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
아티는 샤프 영지에서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느긋한 분위기였다.
그나마 다른 점이라면, 아티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시커먼 위장복을 입고 있었다.
그렇게 차려입어도 돈 많은 한량 같은 인상은 변함없었다.
“잘 지냈어?”
아티가 늘어진 눈꼬리를 싱긋거렸다.
“잘 지냈을 거 같냐?”
한숨을 푹 내쉰 노아는 팔짱을 낀 채 아니꼬운 시선으로 오빠를 노려봤다.
할 말은 많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꾹 참고 있단 뜻이었다.
그 모습에 아티가 웃음을 옅게 흘렸다.
“왜? 신혼이면 한창 뜨겁고 잘 지낼 때잖아.”
“넌 여동생한테 그딴 거 물어보고 싶니?”
“오빠가 동생 생각해서 그런 것도 못 물어봐? 참 삭막한 세상이네, 진짜….”
“그리 생각했으면 테네브레가 되지 말았어야지.”
노아의 잔소리를 가볍게 무시한 아티는 레토에게 다가갔다.
“매제, 그간 잘 지내셨나? 안색은 전보다 좀 아닌 거 같군.”
“형님도 잘 지내셨습니까. 제 안색은 어느 때보다 보기 좋습니다.”
“음, 그런가?”
아티는 레토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곤 영문 모를 미소를 싱긋거렸다.
“매제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럼요.”
“그래도 허튼짓은 하지 말라고. 우리 동생이 슬퍼하니까.”
“세상에!”
그때, 아미가 뒤늦게 깜짝 놀랐다.
“진짜 아티 오빠야? 진짜로?”
아미는 반갑단 표정으로 아티에게 다가갔다.
“오빠 오랜만이야! 용케도 살아있었네요? 난 오빠가 아스 언니 손에 기어코 끝장나서 매장당한 줄 알았는데!”
“아미 너도 오랜만이다. 안 본 새 못나지진 않았네?”
“오빠도 그 지랄 같은 입담과 성질머리는 변하지 않았네요.”
“그게 아드벨로 아니겠어?”
“아드벨로 핑계 대지 마요. 그냥 네 인성이 바닥인 거니까.”
아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랜만에 보는 친구 오빠는 여전히 재수가 없었다.
다들 그렇게 아티와 안부를 주고받는 중.
“…….”
딱 한 명.
이 상황을 혼자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다.
“…아드벨로?”
락소는 망연한 눈으로 아티를 바라봤다.
“아드벨로가 테네, 어? 아니 방금 벨로 양이 테네브레에게 오빠, 라고 불렀죠? 그리고 레토 넌 벨로 양과 결혼….”
정보상이란 직업이 무색하게, 머리에 과부하가 걸린 락소는 눈앞에 드러난 사실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저 사람은 누군데?”
아티가 노아에게 물었다.
“남편 친구.”
“국왕이 말했던 정보상인가?”
“그런데 머리에 쥐 났나 봐.”
노아는 락소에게 조금 미안해졌다.
***
북부행 화물열차는 지금부터 쉬지 않고 꼬박 10시간을 달릴 예정이다.
“동틀 무렵에 간이역에 한 번 들를 예정이니….”
아티가 제안 하나를 했다.
“잠깐 자기소개 좀 할까?”
“뜬금없이?”
“우리야 서로 아는 사이지만, 정보상께선 이 상황이 낯설 거 아냐.”
아티가 고갯짓으로 가리킨 곳엔 락소가 있었다.
아까보단 진정한 듯한 락소가 레토를 붙잡고 투덜거리는 중이었다. 진정은 했지만, 놀란 건 여전해 보였다.
“이제부터 등을 맡기고 싸워야 하는데, 조금이라도 놀랄 구석이 없도록 만들어야지.”
비밀 작전을 무사히 수행하기 위해선 서로에 대한 신뢰가 필수였다.
그러니 여기서 더 숨기는 건 없어야 한다는 게 아티의 의견이었다.
“기본적인 건 알아 둬야 할 거 아냐.”
“그걸 아는 놈이 아스한테 그랬어?”
“그것과 이건 다르지.”
슬쩍 웃어넘긴 아스가 노아를 바라봤다.
“그래서, 어쩔래?”
“…….”
찜찜한 구석이 있었지만, 노아는 아티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하필 이럴 때 저런 제안이라니….’
감 하나는 더럽게 좋다니까.
마침 레토가 자신에게 무언가를, 그러니까 디모네 닉스 소장과 관련된 뭔가를 감추고 있단 사실이 신경 쓰이던 찰나였다.
노아는 아티가 그것까지 안다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렇게 딱 맞아떨어지니 괜히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이거 좀 웃기지 않냐?”
아미는 둥글게 모여 앉은 어른 다섯이 조금 어처구니없었다. 위험한 작전을 수행하러 가는 길인데 긴장감이 너무 없었다.
시작은 아티였다.
“아우스테르 아드벨로. 현재는 사정이 있어서 국왕 밑에서 임시로 일하는 중이야.”
“아드벨로가 테네브레로 일해도 되는 겁니까?”
락소가 물었다.
아드벨로와 테네브레의 관계를 생각한다면, 아드벨로 출신이 국왕의 개를 자처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내놓은 자식이죠.”
“자랑이냐, 그게?”
노아는 역시 아티가 마땅찮았다. 이 망할 놈은 신뢰가 필수라면서 정작 테네브레가 된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거에 얽매이는 건 별로잖아.”
아티는 불가항력이었다며 스스로 변호했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고, 집안에서 절대 안 된다고 금지하면 더더욱 반항하고 싶지 않아?”
“오빠는 나이를 먹다가 다시 뱉어냈어요?”
아미도 그런 아티를 한심스럽게 바라봤다.
이어진 순서는 아미였다.
“아미 치티아입니다. 특함 소속 중위고, 남자친구는 아직 없어요. 락소 씨는 여자친구 있어요?”
아미가 슬그머니 락소의 곁으로 몸을 기울이며 물었다.
눈이 마주친 락소가 미안하단 듯이 웃었다.
“죄송합니다만, 아미 씨는 좀….”
“마음에 안 들어요? 저 이래 봬도 한때 성녀 소리 들을 정도로 엄청 청순하고 예뻤는데? 지금도 예쁜데?”
“그게 아니라….”
곤란해하는 락소를 대신해, 레토가 대신 말해 줬다.
“이 녀석, 취향이 좀 그래.”
“범죄 관련된 취향만 아니면 전 괜찮습니다.”
“유부녀랑 이혼녀를 좋아해.”
그 말에 아미가 후다닥 뒤로 물러났다. 조금 전까지 호감으로 가득했던 눈빛이 가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바싹 메말랐다.
“락소 씨….”
마찬가지로 거리를 살짝 벌린 노아도 아미와 별반 다를 게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니, 아니! 오해입니다!”
억울해진 락소가 레토를 노려봤다.
“그딴 식으로 말하면 다 오해하잖아!”
“그게 그거 아냐?”
“난 그저 누군가에게 상처 입고 혼자가 된 사람을 좋아한다고.”
“우리 정보상이 쓰레기였군요.”
아티가 깔끔하게 정리했다.
“그렇다고 불륜을 저질렀다던가, 뭐 그런 나쁜 짓은 한 번도 안 했습니다! 이래 봬도 군인 출신이라고요! 사람에게 상처 주는 짓은 안 합니다.”
“이건 진짜야.”
레토가 락소의 처절한 결백에 동의하며 말했다.
“그래서 아직 연애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했지.”
“…….”
“…….”
그러나 이미 여성분들의 마음을 되돌리기엔 조금 늦은 것 같았다.
이에 락소가 솔직하게 말했다.
“상처 입은 그분을 옆에서 위로해 드리고 치유하고 싶은 그런 마음, 다 있지 않나요?”
“저는 상처 입히고 싶은 쪽이라서 잘 모르겠네요.”
이 와중에 아티가 혼란을 더 끼얹었다.
“저 새끼들부터 죽여야 하는 거 아냐?”
아미가 노아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당장 눈앞에 있는 두 남자가 가장 위험해 보였다.
다음 소개는 노아였다.
“노아 벨로. 특함 소속 대위. 친정은 사실 아드벨로입니다.”
“너 안 죽은 게 용하구나.”
그 짓거리를 했는데도 사지 멀쩡하다니.
락소는 새삼 레토가 살아 있단 사실이 기적처럼 느껴졌다. 7년 전 역공전에서 무사히 돌아왔을 때보다 더.
“우리 매제, 사랑받고 사네.”
아티도 그 점이 꽤 신기한 듯했다.
“한번 족치려고 늘 벼르는 중입니다.”
정작 노아는 기도 안 찬단 듯이 코웃음을 쳤다.
“용서해 줬다기보단, 또 저한테 뭐 숨기고 제멋대로 굴면 사지를 으깨서 어디 못 다니게 할 예정입니다.”
“우리 매제가 사랑받고 사네…….”
아티의 말은 아까와 같았지만, 목소리는 살짝 안쓰러웠다.
“하하, 이거 참 부끄럽습니다.”
뭐 좋은 칭찬 들었다고, 레토는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남자가 셋인데 멀쩡한 놈 하나 없다니….”
두 손에다 얼굴을 파묻은 아미는 서글퍼졌다.
그중 한 명이 자신의 남편인지라, 노아도 덩달아 서글퍼졌다.
***
이어진 자기소개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서로를 신뢰하기 위해 진행한 것이었는데, 어째 그 의도와 다르게 서로를 불신하고 거리를 두게 되어 버린 탓이었다.
“락소 베네딕토, 전직 군인, 친구 잘못 사귀어서 여기 앉았습니다. 아버지가 군종실장님입니다.”
“레토 오케아누스. 특함 소속 중장. 어여쁜 아내와 맹수 같은 처형, 처제와 함께 삽니다.”
“할머니랑 할아버지는?”
노아의 물음에, 레토가 지그시 눈을 감으며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두 분 다 내 마음속에 계시지.”
“그렇게 말하면 돌아가신 것처럼 들리잖아…!”
“내 마음속에 계시니, 영원히 함께….”
“그 와중에 난 없네.”
아티가 킥킥거리더니 손목에 찬 시계를 살폈다.
“그래도 시간은 제법 흘렀군.”
마냥 부질없는 자기소개는 아니었다. 덕분에 2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그럼 작전 계획을 설명하지.”
낡은 화물 상자를 테이블처럼 두고, 아티가 북부 지도를 펼쳤다.
“작전의 시작은 열차가 마지막 종착역에 도착하는 순간부터다. 종착역은 왕국 최북단 아퀼로 영지.”
상자 위에 펼쳐진 북부 지도가 아퀼로 영지 지도였다.
“아퀼로 영지는….”
지도를 본 락소의 표정이 심각하게 일그러졌다.
아퀼로 영지는 아들라보르 최북단에 위치한 요충지로, 피니치 구역 일부가 그곳과 마주했다.
그리고 7년 전에 전소했다는 고아원의 소재지였다.
“도착하면 환한 대낮이니 이동은 보레알 산맥을 통해 움직일 거다.”
“국외로 넘어가는 방법은?”
레토의 물음에 아티가 품에서 금색 동전 모양의 배지 다섯 개를 꺼냈다.
그중 하나를 집어 든 노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굴절마법….”
정답이란 듯이 아티가 눈매를 둥글게 휘었다.
“아드벨로의 역작 중 역작이라면 단연코 굴절마법이지.”
아티가 가져온 건 굴절마법을 응용하여 만든 탐지 불가 도구였다. 아티는 시범 삼아 동그란 배지를 옷에 달았다.
그러자 아티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지켜보고 있던 네 사람 모두 눈을 크게 뜨며 주위를 살폈다.
“대단하지?”
아무도 없는 자리에서 아티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는 감추지 못하지만, 착용자의 모습은 완벽하게 감추지.”
북부에 도착하면 이 배지를 착용한 뒤에 국경선을 넘을 예정이었다.
“그리고 불법 사병 단체의 흔적을 찾는다.”
“흔적을 찾은 뒤엔?”
노아가 물었다.
“증거들을 확보하고….”
말끝을 일부러 흐린 아티는 굳은 표정을 지었다.
“…전부 죽인다.”
생존자를 남겨선 안 된다.
“그게 국왕 전하의 명령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