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7화 (147/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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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

끊임없이 쏟아지는 힘은 마치 거대한 파도와 같았다.

힘은 계속해서 커졌고, 멈출 기미가 없었다.

저 힘의 끝을 가늠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누가 하늘의 높이를 잴 수 있고, 바다의 깊이를 잴 수 있는가.

“사특한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힘을 주시옵고, 미천한 저의 믿음에 악랄한 꾀임이 들지 않도록 바라보아 주시고….”

아미의 뒤로 어떤 형상이 조금씩 비치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지 않던 성스러운 힘이 하늘 높이 솟구치더니, 거대한 대리석 조각처럼 형태를 갖춰 갔다.

그 모습은 꼭 신의 명령을 받고 강림한 천사 같았다.

“저의 눈앞에 있는 삿되고 간사한 적을 물리칠 수 있는 용기와 단죄의 검을 내려주시어….”

등 뒤에 달린 커다란 세 쌍의 하얀 날개.

무엇으로도 뚫을 수 없을 것 같은 새하얀 갑옷.

갑옷 허리에 두른 황금빛 허리띠에 달린 위용 넘치는 검.

“…어머님의 하해 같은 기적을 증명토록 하시옵소서.”

기도가 끝났다.

아미는 몸을 천천히 일으켰고, 천사는 검을 느릿하게 뽑았다.

지상을 가리키는 천사의 검은 아주 느리게 움직였으나, 절대 피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검날이 가리키는 그곳엔 굳어 버린 성기사들이 있었다.

“…….”

“…….”

자리에 있던 모두가 침묵했다.

어떤 누구도 이 기적 앞에선 함부로 입을 열 수 없었다.

천하의 아티도 넋 나간 표정으로 아미의 뒤에 떡하니 선 천사를 바라볼 뿐이었다. 락소는 그조차도 할 수 없어 끙끙거렸다.

“…마, 말도 안 된다!”

하나 안타깝게도, 성기사 중엔 경이로운 기적을 부정하는 어리석은 자가 숨어 있었다.

“이런 요망한 것이! 사특하고 간사한 건 바로 저것이다! 어디 감히 성녀님의 흉내를…!”

“쉿.”

아미가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갔다.

그러곤 입술에 댔던 손가락을 성기사들에게 뻗더니, 이내 아래로 휙 내렸다.

“커헉!”

“윽!”

“아아악!”

그러자 성기사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일제히 바닥에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그들의 몸을 짓눌렀다.

성기사들은 그제야 몸을 떨었다.

“서, 성녀님…!”

누군가는 울먹이며 죄를 사해 달란 듯이 바들바들 떨었다.

하지만 그들의 눈앞에 우뚝 선 성녀는 익히 알던 모습이 아니었다.

한 떨기 백합처럼 청초하고 가녀렸던 순백의 성녀는 여기 없었다.

대신 햇빛에 잘 그을린 건강한 피부와 꾸준한 단련으로 튼튼한 몸을 지닌 군인만 있었다.

싸늘한 시선이 성기사들을 쭉 돌아보던 중.

“…와아.”

아미가 반갑단 듯이 히죽거리더니.

“너.”

뒷골목 깡패처럼 쭈그려 앉아, 어떤 성기사의 복면을 거칠게 벗겨냈다.

그리고 드러난 머리칼을 한 움큼 쥐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내가 똑똑히 기억하고 있지.”

“서, 성녀….”

무어라 말하기 전에, 아미는 냉큼 그의 머리를 바닥에 내리찍었다.

땅에 처박힌 그의 입에선 괴로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성기사단 1부대 부단장 파르수스 경이었지? 내가 가출하기 전에는?”

“으, 으으….”

고개를 들어 올리자, 코피가 터진 파르수스 경이 숨을 헐떡거렸다.

“내가 왜 널 똑똑히 기억하는지, 넌 알고 있지?”

“…….”

“갑자기 모르는 척해? 넌 나 알잖아. 네가 날 왜 아는데? 응? 뭘 했기에 날 아직도 기억하고 있냐고.”

쏟아내는 아미의 목소리는 점점

“X발! 네 새끼가 날 매일 그 늙은 변태 새끼한테! 데려다줬으니까! 기억하는 거 아니야!”

쾅! 쾅! 쾅! 쾅!

아미는 말을 끊을 때마다 성기사의 머리를 계속 땅에 찍었다.

“내가 거기서 무슨 짓을 당했는지 넌 알지? 아니까 늘 그딴 눈으로 날 봤던 거지….”

“으, 으으….”

“다 죽어 가는 늙은 새끼가 꼴에 살겠다고, 내 성력을 훔쳐 갔잖아. 찢어발겨도 시원찮은 그 새끼가 내 몸을 더듬거리면서 성력을 받아 갔다고!”

울분에 찬 목소리가 공허하게 외쳐졌다.

미신 중에 이런 것이 있다.

늙은이가 저보다 한참 어린 사람과 함께 잠들면, 그의 젊고 힘찬 기운을 받아 회춘할 수 있다고.

그래서 성왕은 어린 성녀를 늘 곁에 두고 잤다.

아미는 그것이 뭔지 모르는 채 옆에서 잠들었다. 그냥 같이 잠만 잘 뿐이었고, 그래서 이상하다고 생각도 못 했다.

하지만 성왕은 점점 모자라는 성력을 얻기 위해 어린 성녀의 몸에 제 손을 내뻗었다.

처음에는 손.

다음은 포옹.

초경을 시작한 뒤에는 억지로 볼에 입을 맞췄다.

그때 아미는 태어나 처음으로 역겹다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리고 마지막은….”

“…….”

“…나와 성왕의 결혼이었지.”

그때 아미는 고작 14살이었다.

14살 소녀와 124살의 할아버지가 결혼이라니. 심지어 종교적 교리로 성직자들은 모두 순결을 지켜야 하건만.

신성청은 이 모든 교리를 어기고 아미를 늙은 괴물의 희생양으로 삼았다.

“한데도 너희는 잘도 성기사의 갑옷을 입고 있구나. 어머님의 상징을 두르고도 감히 부끄럽지 않더냐.”

아미의 노골적인 비아냥에 성기사들이 얼굴을 붉혔다.

당연했다. 이곳엔 신을 섬기는 독실한 성기사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신성청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용병들만 있을 뿐.

침묵하는 성기사들을 노려보던 아미가 손에 들고 있던 파르수스를 쓰레기 버리듯 내동댕이쳤다.

“그러고도 나를 찾았더냐.”

그런 역겨운 속내로.

반성하는 흉내조차 없이.

“다 죽어 가는 괴물에게 내 성력을 빼앗아 바치려고, 살기 위해 도망친 나를 찾으려 왔던 것이냐!”

불호령이 성기사들의 몸을 한 번 더 짓이겼다.

“…보아라.”

불현듯 자비로운 미소를 지은 아미가 두 팔을 넓게 벌렸다.

“하늘에 계신 자비로운 어머님이, 너희에게 등을 돌렸구나.”

그러고는 팔 하나를 하늘 높이 들었다. 아미의 뒤에 있던 거대한 천사도 따라 검을 들었다.

천사는 모든 진실을 들었다.

그러니 판결을 내릴 때였다.

“삿된 것들아.”

팔을 내리기 전, 아미가 말했다.

“지옥에서 너희의 동료들을 기다리거라.”

내 곧 보내줄 터이니.

아미가 팔을 내리니, 천사가 검을 휘둘렀다. 이윽고 처절한 단말마가 여기저기서 울렸다.

성녀의 단죄가 시작되었다.

그것은 신의 진노를 받은 타락한 영혼들을 잔혹하게 찢어 죽이는 학살이었다.

***

“…쟤 진짜 성녀였어?”

대원들과 합류한 노아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조금 떨어진 뒤에서 아미의 처절한 분노와 울분을 전부 들은 노아는 눈앞에서 펼쳐지는 잔혹한 학살에서 결국 시선을 돌려버렸다.

“이런 반전은 대장님 이후로 없길 바랐는데.”

레토가 비통히 중얼거렸다.

“난 이제 치티아 중위에게도 존대해야 하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

노아가 아티에게 물었다.

“서둘러 수도로 돌아가야 해.”

그 말에 레토의 눈이 일순 동그래졌다.

“지금 이 난리를 육군이 감지 못할 리가 없지. 아예 병력을 이끌고 여기로 올 수도 있어.”

“나도 동감이다, 동생아.”

아티가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 전에 우리 성녀님이 좀 진정해야 할 텐데.”

그의 말대로였다. 아미의 성력으로 구현된 거대한 천사는 성기사였던 것들을 도륙하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다짐육을 쏟은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일단.”

레토가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어둠을 헤쳐나가는 것도 문제입니다.”

그래서 레토는 제안을 하나 했다.

“치티아 중위, 아니, 성녀님의 학살도 거의 끝난 것 같으니….”

레토의 말대로, 단죄를 마친 천사가 조금씩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이제 저곳에 두 다리로 서 있는 건 아미뿐이었다.

숨을 쉬는 것도 아미뿐이었고.

“조를 나눠서 동선을 따돌리는 방법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이유는?”

아티가 물었다.

“육군에서 분명 무장 수색대를 보낼 겁니다. 조금 전 자신들이 보낸 대원들이 죽은 것을 확인할 테고, 그렇게 되면 전투가 불가피합니다.”

문제는 자신들이 가진 불리한 조건이었다.

“저희는 내일까지 수도에 도착해야 합니다. 정체도 들켜선 안 되고.”

아무리 이쪽 실력이 우위여도 전투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레토는 사람을 나눠야 한다고 주장했다.

“락소도 조금씩 기력을 되찾고 있으니, 그와 벨로, 치티아 세 사람이 수도로 돌아갑니다.”

“그럼 나와 그대가 여기 남아서 혼동을 주자고?”

“말도 안 돼!”

노아가 바로 반박했다.

“중장님은 재판의 중요 증인입니다. 법정에 중장님이 없으면 어쩌자는 겁니까!”

“어차피 내 증언은 첫날 재판 때 끝났잖아.”

“추후에 어찌 될지 모르잖습니까!”

노아와 레토가 매서운 말다툼을 벌이는 동안, 아티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들을 뿐이었다.

웃지도, 비아냥거리지도 않은 채.

“오케아누스 중장.”

그리고 한참 뒤에 입을 뗀 그는 레토에게 물었다.

“그게 자네의 대답인가?”

조금 실망했단 표정으로.

“그게 유일한 방법입니다.”

“정말?”

“…그럼 아닙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 유감이군.”

“…….”

“나도 내가 쓰레기인 걸 알지만, 그래도 내 여동생은 나와 같은 부류는 만나지 않길 바랐는데….”

동류였군.

“그대도 꽤 비열한 쓰레기였어, 오케아누스.”

아티가 비식거렸다.

“그런데 어쩌지?”

“…….”

“나는 그렇게 하기 싫거든.”

그와 동시에, 선명한 인기척이 이곳을 향해 달려왔다.

서둘러 총구를 겨눴던 노아와 레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휴, 위험하게 진짜.”

정체불명의 괴인이 혀를 내두르며 잔소리하더니, 눈 아래를 가린 마스크를 슥 내렸다.

“그러다 저 맞으면 어쩌려고 그래요. 총알은 박히면 아파서 빼는 것도 힘든데.”

“처, 처형?”

레토가 얼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처형이 여기에 왜….”

눈앞에 나타난 괴인의 정체는 아스였다.

***

아스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집안일을 할 때처럼 머리를 한데 올려 동그랗게 말아 묶었고, 얼굴색도 편안했다.

어떤 할인 상품도 전부 살 수 있다는 자신만만한 표정 역시도.

하지만 그녀가 입은 검은 잠행복, 허리춤에 달린 조그만 단검, 손이 닿는 주머니에 숨겨진 표창들.

그건 아스가 평범한 가정주부가 아니란 사실을 방증했다.

“야!”

노아는 소리쳤다.

“네가 여기에 왜 있어!”

다만, 노아가 화가 난 이유는 단순히 다른 이들이 아스의 정체를 알아 버린 탓은 아니었다.

“클라레는 어쩌고! 내가 클라레 잘 부탁한다고 했잖아!”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아스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여기로 출발하기 전에 오케아누스 저택에 따로 연락드렸거든요. 지금쯤 그곳에서 즐겁게 놀고 계실 거예요.”

아스의 말대로, 클라레는 오케아누스 저택에서 아주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무려 어린이 과학 박물관이 주최한 장기자랑에서 열정적인 엉덩이 춤으로 1등과 인기상을 동시에 거머쥐는 쾌거를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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