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
신성청에게 디모네 닉스 소장은 독이 든 성배였다.
곁에 둬선 안 되지만, 그렇다고 함부로 버릴 수도 없는 자.
‘하지만 저쪽도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건 확실하군.’
디모네 닉스 소장은 이번 재판에서 자신을 빼내 달라는 부탁과 함께, 자신이 몰래 숨겨 뒀던 증거들을 전부 내놓겠다고 말했다.
그가 증거를 숨긴 곳은 피니치 구역 너머의 폐광산.
이곳을 찾아온 성기사단 단장은 역겨운 기분이 들었다. 딱히 폐소 공포증 같은 게 있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폐광산은 과거에 신성청과 닉스 소장이 비밀리에 사병을 키웠던 장소였기 때문이다.
피니치 구역 근방 영지에 세웠던 고아원에서 아이들을 데려와 여러 기술을 가르치며 인간 병기로 만들었던 곳.
‘하필 여기에 증거를 숨겨뒀다니….’
지금 이곳에 없는 닉스 소장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잊으면 곤란합니다.”
“이곳에서 우리가 했던 일들을 말입니다.”
‘X발 새끼.’
단장은 성기사라는 신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상스러운 욕설을 속으로 하염없이 되풀이했다.
‘어쨌거나 이번 일은 우리한테도 득이다.’
저 증거들을 전부 불태우면, 이제 자신들이 이곳에서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누구도 알지 못하게 된다.
닉스 소장은 다른 증거를 쥐고 있을 것 같지만, 그도 한동안은 몸을 사릴 것이다.
‘그 새끼도 지금은 발등에 불 떨어진 상태니까.’
물론 그건 신성청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이쪽은 재판만 잘 끝나면 크게 안심이었다.
모든 죄는 닉스 소장이 준비해둔 젊은 군인에게 돌리면 되는 것이다.
미래가 창창한 젊은이에겐 미안하지만, 그것은 참으로 거룩한 희생이 될 것이다.
“…….”
다만, 단장은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무언가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뒤에서 누군가가 이 모든 것을 몰래 조종하고 있기라도 한 게 아닌지, 그것이 걱정이었다.
신성청 내부에서도 이런 불안이 계속 논의되고 있었다.
‘목이 옥죄여지는 기분이야….’
단장은 저도 모르게 목을 만지작거렸다.
철저한 닉스 소장마저 이렇게 엿을 먹고 있는 이 상황을 누가 주도하는 것인가.
떠오르는 용의자는 둘이었다.
‘…아드벨로와 국왕이 손을 잡았나?’
의심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신성청을 옭아매는 사건들의 대부분이 남부 해군과 관련되었기 때문이다.
아드벨로야 원래 신성청과 관계가 좋지 않은 편이지만, 현 국왕은 정말 예상치 못한 존재였다.
솔직히 방심했다.
아직 어려서 멋 모르는 국왕인 줄 알았는데, 설마 안보국을 해체하고 보란 듯이 테네브레를 중앙권력에 편입시킬 줄이야.
툭.
‘만만히 볼 놈이 아니야. 어쩌면 이 모든 걸 주도한 게 국왕….’
툭. 툭.
심각하게 고민 중이던 단장의 귀에 옅은 소음이 들렸다.
“…?”
주변을 살피면, 저 말고 아무도 없었다. 짐을 들고 앞서가던 기사들은 다 밖으로 나간 모양이었다.
적막한 침묵이 어쩐지 섬뜩했다.
떼구르르.
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그의 발밑에 무언가가 부딪혔다.
아래를 내려다본 단장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는 손을 뻗어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건 총알이 발사되며 떨어진 텅 빈 탄피였다.
철컥!
살벌한 화약 냄새가 단장의 몸을 포박했다.
“…안녕하신가, 성기사 나으리.”
얄미운 목소리가 안부를 물었다. 단장은 고개도 채 들지 못하고 침을 꿀꺽 삼켰다.
“…뭘 원하지?”
단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상대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저자는 자신이 성기사라는 걸 알고 있다. 그렇다면 자신들의 뒤를 캐고 있는 세력이란 뜻이었다.
그렇다면 거래가 가능했다.
“천하의 성기사가 적 앞에서 목숨을 구걸해?”
“목숨보다 중요한 건 없지.”
“그런데 왜 전쟁을 일으켰던 걸까, 우리 고고한 신성청은.”
“그…!”
픽!
소음기로 감춰진 발포음 너머로 탄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단 얼굴로, 성기사단 단장은 그렇게 쓰러졌다.
레토는 죽은 남자를 잠시 바라보다가 휙 돌아섰다. X 같은 이유를 들을 바에야, 숨 꺼지는 소리를 듣는 게 정신건강에 더 좋았다.
“……!”
그때, 뒤에서 다가오는 인기척에 레토가 서둘러 총을 겨눴다.
“…와.”
아티가 두 손을 든 채 항복하는 흉내를 냈다. 레토는 총구를 내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기척을 숨기고 다가갔는데, 그걸 느끼나?”
“이런 상황에서까지 장난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습니다만.”
“단둘이 남았을 때 뭘 좀 물어보고 싶어서.”
“노아는 어디 있습니까?”
“죽은 성기사들 몸수색하고 있어.”
혹시 증거가 될 만한 게 없는지 확인하는 중이라고 한다.
“어쨌건 뭐 좀 물어보고 싶은데.”
“사랑받는 남편 되는 방법이라도 묻고 싶으십니까? 그런다고 처형이 형님을 쉽게 용서하진….”
“닉스 소장이랑 무슨 관계지?”
“…….”
“그를 죽일 건가?”
아티의 물음에 레토는 잠시 말을 잃었다. 아주 찰나였지만, 아티는 그의 얼굴에 스친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당혹감.
‘그리고….’
아티의 눈이 미세하게 가늘어졌다.
“…관계랄 게 있습니까?”
레토가 제 감정 위로 서둘러 가면 같은 미소를 덧씌웠다.
“국왕의 명으로 처단해야 하는 적. 그것 말고 뭐가 있겠습니까.”
“그럼 함부로 죽여선 안 된다는 것도 알겠군.”
“일단은 말이지요.”
“…….”
“또 하고 싶은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레토가 천연덕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
아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답지 않게 말을 망설이는 중이었다.
“없으면 그만 가실까요? 노아에게만 더러운 시체 뒤적이게 하긴 싫거든요.”
먼저 실례하겠다며 레토가 자리를 떴다.
그런 레토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던 아티는 한숨을 짧게 내뱉었다.
저렇게 커다란 등이 나약해 보이다니.
‘뭐가 무서운 거지?’
조금 전 레토는 분명 겁을 먹고 있었다.
***
아티가 밖으로 나가니, 노아와 레토는 시체들의 몸을 뒤적이며 증거를 찾고 있었다.
“신성청 소속 성기사란 것만 나왔습니다.”
노아가 아티에게 말했다.
“그 외 신원을 파악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이름 없는 채로 하늘에 계시는 어머님 곁으로 가게 생겼네.”
아티가 죽은 성기사 중 한 명의 얼굴을 발로 툭툭 건드렸다. 눈 뜬 채로 숨을 거둔 시체는 어떤 말도 없었다.
“…다들 몇 명씩 처리했지?”
아티의 물음에 레토가 답했다.
“제가 아홉, 벨로 대위가 다섯입니다.”
“그럼 내가 치운 셋을 더하면….”
스무 명 중 열일곱을 여기서 죽였다.
“남은 건 셋이군.”
“바깥에 물어보겠습니다.”
노아가 뒤에 넣어 둔 무전기를 켰다. 곧 지지직 소리와 함께 아미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는 예쁜이.]
“치티아 중위는 정말로 구라구라에게 잡혀가겠군.”
레토가 혀를 찼다. 이 상황에서 저런 말을 하는 아미의 정신상태가 내심 존경스러웠다.
“여기는 파스타. 폐광산 밖으로 나온 적이 몇인가?”
[3명. 전원 사살했다.]
무전을 마친 노아가 말했다.
“대장, 스무 명 전원 사살 확인했습니다.”
“그나저나 파스타는 뭐냐?”
“먹고 싶어서.”
“배고파?”
레토가 물었다. 노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라구 파스타 먹고 싶어.”
“집으로 돌아가면 실컷 먹자.”
레토는 노아의 어깨에 몸을 기대며 어리광부리듯 제안했다. 노아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폐광산 밖으로 나오니 밖은 그새 더욱 어두워졌다.
“오늘은 여기서 야영하지.”
이미 어두워졌기 때문에 이동은 어려웠다. 게다가 성기사들이 불태우려고 모아 둔 것들을 살펴야 했다.
우선 밖에서 사살한 3구의 시신을 폐광산 안으로 옮겼다.
그러고는 폐광산 입구 바로 뒤에 오목하게 파인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불은 어떡할 거야?”
지펴?
노아가 기름통을 가리키며 물었다.
“불 지피면 육군에서 감지할 수도 있잖아.”
“지펴도 돼.”
아티가 국경선 너머 쪽을 바라보고 말했다. 이미 성기사단이 한 차례 불을 지폈는데도 육군은 여전히 출동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번에도 오지 않을 거다.
불이 지피기 전, 대원들은 기름통 안을 먼저 살폈다. 재가 전부였지만, 가장 밑바닥에 덜 탄 종이가 발견되었다.
“…육군 제식 훈련 계획서야.”
폐광산에서 나올 수 없는 서류였다. 종이를 꺼낸 레토가 아티에게 건네며 말했다.
“편한 밤은 글렀나 봅니다.”
“당연한 말씀을.”
곧 기름통 안에서 타닥타닥 장작이 타는 소리가 들렸다.
어두워진 밤.
대원들은 불 앞에 옹기종기 모여, 성기사단이 감추려고 했던 증거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사실, 전부 다 문제였다.
육군과 신성청과 관련된 내부 문서가 대부분이었다. 비록 이들이 찾는 증거와는 거리가 조금 멀었지만, 폐광산에 있어선 절대 안 되는 것들이었다.
왜냐하면 이곳은 출입이 통제된 구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간간이 보이는 통신기계 역시 10년 전쯤 출시된 모델들이었다. 이 역시 폐광산에 있어선 안 될 것들이었다.
“이 나라는 정말 괜찮은 걸까?”
아미는 벌써 몇 번째인지도 모를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괜찮으려고 우리가 이렇게 노력하는 거잖아.”
노아가 힘내라고 마음에도 없는 위로를 건넸다.
“네가 제일 얄미워, 알지?”
“고마워.”
“이젠 눈이 다 침침하네….”
눈 사이를 지압하는 아미의 입에서 끙끙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피곤한 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이 어두운 곳에서 모닥불 따위에 의존하며 글을 읽는 게 보통 노동이 아니었다.
“…저기.”
그때.
“이거 아닙니까?”
락소가 무언가를 찾아냈다. 다들 하던 것을 멈추고 락소의 주변에 모였다.
그가 찾은 건 낡은 편지 한 통이었다.
“상자 바닥 틈에 끼어 있더라고. 읽어 보니 의심되는 내용이 적혀 있었어.”
“뭐라고 적혀 있는데?”
레토의 물음에 락소가 편지를 읽어갔다.
“아스포텔, 이제는 신중해야 할 때입니다.”
[늙은 늑대가 죽어 버렸습니다.
경거망동은 삼가야 합니다.
흔적을 지우고, 우리는 다른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다른 때?’
노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스포텔, 그곳은 내가 처리하겠습니다.
지금 당신들 입장이 많이 난처한 것을 압니다.
하루라도 빨리 사라진 신부님을 되찾길 바랍니다.]
“…어머님의 축복을 기원하며. ‘베스페라’가.”
그리고 보낸 사람의 이름 옆에는 시커멓게 그을린 자국이 인장처럼 찍혀 있었다.
“…….”
“…….”
락소가 편지를 전부 다 읽자, 불편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스포텔이 누구지?”
노아가 물었다.
“아티, 넌 알아?”
“확실한 건 아닌데, 아마 내 추측이 맞는다면….”
아티가 대답하기 전에, 누군가가 먼저 끼어들었다.
“성왕입니다.”
살벌한 표정을 지은 채, 아미가 잘게 떨리는 숨을 느리게 내쉬었다.
“아스포텔은 현 성왕이 비밀리에 외부와 접촉할 때 쓰는 가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