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4화 (144/245)

144.

백합은 하늘에 계신 어머님을 상징하는 꽃이며, 비슷한 이유로 신성청에서도 자신들의 상징이나 문장으로 삼기도 했다.

그래서 역대 성왕들은 백합 종류 중 하나를 자신들의 가명으로 사용했다.

“아스포텔은 빨간 줄무늬가 있는 하얀 백합을 뜻합니다. 확실합니다, 이건 현 성왕인 스켈레로 3세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잠깐, 그럼 이거 보낸 사람이…!”

락소가 서둘러 편지 말미에 적힌 발신인 이름을 다시 확인했다.

베스페라.

“설마 이 베스페라란 이름이…!”

“…디모네 닉스 소장의 가명이야.”

레토가 가라앉은 시선으로 편지를 노려봤다.

“편지 마지막에 저 시가 자국이 증거고.”

“담뱃불 자국이었나?”

아티가 몰랐단 듯이 과장되게 되물었다. 그러면서 슬쩍 레토를 바라봤다.

레토는 어떤 말도 없었다. 그저 날 선 눈빛을 번뜩거릴 뿐이었다.

당장이라도 편지를 찢을 것처럼.

“…하긴, 담뱃불이라기엔 너무 크군.”

아티는 화제를 다시 돌렸다.

“정보상, 이거 어디서 찾았다고 했지?”

“상자 바닥 틈에 있었습니다. 틈이 비좁아서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좋아. 그러면 다들 하던 걸 멈추고 상자를 살피도록.”

아티가 명령했다.

예상한 대로였다. 락소가 발견했던 것처럼, 상자 틈새에 편지나 두세 번 접힌 서류가 숨어 있었다.

‘나머지는 전부 눈속임이었구나.’

노아는 상자를 살살 부숴 틈새의 편지를 꺼내며 생각했다.

‘상황을 보면, 이것도 닉스 소장의 계획이 분명해.’

신성청에 무어라고 말했는지 모르겠으나, 성기사단이 여기까지 와서 증거들을 직접 치우려고 한 걸 보면 분명 큰 약점을 붙잡힌 게 분명했다.

정황상, 닉스 소장은 그 약점을 들먹이며 재판에서 자기를 도와달라고 요청했을 것이다.

하지만 닉스 소장은 그 증거들을 쉽게 줄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미세한 빈틈이 있는 상자 바닥에다 중요한 증거들을 숨겨두고, 관련도 없는 서류들을 폐광산에 옮겨 둬 눈속임을 한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성기사단들은 눈앞에 있는 서류에만 정신이 팔려서, 상자는 눈길도 주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 상자 속에 숨겨둔 것들은….’

자신들이 찾는 증거란 뜻이기도 했다.

“…역시!”

노아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찾았습니다. 폐광산 진입을 위해 초소병 휴식 시간을 알리는 내용입니다.”

“나도 찾았어! 신성청의 고아원 후원 자금 논의가 적혀 있어야.”

“여기엔 육군 무기고 밀반출 거래 현황을….”

“아스포텔이 베스페라에게 보낸 편지도 있군.”

상자 속에 숨겨진 증거는 총 8개.

개중 3개는 닉스 소장과 신성청 관계자가 주고받은 편지였고, 나머지 5개는 불법 사병 단체 운영과 관련된 전보였다.

그리고 여기에서 엄청난 사실 두 가지가 드러났다.

하나는 신성청과 육군의 비열한 협력 관계가 제법 오래전부터 이어졌단 점이었다.

“가장 오래된 증거가 14년 전이군.”

아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 외의 다른 증거들도 거의 10여년 전을 기준으로 하고 있었다.

이중 가장 최근 것이 락소가 처음 발견했던 편지였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건 날짜가 7년 전이군.”

“그럼 혹시 이 늙은 늑대, 선대 국왕을 말하나?”

노아가 제 추측을 말했다.

“왕가의 상징은 늑대고, 선왕은 7년 전 식사하던 중에 승하했다고 알려졌으니까….”

“잠깐, 그러면 설마….”

아미가 떨리는 목소리로 끝맺지 못한 나머지 말을 이어 했다.

“…여기에 선왕도 연관됐단 소리야?”

[늙은 늑대가 죽어 버렸습니다.

경거망동은 삼가야 합니다.]

편지에 적혔던 그 구절.

만약 늙은 늑대가 죽은 선왕이라면, 저 구절이 뜻하는 바가 의미심장해진다.

선왕이 죽어 버렸으니 함부로 행동해선 안 된다고.

“오빠.”

노아가 아티를 불렀다. 애써 침착하게 말하곤 있지만, 목소리 속에 감춰진 분노는 여실히 드러났다.

“이거, 단순히 국가 반역 따위가 아니지?”

“…….”

“여기까지 와서 아무 말도 없는 건 치사하지 않아? 이제 보니 재판 증거를 찾는 건 완전히 핑계 같은데?”

“그런 건 아니고….”

천하의 아티도 여동생의 피 말리는 협박성 경고는 무서웠다. 그는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레토와 락소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건 아주 큰 실수였다.

“…너네 둘도 알아?”

순간, 제대로 터진 노아가 레토의 멱살을 쥔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콜록, 레토가 헛기침을 토했다.

“내가 분명히 전에도 말했지? 임무 수행 중에 나 빼놓는 짓거리 하면 그땐 끝이라고.”

“저기, 자기야….”

“아이고, 벨로 양! 잠깐 진정하고….”

철컥!

황급히 말리려던 락소의 이마에 총구가 겨눠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총을 꺼낸 노아는 엄지손가락으로 안전장치까지 완벽하게 해제했다.

동시에 아미도 아티의 이마에 총을 겨눴다.

“나는 왜?”

아티가 전혀 억울하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분위기상 해야 할 것 같아서요.”

아미가 방긋 웃었다.

“끼어들지 마요, 오빠. 알죠? 내가 마음만 먹으면 오빠 따윈 당장 죽일 수 있는 거….”

“내 주위엔 왜 이리 강한 여자들만 있는 건지 몰라.”

아티는 기꺼이 입을 다물었다.

그 사이, 노아는 레토에게 선택지를 제시했다.

“…세 가지 중 하나만 골라.”

합의 이혼, 이혼 소송.

와아, 아미가 소리 죽여 감탄했다. 팝콘이라도 있었다면 당장 와작와작 씹어 먹으면서 관전했을 최고의 장면이었다.

“마지막은 이실직고.”

“7년 전 전쟁을 일으킨 건 선대 국왕이야.”

레토가 순순히 대답했다.

“야!”

기가 막힌 락소가 소리쳤다.

“그런다고 진짜 말하냐!”

“하지만 이혼하기 싫은걸.”

“뭐 저런 미친놈이 다 있어…!”

“사랑에 미치면 다 이렇게 돼.”

레토는 싱글벙글 웃는 낯짝으로 노아를 바라봤다.

“말 안 해서 미안해. 하지만 국왕이 일이 해결될 때까지 극비로 부치라고 명했거든. 그러니까 다 국왕 잘못이지.”

“…….”

“궁금증은 이제 해결되었어?”

레토가 물었지만, 굳이 대답은 필요 없었다.

궁금증을 해결한 노아는 더 이상 화를 내지 않았다. 대신에 당혹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노아.”

레토는 총을 든 노아의 손을 감싸듯 쥐었다. 그리고 천천히 아래로 내리면서 다시 안전장치를 채웠다.

아미도 따라 총을 내렸다.

계속 굳어 있던 락소가 그제야 참았던 숨을 터뜨리며 냉큼 거리를 벌렸다. 아미는 그런 락소를 참 못났단 눈으로 흘겨봤다.

“더 궁금한 건, 형님께 물어봐.”

“그럼 오빠가 테네브레가 된 것도, 이거랑 관련된 거예요?”

아미가 물었다.

아티는 아주 잠깐 원망스러운 시선으로 레토를 노려봤다. 하지만 이내 자포자기 심정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시간문제이긴 했다.

어차피 이 작전을 진행하다 보면 알려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아티가 입을 열었다.

“…7년 전 전쟁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알고 있어?”

“연합국의 침략이잖아요.”

아미의 말대로였다.

7년 전 전쟁은 시스토 제국을 비롯한 연합국의 침략으로 발발했다. 그때 남부 지역이 큰 피해를 입었었다.

그리고 해군 역시.

“그럼 왜 그것들이 갑자기 침략했는지는 알고?”

“강성해진 왕국을 시기한 탓이라고….”

“그렇게 알려져는 있지.”

아티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근처에 있던 나무 상자 파편 세 개를 발로 툭툭 건드렸다.

“신성청, 육군, 그리고 왕실….”

군화 신은 발이 세 개의 파편 사이에 줄을 슥슥 그었다.

그러자 하나의 삼각형이 되었다.

“수상할 정도로 장수하는 스켈레로 3세 성왕, 당시 만년 대위였던 디모네 닉스 소장, 지금은 뒤지고 없는 무능한 선왕.”

보기에는 평범하고 단순한 도형이었다. 그러나 꼭짓점마다 이름이 붙여지는 순간, 아들라보르의 평화를 위협하는 최악의 흉물이 되었다.

삼각형을 완성시킨 아티의 발이 뒤로 물러났다.

“이게, 전쟁을 일으킨 진짜 원흉들이야.”

이어진 아티의 설명은 더욱 큰 충격을 안겨 줬다.

“전쟁의 시작은….”

***

“…그렇습니까?”

같은 시각.

“예, 곧장 직위해제를 명하겠습니다. …아닙니다. 믿었던 부관이었으니, 제대로 그를 헤아리지 못한 저의 잘못도 큽니다.”

디모네 닉스 소장은 수도에 연이 있는 지인과 통화 중이었다.

반쯤 열린 창문 밖을 바라보는 무심한 표정과 달리, 그의 목소리는 참으로 정중했다.

“아무튼 곧 법원에 출석하란 연락이 오겠군요.”

똑똑.

그때 누군가가 방문했다.

“…예, 그럼 다음에 따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닉스 소장이 바깥을 향해 들어오라 말했다. 안으로 들어온 건 피부가 창백한 붉은 머리의 남자였다.

“이마고 중사.”

닉스 소장이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이마고 중사라 불린 사내는 어떤 표정도 없었다.

“무슨 일이지?”

“그자들이 폐광산에 도착했다는 보고입니다.”

“그래?”

자리에서 일어난 닉스 소장은 서랍을 열어 철제 상자 하나를 꺼냈다.

높이가 낮고 옆이 넓은 상자 안에는 가운데가 뭉툭한 고급 시가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소장이 그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손으로 살살 만져 가며 상태를 살핀 뒤, 손가락 크기만 한 절단기로 끄트머리를 톡 잘랐다.

떨어진 시가 머리 부분이 책상 위를 타원형으로 구르다 바닥에 떨어졌다.

“지고한 그들은 아직 그곳에 계신가?”

“떠났다는 보고는 없습니다. 아직 폐광산에 있는 모양입니다.”

보고를 들으면서, 닉스 소장은 입에 문 시가에 불을 붙였다. 희뿌연 연기 속 알싸한 담뱃잎 냄새가 묘한 단내를 풍겼다.

‘…딴에 머리를 굴리는 모양이군.’

그것들을 전부 태워 버릴 줄 알았는데.

그 와중에 제 약점이라도 잡으려는 모양이었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진짜 증거는 폐광산에 있는 상자 속에 숨겨 뒀으니까.

하지만 그대로 내버려 둬선 곤란했다.

만약 그 서류에 신성청이 원하는 증거가 없단 사실을 알아채기라도 하면, 그리고 상자에 숨겨 둔 진짜 증거를 들키기라도 한다면.

‘그건 절대 안 되지.’

시가를 입에서 뗀 닉스 소장이 말했다.

“지금 몇 명이 움직일 수 있지?”

“플루스 대위와 그를 감시 중인 두 명을 제외하면, 10명입니다. 저를 포함하면 11명입니다.”

“그래 봬도 성기사니까….”

어릴 적부터 혹독한 훈련으로 단련된 신의 심복들이다.

“…10명이면 충분하겠지.”

잠시 고민하던 닉스 소장이 말했다.

“안타깝지만, 전부 죽여야겠어.”

시체도 남기지 말게.

명을 받은 이마고 중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