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7화 (137/245)

137.

마냥 피할 문제가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레토 본인이 잘 알았다.

노아의 친부모님을 죽인 남자가.

제 양어머니에게 상처를 준 사람도.

어린 나와 생모를 학대하고 죽이려 했던 아버지란 작자가.

바로 디모네 닉스 소장이라고, 이제는 정말 말해야 했다.

하지만 레토는 그 잔인한 사실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이쯤 되면 세상이 날 미워하는 걸지도 모르겠네.’

정말로 죽으라고 등을 떠미는 것 같았다. 너 같은 게 마음 편히 호의호식을 누릴 자격이 있느냐고 비웃는 기분도 들었다.

‘하지만 또 죽게 내버려 두지도 않으면서.’

망할 세상. 차라리 죽게 놔두지. 정말로 죽으려고 바다까지 건넜는데, 바라지도 않은 영웅 따위나 되어 버렸다.

레토는 고민했다.

노아에게 영원히 말하지 않는 방법이 없을까?

‘역시 죽이는 수밖에 없어.’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그 자식이 어제 일부러 여기 온 건 다른 게 아니야.’

레토는 국왕이 어제저녁 갑자기 저택에 방문한 이유를 조금 왜곡했다.

“자세한 건 남부에서 온 지원 병력이 오면 전하지.”

“못해도 이틀 뒤에는 출발해야 하네.”

“그때까지 준비해 두도록.”

카일리코 국왕은 서둘러 중요 사항을 전하기 위해 저택에 방문했을 뿐이었다.

도저히 전화나 편지로는 전할 수 없는 중요한 명령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레토에겐 이제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피니치 구역을 지나갈 테니, 그자도 거기에 있을 거야.’

그러니 임무를 무사히 해낸 뒤에 처리하면 되었다.

‘다행이다.’

노아에게 안 들킬 수 있어.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갑자기 가벼워졌다. 이렇게 쉽게 해결할 수 있는데, 왜 그렇게 지레 겁을 먹고 무서워한 걸까.

‘노아는 이 역겨운 사실을 평생 몰라도 되는 거야.’

얼마나 다행인지.

“…….”

레토는 조금 울고 싶어졌다.

“…으응.”

때마침 노아가 눈살을 찌푸리며 움찔거렸다.

찌푸린 실눈이 점점 커지는 것도, 제 앞에서 입을 크게 벌리며 하품하는 것도, 마냥 다 사랑스러운 사람인데.

“일어났어?”

너한테 어떻게 그걸 알려.

‘그럼 난 네 옆에 못 있을 거야.’

복잡한 마음을 숨긴 채, 레토는 노아의 이마에 입을 쪽 맞추며 다정한 아침 인사를 건넸다.

마치 태풍의 눈처럼 고요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

로세카 검사는 전날 약속했던 대로, 아드벨로 저택에 변호인단이 제출한 자료를 보냈다.

그리고 또 다른 것도 선물했는데, 증거 적부심 심사 당시의 대화들이 기록된 심문조서였다.

여기엔 추기경의 증언이 전부 적혀 있었다.

다행히 양은 예상한 것보다 적었기에 읽는 데 큰 문제는 없었다.

그 대신 중간중간 울컥 치미는 화를 가라앉힌다고 시간이 제법 걸렸다.

우선, 프레드 랠리의 정체가 드러났다.

“추기경 증언에 따르면, 프레드 랠리가 플루스 대위의 협박에 못 이겨 마약을 재배했다고 하는데….”

“신성청 측 사람이었나 보군.”

노아가 소리 내 읽은 조서 내용에 레토는 마른 웃음을 비식 내뱉었다.

어쩐지 이상하다 싶었다.

전쟁이 끝나고 성녀가 욕 뱉고 가출한 뒤로, 신성청의 위신은 바닥까지 떨어졌다. 당연히 헌금 액수도 점점 줄어들었을 테고.

“정말 대단한 놈이네.”

노아가 뚱한 표정으로 조서를 노려봤다.

“알고 보니 성기사였던 거 아니야? 왕실 기사단에 선별될 정도라면 어느 정도의 실력은 지녔단 소리잖아.”

“그것도 이제 우리가 알아봐야겠지.”

하지만 레토 역시 노아의 추측에 거의 동의하는 바였다.

신성청이 지레 겁먹고 자신들의 죄를 은연중에 밝히고 있었다. 더 파고들면 여죄가 더 드러날 게 분명했다.

“그나저나 이쯤 되면 프레드 랠리를 보호해야 할 것 같은데…….”

모든 사건에 연루된 이상, 프레드 랠리는 범인 이전에 아주 중요한 증인이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구치소에 있을 그의 목숨이 꽤 위험해 보였다.

짜증은 나나, 그를 지켜야만 신성청을 제대로 조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국왕이랑 아드벨로는 알았던 것 같기도 하고.”

레토가 조서를 넘기며 대답했다.

“그러니까 아직도 살아 있는 거겠지.”

“할머니는 어디까지 아시는 걸까?”

“우리가 앞으로 알게 될 것들을 전부 알고 계시겠지.”

두 사람은 다시 조서에 집중했다.

“그런데 플루스 대위는….”

읽던 중, 노아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무슨 생각일까?”

그 물음에 레토가 고개를 들었다.

집무실 소파에 다리를 편안하게 뻗은 노아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단 표정을 하고 있었다.

“우리야 이미 짐작하고 있잖아.”

이 모든 것이 누구의 소행인지.

노아는 뒷말을 굳이 내뱉지 않았다. 그새 또 손을 움찔거리는 레토를 위한 배려였다.

노아는 못 본 척하며 말을 이어 갔다.

“그런데 그 모든 죄를 왜 자기가 뒤집어쓰려는 걸까?”

아직도 플루스 대위에게선 어떤 반응도 없었다.

추기경은 그가 고해성사하는 것을 직접 들었다고 했으니, 억울한 누명을 쓰는 건 아닐 거다. 분명 어떤 합의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이 인간에 대한 정보를 좀 얻을 수 있으면….”

“…….”

“약점이 잡혔나? 아니면….”

“…충성심 때문일지도.”

레토가 넌지시 의견 하나를 추가했다.

그 말에 노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충성심? 설마 그 닉스 소장한테?”

“노아, 지금 우린 상식이라곤 전혀 통하지 않는 인간들이 저지른 비상식적인 사건들을 다루고 있어.”

상식은 미뤄 두고 생각해야 해.

레토가 조언했다.

“플루스 대위는 닉스 소장의 최측근이라고 하나 봐.”

“정보를 들었어?”

“국왕이 일전에 알려 줬거든.”

“아니, 최측근이고 뭐고! 자칫 자기가 죄 다 뒤집어쓰고 죽게 생겼는데…!”

아니라고 반박하려던 노아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레토 말이 맞았다.

‘이건 상식 밖의 문제야.’

애당초 상식 있는 놈들이었으면 그런 사건들을 일으키지도 않았을 거다.

제정신 아닌 닉스 소장의 최측근이라면, 그 대위란 놈도 어지간히 미친 게 아닐 거다.

“후우….”

노아는 치미는 짜증을 애써 가라앉혔다.

“금방 끝날 거야.”

레토가 넌지시 말했다. 이에 노아가 눈만 힐끔 올렸다.

“그래도 끝이 보이잖아.”

“…….”

“그러니 조금만 참자.”

***

그리고 그날 밤.

아드벨로 저택에 또 손님들이 찾아왔다.

“…거 이상하네요.”

때마침 현관 근처를 지나가던 아스는, 저택에 찾아온 손님들을 보자마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정말 이해가 안 간단 듯이.

“여기 수도 아니었나요?”

그런데 왜 제 눈앞에 익히 낯익은 사람의 얼굴이 보이는 걸까. 그것도 둘이나 말이다.

때마침 손님이 왔단 말에 노아와 레토가 현관으로 나왔다.

그리고 둘은 손님들을 보자마자 그대로 멈칫했다.

“노아!”

손님 중 한 명이 방정맞게 팔을 흔들었다.

“야, 너 겁나 좋은 데서 푹 쉬고 있네?”

“네가 여길 왜…!”

놀란 노아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옆에 있던 레토 역시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갈색 머리에 살짝 탄 피부, 순진무구한 얼굴에 그렇지 못한 성품까지.

틀림없었다. 아미 치티아였다.

“대장님이 지원이라고 날 여기로 보냈지!”

“대장님이 우릴 버리셨구나.”

레토는 조금 암담해지는 동시에 의아스러운 점이 떠올랐다.

“…치티아 중위가 여길 어떻게 온 거지?”

“아, 내가 말 안 했던가?”

노아가 아미를 슬쩍 턱으로 가리켰다.

“쟨 할머니 정체를 알고 있거든.”

“하도 놀랄 일이 많아서, 이젠 그 정도는 놀랍지도 않네.”

레토는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이, 자세를 똑바로 고친 아미가 경례하며 씩씩하게 외쳤다.

“해군 본부 예하 특수 함선 사령부 소속, 아미 치티아 중위! 아드벨로 대장님의 명을 받들어 병력 지원으로 왔습니다!”

그러곤 자신이 가지고 온 짐을 가리켰다.

“대장님이 보내신 무기 두 점, 그리고 사람 하나입니다.”

아미의 등에는 기다랗고 까만 가방 하나가 메여 있었다. 아드벨로 대장이 보낸 무기 두 점이 담긴 가방이었다.

그리고 왼쪽에는 낯익은 남자가 서 있었다.

“이런 식으로 끌려오게 될 줄이야….”

주황색 머리에 푸른 눈동자. 훈훈한 인상의 미남이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살짝 들었다.

“잘 지냈냐? 벨로 양도 잘 지냈어요?”

바로 락소였다.

***

“이야, 아드벨로가 확실히 대단하긴 하구나.”

응접실로 이동한 아미는 저택의 화려함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근데 너 옷이 왜 그래?”

노아가 한쪽 눈을 찡그리며 탐탁지 않은 어조로 물었다.

“왜? 나 뭐 이상해?”

영문 모를 아미는 제 차림새를 슥 바라봤다.

소매가 짧은 하얀색 상의에 기장이 짧은 청바지. 그리고 새빨갛게 칠한 발톱이 드러나는 굽 높은 샌들까지.

꼭 휴양지에 온 차림새였다.

“잘만 어울리는구만. 혹시 질투하냐?”

“출장으로 왔는데 좀 단정하게 입어. 그리고 너 군인이잖아.”

“넌 오랜만에 만난 친구한테 반갑다는 말보다 잔소리부터 해?”

잔소리에 치를 떨던 아미가 슬그머니 옆으로 눈짓했다.

“야.”

아미를 따라 고개를 돌린 노아의 눈에 들어온 건, 레토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인 락소였다.

“저 사람, 중장님 친구 맞지? 네 결혼식 때 들러리 섰던?”

아미가 노아의 귀에만 들리도록 속닥거렸다.

“제법 인물도 좋고, 사람이 친절하더라?”

“뭐, 사람은 좋지.”

“그럼 나 좀 소개시켜 주라, 응?”

“너 진짜 우리 지원해 주려고 온 거 맞냐?”

“나는 너와 중장님을 지원하고! 넌 나의 사랑을 지원하고!”

일석이조 아니겠냐며, 아미가 음흉하게 킥킥 웃었다.

그 사이, 레토는 락소가 가져온 정보들을 빠르게 확인했다.

“이걸 다 준비하고 있었어?”

“카일리코 그 자식이 떠나기 전에 미리 언질했잖아.”

국왕이 안보국 직원으로 위장해 내려왔던 날.

“잘 들어 둬. 나중에 네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르니까.”

안보국의 수상쩍은 행보를 알게 된 뒤, 락소는 카일리코에게 따로 부탁받은 것들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필요한 정보들을 다 모았을 즈음, 국왕에게 일이 끝났음을 알렸다.

“…그랬더니 아드벨로 대장님께 연락이 온 거야. 출장 준비하라고. 그리고 저 군인 아가씨랑 같이 왔지.”

설명을 마친 락소는 지금 자신이 수도에 있단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너무 급작스러운 흐름에 정신이 따라오지 못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조금 허무했다.

“군인 안 하려고 전역했는데, 오히려 군이랑 더욱 가까워지는 기분이라 묘하네.”

“그러게 누가 정보상 하래?”

전부 네 잘못이지.

심드렁히 대꾸하던 레토가 어떤 단어 하나에 멈칫했다.

“…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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