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
“저도 좋아서 제 발로 여기 온 건 아니에요.”
어둑한 주변을 살피던 아스가 근처에 있던 폐광산을 발견하곤, 매서운 눈초리로 아티를 노려봤다.
“…….”
그러곤 휙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아미는요?”
“저기.”
노아가 가리킨 곳을 바라본 아스의 미간이 주름졌다.
“…왜 혼자서 저렇게 망나니처럼 지랄하고 있죠?”
“놀라지 마. 제가 성녀래.”
“재미없는 농담이네요.”
“그런데 처형은….”
믿기지 않는단 목소리로 레토가 물었다.
“어떻게 여기 계십니까?”
“아.”
아스가 무안한 듯 시선을 피하며 머쓱하게 굴다가 고백했다.
“사실 제가 이곳 불법 사병 단체의 유일한 생존자거든요.”
“세상에….”
충격적인 사실을 연이어 들은 레토는 기어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하지만 어째선지 아미가 성녀였단 사실보다는 덜 충격적이었고, 이상하게도 납득이 되었다.
‘그래서 처형을 볼 때마다 전쟁 때가 떠오른 건가.’
범상찮은 기운이 느껴진다 했더니, 상당한 실력자라서 그런 모양이었다.
‘아, 그래서 간첩 체포할 때도 작전에 참여했던 거군.’
레토는 생각보다 빨리 침착해질 수 있었다.
“그러면 이제 슬슬 가 볼까요?”
“처형, 그 전에 제 계획이….”
“참.”
깜빡했던 것을 떠올린 아스가 레토를 돌아보며 말했다.
“큰 주인님께서 작은 부군에게 보낸 전언이 있어요.”
아스는 들은 것을 그대로 레토에게 전해줬다.
“‘쓸데없는 생각 말고 닥치고 돌아와. 이 불효자식 새끼야. 네 엄마 가슴에 비수 꽂을 생각 말고.’라고 하셨어요.”
“…….”
“그게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지만….”
아스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보아하니, 틀린 말씀은 아닌 모양이네요.”
“…….”
“작은 부군은 원래 엉뚱한 짓을 하시는 경우가 많으니, 이번에도 그런 거겠죠.”
제멋대로 대화를 끝낸 아스가 다시 몸을 돌렸다. 그런 아스의 곁으로 아티가 다가왔다.
“잘 지냈어?”
“왜 볼 때마다 살아 계세요?”
“그거야 널 볼 수 있잖아.”
“뭐래, X발.”
옛 연인들이 살벌한 인사를 주고받는 중.
“레토.”
락소가 제 친구를 조용히 불렀다.
“돌아가자.”
거대한 마력에 짓눌린 락소는 힘겨운 와중에도 곧은 눈빛으로 레토를 붙잡았다.
“집으로, 이제 돌아가야 할 때야.”
“…그렇군.”
레토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웃었다.
“그 새끼가 널 보낸 이유가 이거였나.”
“글쎄다, 난 모르겠는데.”
천연덕스레 대꾸한 락소는 꽤 짓궂어 보였다. 그 역시 레토와 카일리코 국왕과 괜히 친한 사이인 게 아니었다.
잠시 후 아미가 돌아왔다.
“많이 기다리셨죠?”
시뻘건 피로 범벅이 된 아미는 근래 본 표정 중 가장 해맑고 개운한 모습이었다.
“속 시원해라! 하아, 바로 이 순간을 위해 전 살았던 모양입니다! 행복해!”
“난 널 보면서 이 나라의 명운이 다했다고 느꼈는데.”
노아가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친구를 환영했다.
“요 녀석! 성녀에게 못 할 말이 없구나.”
“닥치고 피나 닦아. 비린내 나니까.”
“괜찮아. 성녀는 이런 것도 다 정화할 수 있거든.”
“성격까진 정화하지 못하나 보네.”
“뭐라고 했어?”
“아무 말도 안 했어.”
아미가 성력으로 몸에 묻은 피와 살점들을 정화하는 사이, 노아는 레토의 곁으로 다가갔다.
“다 같이 가는 거야.”
“응.”
“돌아가면 나눠야 할 말도 많을 거고.”
“…나 혼나는 거야?”
“네가 혼나야 한다는 건 알고 있구나.”
혼나기만 하면 다행이겠지?
그 말을 끝으로 노아는 입을 다물었다.
레토는 심장이 철렁거렸다.
‘아, 야단났네.’
지금 절 보는 노아는 아주 위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올봄. 플랜시 전 소장과 왕실 기사들을 체포하는 계획을 준비하면서 노아를 몰래 제외했을 때.
그걸 알아 버린 노아가 이별을 통보했을 때.
노아는 바로 그때와 똑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
이제 대원들의 마지막 작전은 무사 귀환이었다.
“지금부터는 제가 대장을 맡겠어요.”
아스는 저를 포함한 여섯 명의 허리에 끈을 묶었다. 어둠 속에서 헤매지 않고 길을 찾아가기 위해서였다.
제 허리에 둘린 끈을 만지작거리며, 레토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웃어 버렸다.
‘원천 봉쇄네.’
거기다 하필 또 제 뒤에 노아가 있었다.
“여러분이 왔던 길로는 다시 돌아갈 수 없어요. 우리가 도착할 즈음엔 동굴 앞 초소에 사람이 있을 테니까요.”
“닉스 소장이 소란을 감지하고 육군을 보내는 건가?”
아티가 물었다.
저 망할 놈과 말 한마디 섞기 싫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아스는 어쩔 수 없이 대답해야 했다.
“…예, 뭐. 그래서 다른 길로 가야 해요.”
“그 길이 어딘데?”
노아의 물음에 아스가 싱긋 웃었다.
“백견이 불여일행이라잖아요. 시간도 없으니 직접 가 보죠.”
“그 말, 아티 오빠도 여기 들어올 때 했던 말인데….”
헉!
말실수를 깨달은 아미가 서둘러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지만, 이미 늦어 버렸다.
“…어쨌건 가 보죠.”
아스는 못 들은 척하며 움직였다. 덩달아 뒤에 쪼르르 선 다섯 명도 따라 움직였다.
“그리고 참고로 말해 두는데, 그런 고어는 저 말고도 개나 소나 다 알고 있으니까, 그딴 것에 함부로 의미부여 하지 말아 주세요.”
“아무도 뭐라고 안 했어.”
아티가 입꼬리를 히죽였다.
“…굳이 여섯 명 다 생존해서 갈 필요가 있나요? 한 명 정도는 불의의 사고로 죽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
이후로는 어떤 잡담도 없었다.
아스의 말대로, 자신들이 빠져나온 곳으로 추정되는 산 중턱에 불빛이 환하게 비쳤다.
아무도 없던 낡은 초소에 사람이 들어온 것이었다.
아스는 그들의 감시를 피하는 사각지대를 완벽하게 찾아 움직였다.
그리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설마 산을 넘는 거예요?”
다시 갈색 머리로 돌아온 아미가 물었다. 미리 챙겨 온 마법약을 먹어 은발과 보라색 눈을 감췄다.
“아니, 아마 여기 즈음에….”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아스가 좁은 길목을 찾았다.
“찾았다!”
그곳엔 아주 좁고 어두운 협곡이 이어져 있었다.
그 안으로 들어서면서, 아스가 설명했다.
“이 협곡은 보레알 산맥과 이어져 있어요. 쭉 가다 보면 이노스 영지 뒷산과 만날 수 있어요.”
“이노스 영지라면….”
노아가 간첩을 잡을 때 나눴던 작전 계획을 떠올랐다.
분명 간첩들의 동선 중에 있었던 북부 영지 중 하나였다.
그리고 위치는 최북단 아퀼로 영지 바로 아래에 있었다.
“여길 통해서 가면 여러분이 지나온 동굴을 거쳐 가는 것보다 훨씬 편하고 거리도 짧죠.”
지금부터 쉬지 않고 걷는다면 동트기 전에 이노스 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여기로 왔었다면….”
아미는 대놓고 아쉬워했다.
“대장 잘못 둬서 고생을 사서 했네.”
“그것도 며칠 뒤면 좋은 추억이 될 거야.”
아티가 아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스 언니 말대로 한 명 정도는 죽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은데?”
다른 사람들도 속으로 격렬하게 동의했다.
여섯 명은 아스의 인도하에 협곡을 지나갔다.
가파른 산맥 아래는 비좁았지만, 동굴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여기선 허리를 굽히거나, 답답한 공기를 최대한 내쉬는 노력을 할 필요가 없었다.
“…노아.”
레토가 슬쩍 뒤에 있던 노아를 불렀다.
“왜.”
그냥 대꾸하는 건데, 레토는 그게 꼭 말 걸지 말라고 짜증 내는 것처럼 들렸다.
그는 그게 제발 저의 착각이길 바라며 애써 태연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부터 들러야 할까?”
“어? 아, 클라레 말이야?”
“응.”
“그럼 오케아누스 저택으로 먼저 가자.”
증거는 어차피 아티를 통해서 로세카 검사에게 전달해도 됐다.
“드릴 말씀도 있고.”
“무슨 말씀?”
“클라레 맡아 줘서 감사하다고 해야지.”
“…아, 맞다.”
평범한 대답에 안심한 레토는 저도 모르게 가슴을 쓸었다.
“…….”
노아는 어둠이 제법 익숙해진 시야로 남편의 동작을 전부 지켜봤다. 그리고 일부러 못 본 척했다.
그렇게 3시간을 걸었다.
중간에 휴식이라곤 고작 두 번밖에 없는 강행군이었지만, 피니치 구역으로 향할 때와 비교하면 무척 수월했다.
그리고 잠시 후.
“…여기예요.”
아스가 협곡 사이에 난 가파른 산길을 가리켰다.
그곳을 10분 정도 오르자, 부산스러운 소음이 들렸다.
내려다보니 산속 공원에서 새벽 운동하는 어르신들이 보였다.
드디어 이노스 영지에 도착했다.
***
여섯 명은 또다시 화물열차에 올라탔다.
그러나 이번에 올라탄 화물칸은 앞서 탔던 곳처럼 무기가 준비되어 있거나 하진 않았다.
그저 평범한 수화물로 가득했다.
다들 수화물 사이사이에 몸을 눕히며 며칠간 쌓인 긴장을 가까스로 풀었다.
“락소 씨, 몸은 괜찮아요?”
아미는 저 때문에 힘들어했단 락소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죄송해요. 아깐 너무 화가 나서 사리 분별 제대로 못 했거든요. 그냥 다 죽여 버리겠단 생각뿐이라서….”
“괜찮아요.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 입장이었잖아요.”
락소는 오히려 아미를 두둔했다.
겨우 숨돌릴 수 있게 된 지금, 대원들은 그간 자신들이 숨겨 왔던 비밀들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놨다.
“그나저나 성녀님이셨군요.”
“그렇게 안 보이죠?”
“예.”
락소는 힘줘 답했다.
정말, 어디를 봐도 아미는 성녀와 가장 거리가 멀었다.
“눈동자와 머리칼은 아드벨로에서 만들어 준 마법약으로 항상 감췄죠. 성력은 신성청의 탐지 마법에 걸리지 않을 정도로만 썼고.”
모든 걸 억누르고 감춰야 했지만, 그 대가로 손에 넣은 자유는 너무나 귀중한 것이었다.
“그럼 아까 피니치 구역에서 폭주했던 힘은….”
노아가 염려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로 물었다.
“…신성청에서 벌써 탐지했겠네?”
“아마도?”
아미는 부정하지 않았다.
하나 그렇다고 그 상황을 심각하게 여기지도 않았다.
오히려 아주 잘되었단 듯이 사악하게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가출했던 성녀가 피니치 구역에서 폭주했으니….”
“이도 저도 못 하겠군.”
레토의 추측에 아미가 눈웃음을 지었다.
“바로 그겁니다.”
성녀라는 사실이 밝혀져도, 아미는 몸에 밴 군인 말투를 여전히 지켰다.
“증거 회수하라고 보낸 성기사들까지 죽었으니, 누굴 의심하겠습니까?”
“육군이겠지.”
“그런데 때마침 육군에서도 사망자가 나왔단 말입니다?”
안 봐도 뻔했다.
저들끼리 서로 의심하며 으르렁거릴 것이.
“당장 예상 가능한 건….”
아미가 운을 띄우자, 노아가 그 뒷말을 이었다.
“…신성청은 플랜시 전 소장의 재판에서 그의 변호를 포기하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