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
‘총으로 안 싸워도 정말 이길 수 있을까?’
페미나를 쥐었지만, 레토는 과연 자신이 이 검으로 눈앞에 있는 적들과 싸울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대부분의 군인이 그러하듯 레토 역시 주무기는 검이 아니라 총이었다.
거기다 최근엔 기술이 발달해서 군인이 나서서 싸우는 일은 점점 줄어드는 추세다.
이런 시대에서 검으로 싸우다니.
‘하다못해 근접용 단검이면 몰라도….’
그런 레토의 망설임을 느꼈는지, 노아가 레토의 등을 툭 건드리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막상 써 보면 아주 마음에 쏙 들걸?”
“대위님, 이 부족한 남편은 여전히 걱정입니다.”
“실전 훈련이라고 생각해.”
“난 이 검으로 싸우는 방법을 배우지 않았거든?”
“그건 오러가 직접 알려 줄 거야.”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돼!
칭얼거리는 남편을 무시하며, 노아가 앞을 바라봤다.
기름통에 피워 뒀던 모닥불을 끈 지금, 야심한 밤을 비추는 건 하늘에 무수하게 뜬 별들뿐이었다.
즉, 적의 움직임이 잘 보이지 않았다.
“여기는 파스타. 현재 적이 움직이는가?”
무전기에 대고 물어보니, 곧 대답이 돌아왔다.
[여기는 예쁜이! 8명 모두 정지했다고 한다.]
무전을 끊은 노아는 빠르게 과거를 돌이켜봤다.
‘이 감각 알아.’
노아는 언젠가 한 번, 이 감각을 느껴본 적이 있다.
얼굴 모를 적들의 살기, 거의 느껴지지 않는 발소리, 모든 기척을 감춘 듯한 행동.
그래서 알 수 있었다.
‘아스와 똑같아!’
노아가 이를 바득 깨물었다.
“검을 뽑아!”
노아의 외침에 레토가 검을 뽑았다. 그러자 검에 담긴 노아의 오러가 기다렸단 듯이 레토의 손바닥을 타고 몸속으로 들어왔다.
“……!”
순간, 레토는 알 수 있었다. 지금 제 몸속을 헤집는 오러는 해군 연무장에서 가만히 선 채로 적응하던 것과 완전히 달랐다.
삿된 것을 베라.
검에 각인된 그 문장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동시에 적들이 움직였다.
달려오는 그들은 군인의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저 움직임, 그리고 저들이 하고자 하는 일은 결코 정의로운 군인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잡생각 하지 마!”
노아가 소리쳤다.
“…이거야 원.”
레토가 비식거리며 자세를 낮췄다.
“명색이 상관이 하관에게 혼쭐이 나다니.”
짜릿한데?
달콤한 하극상을 음미하듯 혀로 제 입술을 날름 핥더니, 레토가 검을 빼냈다.
그리고 휘둘렀다.
오러에 겨우 적응한 초짜, 심지어 주무기가 검이 아닌 레토는 노아가 시키는 대로 했다.
머릿속에는 오로지 삿된 것을 벤다는 생각만이 가득했고, 노아의 푸른 오러는 그의 전신을 휘감았다.
생전 경험해 보지 못한 힘이 몸 곳곳에서 용솟음쳤다.
쾅-!
발돋움을 위해 지면을 박차니, 땅에 금이 가더니 제법 큰 흠이 파였다.
적을 향해 달려 나가는 속도는 인간의 범주를 뛰어넘었다.
너무 빨라서 레토 본인도 믿기지 않았다. 꼭 제 붉은 애마를 탄 것 같았다.
싸우는 방법은 간단했다. 검 속에 담긴 오러가 레토에게 가르쳐 줬다.
그저 눈에 보이는 삿된 것을 베면 된다고.
그래서 레토는 삿된 것들을 베어냈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푸른 번개가 휘몰아쳤다. 그 찰나마다 레토의 붉은 눈동자에 푸른 번개가 일렁거렸다.
번개는 검날을 타고 적을 찔렀고, 그때마다 적의 몸이 종잇장처럼 가볍게 떨어졌다. 레토는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전쟁 때 연합군들 사지를 뜯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
“집중!”
또 딴생각에 빠지려는 순간, 노아가 호통쳤다.
사실, 레토보다 더 대단한 건 노아였다.
오러에 취해 적과 싸우는 레토의 서투르고 과격한 공격을, 노아는 완벽하게 호흡을 맞추며 곁을 지켜봐 주고 있었다.
노아가 앞장서서 싸우지 않는 건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그녀가 레토보다 강했기 때문이고, 그렇기에 그의 실수를 메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자식은 진짜…!’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노아는 레토의 실력에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설마 이렇게까지 잘할 줄이야.’
늘 그랬다. 레토는 항상 배우는 속도가 빨랐고, 남들보다 월등한 성취 결과를 보였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경험하는 실전에서 이렇게나 제대로 된 싸움을 하다니.
‘믿음직한데 역시 재수 없어.’
그래도 빈틈은 많았다. 오러에 취해 앞만 몰두하는 탓에, 옆을 파고드는 적을 알아차리는 게 늦었다. 그런 것들은 노아가 빠르게 이동해 처리했다.
너무 잘 해내는 레토는 재수 없지만, 그래도 이렇게 등을 맞대고 부부검으로 싸울 수 있단 사실이 내심 기뻤다.
‘부모님도 이랬을까.’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서, 노아는 돌아가신 부모님을 떠올렸다.
8명을 해치운 건 순식간이었다.
“…허억, 헉!”
붉은 눈동자에 일렁이던 푸른 번개가 사라지자, 레토는 숨을 거칠게 내뱉으며 주저앉았다.
“와아, 지치네…!”
개인 함선을 타고 훈련할 때와 맞먹는 피로가 단숨에 밀려들었다. 전신에 힘이 쭉 빠지니 당장 일어나는 것도 힘들었다.
“고생했어.”
노아가 손을 내밀었다. 레토는 그걸 잡고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아 역시 레토만큼은 아니어도 제법 지친 상태였다.
“처음치고는 아주 잘했어. 내가 질투 날 정도였다니까.”
“스승님이 좋아서 잘할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찾아올 근육통이 심할 테니까, 돌아가면 근육 꼼꼼하게 풀어….”
그 순간.
“……!”
노아와 레토가 서둘러 뒤를 돌아봤다.
조금 전 자신들이 머무르던 폐광산 근처 야영지에서 거대한 마력이 느껴졌다.
“뭐, 뭐야, 이거…!”
태어나 처음 느껴 보는 마력, 아니, 마력이라기엔 너무나 성스럽고 따스한 기운이었다.
노아와 레토는 서둘러 야영지로 달려갔다.
그런데 기묘했다.
‘응?’
노아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레토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성스러운 힘에서 살기가 느껴질 수 있나?’
‘그리고 묘하게….’
묘하게 익숙한 기운이었다.
***
노아와 레토가 전방에 있던 8명을 해치우러 간 사이, 야영지 우측으로 숨어든 두 명은 락소의 저격으로 빠르게 처리했다.
‘그런데 방금 그건….’
아미는 노아와 레토가 달려간 곳을 응시했다.
조금 전 느껴진 흉악하고 폭력적이던 힘이 신경 쓰였다.
“7, 6….”
그런 와중에도, 아티는 계속해서 초를 거꾸로 세고 있었다.
“3, 2, 1….”
그리고 숫자를 전부 센 순간.
“…의 반.”
아티는 느닷없이 숫자를 늘리기 시작했다.
“반의 반, 반의 반의 반.”
“…….”
“…….”
뭐 대단한 것이 나타나는 것처럼 굴더니, 사기꾼 같은 모습에 아미와 락소는 할 말을 잃었다.
‘뭐 하는 거야, 저게.’
손에 든 총으로 저 인간의 이마 정중앙을 쏠까, 잠시 고민하던 중.
“……!”
후방에서 수상한 기척을 감지한 아미가 재빨리 총구를 어둠 속으로 조준했다.
락소도 서둘러 총구를 돌려 후방을 살폈다.
“…후방에서 다수의 인원을 확인했습니다.”
“인원수는?”
초 세는 걸 멈춘 아티가 태연한 목소리로 물었다.
“30명, 아니, 40, 50…!”
락소의 눈에 들어오는 정체불명의 괴인은 점점 늘어났다.
보고를 듣던 아티가 슬쩍 아미를 살폈다. 아미는 이미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당장 달려 나가고 싶어 달싹거리는 몸, 욕을 한껏 퍼붓고 싶어 근질거리는 입꼬리.
그리고 눈앞에 있는 원수들의 피를 갈망하는 눈동자.
“내가 말했지?”
아티가 얄밉게 빈정거렸다.
“네 차례가 곧 올 거라고.”
신성청의 존속이 달린 증거들이 육군과 가까운 국경 너머에 있다.
그런데 고작 성기사 10명만 움직였을까.
“성기사단은 고지식하고 신중하기로 유명하니까, 소수의 인원만 보내 확인했겠지. 나머지는 떨어진 곳에서 대기할 테고.”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동료들이 돌아오지 않으니, 이상함을 감지하고 직접 움직인 것이다.
거기다 조금 전 노아와 레토의 전투로 흉포하고 거대한 힘도 감지했을 터.
“그러니까 저것들을 여기서….”
“…죽여도 탈이 없단 거죠?”
입꼬리를 삐딱하게 올린 아미가 조금씩 마력을 해방했다.
아미는 노래하듯 흥겹게 중얼거렸다.
“국경 중립지대에서 의문의 전투로 다수의 사망자 발생….”
그걸 감지하지 못한 육군을 탓하기 좋고.
신성청은 다수의 전력을 잃었음에도 어떤 말도 하지 못한 채 속앓이할 테고.
“…나는 드디어 복수를 할 수 있어서 좋고!”
우렁찬 기합과 함께, 아미의 몸에서 폭발하듯 마력이 솟구쳤다.
예고 없는 거대한 힘은 거대한 파도처럼 사방을 뒤덮었다.
“…윽.”
아티는 짓누르는 힘을 견디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버티려 했지만, 결국은 한쪽 무릎을 꿇어 버렸다.
감히 신의 사랑을 받는 딸 앞에서 두 다리 멀쩡히 선 채 버틸 수 없다는 듯이.
‘이만한 힘을 지니고도 어떻게 여태 참고 산 거냐….’
할머니랑 어머니한테 혼날 때 느꼈던 중압감과 비슷했다.
하지만 경외심마저 느껴지는 이 신성한 기운은 결코 그 둘은 흉내 낼 수 없는 것이었다.
“쿨럭…!”
락소는 힘을 견디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다섯 대원 중 상대적으로 마력이 별로 없는 락소는 제정신을 유지하는 것도 힘든 상태였다.
아티가 그를 부축하는 순간.
폭력처럼 몰아붙이던 힘이 단숨에 자취를 감췄다.
이게 어찌 된 건지 영문을 몰라 두리번거리던 락소의 눈에 낯선 여인의 모습이 비쳤다.
“…치티아 양?”
분명 아미처럼 보이는데, 선뜻 아미라고 확신할 수 없었다.
자신들과 똑같은 시커먼 잠행복을 입었고, 얼굴 생김새며 체격 등도 자신이 며칠 지켜본 아미와 똑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짙은 갈색 머리에 갈색 눈동자를 지녔다.
새하얀 은발과 반짝이는 보랏빛 눈동자가 아니라.
당혹스러운 건 락소만이 아니었다.
“서, 성녀님?”
성기사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성녀님의 성력이다! 그분의 성력이야!”
“성녀님이 왜 여기에…!”
“어째서 그분이 이곳에…!”
당혹스러움과 놀라움, 그리고 드디어 성녀를 찾았다는 일말의 반가움이 섞인 어수선함 속에서.
“하늘에 계신 위대한 어머님.”
아미가 무릎을 꿇고 손을 모았다.
“어머님의 부덕한 딸이 감히 고백하며 기도를 올립니다.”
삿된 것들을 처단할 자격을 주소서.
폭력 같은 힘이 다시 출렁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