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0화 (140/245)

140.

국왕의 전언을 들은 네 사람의 표정이 굳어졌다.

전부 죽인다.

저 명령이 뜻하는 바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불법 사병 집단을 완전히 이 세상에서 없애는 것. 그곳을 절대 세상에 드러내지 않겠다는 국왕의 심중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어느 규모의 전투를 예상하십니까?”

레토가 심각한 목소리로 물었다.

노아는 아티의 대답을 기다리면서 화물칸 내부를 둘러봤다. 수많은 무기, 상자에 가득한 탄창, 그리고 수류탄까지.

단순 무장이나 자기 보호 수단만으로는 볼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규모는 상관없이, 저쪽에서 필사적으로 대응할 가능성은 크겠구나.’

거기다 이 자리에 모인 다섯 명도 범상찮았다.

아드벨로 출신인 테네브레, 피에타 가문의 후계자, 아들라보르의 전쟁 영웅, 특함에서 마력이 가장 월등한 군인, 전직 특수 부대 출신인 정보상.

‘거기다 할머니는 마스와 페미나까지 보냈어.’

노아는 제 허리에 찬 마스를, 그리고 레토의 허리에 있는 페미나를 힐끔거렸다.

이게 무슨 뜻이겠는가.

노아가 떠올린 추측이, 아티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우리가 향하고 있는 그곳에 무장병력이 주둔하고 있을 가능성이 커. 그리고 상당한 실력을 지녔을 테지.”

불법 사병 단체를 조직하고 운영했다고 추측되는 세력은 두 곳이었다. 신성청과 육군.

신성청은 ‘성기사단’이란 무력 부대를 자체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육군은 왕국의 최신식 무기를 정기적으로 보급 받으며, 국외 피니치 구역으로 쉽게 넘어갈 수 있다.

그러니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둬야 했다. 상대를 얕보지 않고, 전부 죽여 후환을 남기지 말아야 했다.

“그래도 유서 쓰란 말 없는 걸 보면….”

아미가 피식거리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우리가 죽을 일은 없단 거잖아요.”

“이건 비밀 작전이라서 유서 쓰면 안 되거든. 현장에서 사망하면 그대로 탈영 처리되고 현상수배 내릴 거야.”

당연히 특별 수당도 없지.

레토의 설명에 아미가 투덜거렸다.

“군인은 인권 없는 노예지….”

“그래도 다행인 줄 알아요.”

락소가 슬피 중얼거렸다.

“난 군인도 아닌데 끌려왔으니.”

저야말로 무상 노동이라며, 여기서 가장 불쌍한 건 바로 자신이라고 락소는 투덜거렸다.

“뭐, 그건 됐고.”

락소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지워 버린 아미가 물었다.

“거기서 저희가 가져와야 하는 증거는 정확히 무엇입니까?”

“대장님께 따로 들은 건 없나?”

레토의 질문에 아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성청을 찢어발길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현재 진행 중인 플랜시 전 소장의 재판과도 관련되었다고.”

“잘 알고 있네.”

신성청에게 크게 한 방 먹일 수 있고, 플랜시 전 소장의 재판을 방해하는 위증을 부서트릴 증거.

앞서 아티가 말한 것과 일맥상통했다.

“그러고 보니 예전부터 신성청을 많이 싫어했던 거 같은데.”

“‘같은데’가 아니라, 그냥 평범하게 증오하고 혐오합니다.”

“어쨌든 잘된 거 아닌가?”

작전 수행을 핑계로 찢어발길 수 있으니까.

그렇지 않으냔 말에 아미는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저기, 벨로 양.”

그 모습을 멀뚱히 보던 락소가 노아 곁으로 다가갔다.

“치티아 양은 왜 저렇게 신성청을 싫어한답니까?”

“저도 잘 모르겠어요.”

아미와 절친한 사이지만, 노아는 단 한 번도 그 이유를 물어보지 않았다.

몇 번 정도는 가볍게 물어보려고 했었다. 그러나 신성청을 증오하는 아미의 모습이 범상치 않아서 항상 그만뒀었다.

아미 본인도 설명할 생각이 없어 보였고.

‘하지만 어쩌면….’

노아는 이번 작전을 통해, 아미가 신성청을 싫어하는 이유를 알지 모른단 막연한 예감이 들었다.

***

자기소개와 작전 설명이 끝난 이후.

다섯 사람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체력 보존을 위해 잠에 들었다.

노아와 레토는 그 틈에 페미나에 오러를 충전하고, 이를 다루는 훈련을 했다.

일어난 뒤엔 자신들에게 필요한 무기들을 챙기며 행낭 속을 점검했다.

그러던 중에 열차가 조금씩 속도를 늦췄다.

아티가 화물칸 문을 살짝 열었다. 조그맣게 열린 문틈 사이로 아침 햇살과 수풀이 우거진 바람 냄새가 비집고 들어왔다.

“간이역에 도착했군.”

“간이역에 얼마나 머무나요?”

아미가 물었다.

“20분. 여기서 기차를 정비할 거거든.”

“그럼 화장실 좀 다녀와도 됩니까?”

아미가 손까지 번쩍 들고 질문했다. 다들 그런 아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시선을 느낀 아미는 아주 당당하게 외쳤다.

“생리현상은 자연스러운 것 아닙니까?”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어쨌건 아미의 의견은 받아들여졌다. 다들 티를 내지 않았을 뿐, 은근히 화장실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럼 여자들 먼저 다녀오도록 할까?”

노아와 아미가 밖으로 나왔다.

간이역은 한적한 시골이었다. 눈에 띄는 건물이라곤 1층짜리 역사가 유일했다. 그 외에는 전부 푸르른 나무와 들꽃이 전부였다.

“아까 봤어?”

사람들 눈을 피해 화장실을 다녀온 아미가 말했다.

“마차랑 달구지 있더라. 요즘도 그런 걸 쓰네.”

“마동력차가 아직 널리 보급되지 못해서 그런 거지.”

“하긴, 나 수도에 도착했을 때 깜짝 놀랐잖아. 남부보다 차가 적어서.”

“그래도 마동력차 보급률은 점점 늘어나는….”

말을 하다 멈춘 노아가 황급히 뒤를 돌아봤다.

“왜 그래?”

덩달아 뒤를 돌아본 아미가 주변을 살폈다.

인기척이라곤 기차를 점검하는 인부들과, 간이역 휴게실에서 차를 마시며 떠드는 사람들의 소음뿐이었다.

“…….”

그러나 노아는 분명 느꼈다.

‘시선이….’

자신들을 향한 시선이 있었다.

노아는 시선이 느껴졌던 열차 꼬리 쪽으로 다시 향했다.

“노아! 그러다 들켜!”

아미가 작은 목소리로 다급히 외쳤다.

살피고 돌아온 노아는 여전히 착잡한 표정이었다.

“수상한 거라도 있었어?”

“흔적은 없었는데….”

“석연찮으면 중장님네한테 말씀드리자.”

그 사람들이 나갔다 돌아오면서 주변을 살피면 되지 않겠느냐고 아미가 제안했다. 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남자 대원들이 나갔다 돌아왔다.

노아의 부탁을 받고 주변을 살핀 세 사람은 딱히 눈에 띄는 흔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곧 열차가 출발했다.

“아직도 수상한 기척이 느껴져?”

옆에 앉은 레토가 물었다. 노아는 고개를 느리게 가로저었다.

“…내 착각이었나 봐.”

저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어떤 기척이나 수상한 낌새를 감지하지 못했다.

노아는 근래 마음에 여유가 없는 탓에 예민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돌아가면 푹 쉬자.”

레토의 말에 노아가 입꼬리를 느슨하게 올렸다.

“그러자.”

노아는 가족들과 함께 보냈던 샤프 영지에서의 나날이 벌써 그리워졌다.

***

열차가 종착역인 아퀼로 역에 도착했다.

“와, 이게 여름 날씨라고?”

아미는 깜짝 놀랐다. 살짝 열린 화물칸 문틈 사이로 들어오는 바깥 공기가 서늘했기 때문이다.

“최북단이니까 남부랑 비교하면 안 되지.”

레토가 검은 후드를 노아에게 건네며 대꾸했다.

밖으로 나가기 전, 대원들은 모두 몸 위에 검은 후드를 걸치고, 아티가 가져온 동전 모양의 굴절마법 마도구를 달았다.

준비를 마친 대원들이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마도구는 정상적으로 작동되는지, 역사를 빠져나와 광장을 지나갈 때까지 누구 한 명 다섯 명을 알아채지 못했다.

“근데 이거 어디서 가져온 거야?”

노아가 소리 죽여 물었다. 마도구가 모습은 감춰 줘도 소리까지 감추지는 못했다.

“당연히 집에서 가져왔지.”

“엄마가 너한테 주던?”

“주진 않고. 그냥 빌려왔어.”

“…….”

“말 안 하고 빌려왔어.”

“돌아버리겠네.”

노아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요컨대 이 마도구는 훔쳐 왔단 뜻이었다.

하지만 노아는 이 사실을 부모님도 아실 거라고 확신했다.

아무리 아티가 날고 기는 놈이어도, 아직 어른들 손바닥 안이었다.

“그나저나 정말 조용한 곳이구나.”

락소가 광장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왕국 최북단 영지인 아퀼라는 전형적인 시골이었다.

마동력차는 크고 오래된 버스 한두 대가 전부였고, 젊은 사람보다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더 많았다.

“그래서, 이젠 어디로 가?”

“바로 저기.”

아티는 바로 코앞에 있는 산 하나를 가리켰다.

다섯 명은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굴절마법 덕에 모습을 감출 수 있었지만, 애초에 버스에 탄 사람도 별로 없었다.

결국 그들은 마지막 승객이 내리는 정류장에서 따라 내려, 목적지인 산 등산로 초입까지 걸어갔다.

그렇게 도착한 산은 말 그대로 거대한 성벽이었다.

남부에선 보기 힘든 거대하고 험준한 산길이 초입에서부터 느껴졌다.

“저게 보레알 산맥의 머리 격인 파스티가투스 산이야.”

“산세랑 어울리는 이름이네.”

노아가 중얼거렸다. ‘파스티가투스’는 뾰족하고 가파르단 뜻이었다.

“…올라가기 쉽지 않겠는데요?”

레토가 갈라진 목소리를 냈다. 꼭대기를 가늠하고자 고개를 한참이나 뒤로 젖힌 탓이었다.

“마치 자연 요새 같군요.”

“자연 요새지.”

아티가 말했다.

“보이는 것 이상으로 산세가 험준하고 위험해. 야생동물도 많아서 1년에 한두 번은 꼭 피해자가 생길 정도고.”

“그럼 우린 이곳을 넘어가야 하는 거군요….”

락소는 생각만으로도 지쳐 버렸다. 그건 아미도 마찬가지였다.

“산을 쉽게 넘어가게 해 주는 마법이나 기술 없어?”

“추적당하지 않게 굴절마법 거는 거면 충분하지 않냐?”

“재수 없는 놈.”

심통이 난 아미는 괜히 퉤퉤, 침 뱉는 흉내를 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고, 백견이 불여일행이지.”

“그게 무슨 말이야?”

“뭐든 직접 해 보는 게 좋다는 뜻이지.”

의뭉스러운 미소를 끝으로, 아티가 먼저 산을 올랐다. 나머지 대원들도 차례차례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다행히 그들의 등산은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굴?”

30분쯤 올랐을까, 가파른 협곡 사이에 조그마한 동굴 하나가 나타났다.

“여기를 넘어 국외로 나갈 거야.”

“이 굴이 산 너머 국외랑 연결되었단 거야?”

노아가 말도 안 된다고 반박하려던 찰나.

“혹시 이거….”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떠올랐다.

보레알 산맥, 국외와 연결되었다는 산속 동굴. 그리고 샤프 영지에서 비밀리에 진행되었던 간첩 체포 작전.

“…작년 가을에 넘어왔다는 간첩들의 동선을, 그대로 이용하는 겁니까?”

락소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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