈을 질끈 감았다.
“나는 아스의 모든 게 갖고 싶었거든.”
저를 향한 긍정적인 감정만이 아니라, 부정적인 시선과 모멸, 경시. 아스가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걸 소유하고 싶었다.
누군가를 미워한다면 차라리 날 미워했으면.
모든 감정과 추억이 저 하나로만 가득하길.
“내 사랑은 그래.”
“그건 사랑이 아니라 자살 청부 같은데?”
노아가 진지하게 말했다.
“난 이제 아스가 너 죽인다고 해도 안 말릴 거야.”
“괜찮아. 그것도 사랑이니까.”
그러면 날 평생 기억해 주겠지.
아티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저기.”
아미가 슬그머니 팔을 들어 발언권을 구했다.
그러지 않으면 말 한 마디 꺼내기 힘들 정도로 분위기가 얼어붙었기 때문이다.
발언권을 구한 아미가 말했다.
“그, 혹시, 뭐에 씐 걸지도 모르니까, 정화의식 한번 받아 보실래요?
아미는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지금이 바로 성녀로서 제 의무를 다할 때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