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다음 날.
해군 소장 이적 사건의 판도가 바뀔 증인과 새로운 용의자가 등장했단 사실이 신문에 쫙 퍼졌다.
법원에선 갑자기 등장한 증인의 신빙성에 대한 적부심 심사가 비공개로 진행됐다.
“어떻게 되려나….”
정원 테라스에서 휴식을 취하던 노아가 읽던 책을 툭 덮었다. 마음 편히 쉬려고 해도 그게 잘 안 되었다.
온 신경이 법정에서 진행 중일 심사에 쏠려 있었다.
“마음 편하게 먹어.”
맞은 편에 앉은 레토는 여전히 읽고 있는 책에 시선이 꽂힌 채였다. 그가 읽는 책 제목은 ‘사랑받는 남편 되는 100가지 방법’이었다.
“어차피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어.”
“넌 뭘 믿고 그리 여유롭냐?”
노아는 아니꼬운 시선으로 그의 손에 들린 책을 흘겨봤다.
저딴 게 왜 저택 도서실에 있나 싶었는데, 할아버지랑 아빠를 떠올리니 있을 만도 했다.
“어차피 다 잘 풀릴 거야.”
레토는 이상한 음정을 붙여 가며 흥얼거렸다.
“…….”
노아는 혼자 태평한 레토를 말없이 바라봤다.
“닉스 소장한테 내연녀가 있었대요. 그리고 사생아도.”
“당시 영애셨던 오케아누스 후작님께 아드님이 한 명 있었는데, 열병이 나서 사망했다고 해요.”
괜히 알아봤단 후회뿐이었다.
디모네 닉스 소장이 오케아누스 가문과 연관이 있을 거란 생각은 했다. 하지만 누군가의 상처 되는 과거를 알고 싶진 않았다.
그것도 하필 상냥하고 친절한 사람의 과거라니.
‘그래서 레토가 늘 미안해하는 건가?’
레토는 어릴 적부터 오케아누스 가문에서 지냈으니, 아이트라의 개인적인 사정을 알고 있을지 모른다.
친아들은 죽었는데, 양아들인 자신은 호화롭게 잘산다는 것이 그에겐 마냥 미안하고 조심스러웠을 거다.
“레토.”
노아는 자기도 모르게 레토를 불렀다.
“응?”
책에서 눈을 뗀 레토가 눈을 둥글게 휘었다. 기분 좋은 미소를 띤 그의 모습은 청량한 여름과 잘 어울렸다.
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그의 은발이 나부꼈다.
“바람 부네.”
레토는 시야를 방해하는 자기 앞머리는 내버려 둔 채, 손을 뻗어 노아의 긴 머리를 정리해 줬다.
“늘 생각하지만, 머리칼이 참 곱고 예뻐.”
“너도 예뻐.”
“예쁜 사람끼리 잘 만났다, 그치?”
“하여튼 무슨 말을 못 해.”
능청스러운 레토의 농담에 노아가 피식거렸다.
‘그래, 지금은 할 수 있는 게 없지.’
노아는 일단 마음을 편히 먹기로 했다. 당장 뭘 할 수 있는 게 없는데, 벌써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근데 아까 왜 불렀어?”
“심심해서 불러 봤어.”
“그럼 심심한데 뽀뽀나 한 번 할까?”
“…….”
“음, 책에선 이런 유치한 농담도 잘 통할….”
“읽지 마, 그거.”
책을 빼앗은 노아가 제 등 뒤로 책을 숨겼다. 두 눈 뜨고 당한 레토는 뒤늦게 웃음을 터트렸다.
“언니! 형부!”
새하얀 민소매 원피스를 입은 클라레가 씩씩하게 달려왔다.
“세상에, 내가 뭘 본 거지?”
레토가 감탄했다.
“이렇게 예쁜 아가씨가 여기 있었나?”
“헤헤, 형부 눈이 좀 높은걸?”
클라레가 씩 웃으며 제가 입은 옷을 자랑했다.
“어때? 이쁘지? 샌들도 신었다?”
의자에 앉은 클라레는 제 발에 신었던 하얀 샌들을 벗어 보여 줬다. 노아는 다시 샌들을 신겨 주며 예쁘다고 칭찬해 줬다.
“어휴, 뛰지 마시라니까.”
뒤따라오던 아스가 손수건을 꺼내 클라레의 얼굴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줬다.
“그치만 뛰지 않으면 재미없잖아.”
“뛰면 재밌냐?”
노아가 물었다.
“그럼 안 재밌나? 애들은 뛰는 게 일이라고!”
“좋겠다, 재밌는 게 일이라서….”
“언니 뭐 마셔?”
“차가운 복숭아 차. 마셔 볼래?”
“작은 부군, 이 책 읽어보셨어요? 전에 제가 추천한다고 했던 거예요.”
“아, 추리물이었죠?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수도에 도착한 뒤, 처음으로 벨로 가족들만 모여 단란한 시간을 보냈다.
덕분에 노아와 레토는 잠깐이나마 머리 아픈 재판을 잊을 수 있었다. 제대로 된 여름을 즐기는 기분이었다.
“근데 둘 다 일 안 해도 돼?”
색칠공부 책에다 열심히 색연필을 끼적대던 클라레가 물었다.
“세금 축내면 안 된다아?”
“…….”
“…….”
어디서 또 뭘 배워 왔는지 모르겠으나, 세금을 월급으로 받는 노아와 레토는 괜히 지레 뜨끔거렸다.
“평화로워라.”
차를 홀짝이는 아스는 마냥 즐거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평화로운 순간은 찰나였다.
“아가씨.”
베닝이 다급한 걸음으로 노아를 찾았다.
“로세카 검사라는 분께서 전화하셨습니다.”
“클라레, 언니는 세금 축내지 않기 위해 일하러 갈게.”
“저도 다녀오겠습니다.”
“이잉, 세금 축내도 되는데….”
클라레는 풀이 팍 죽어 버렸다.
슬픈 여동생의 볼에 진하게 뽀뽀해 준 뒤, 두 사람은 응접실로 들어가 전화를 받았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상황이에요.]
전화를 받자마자, 로세카 검사의 지친 목소리가 쏟아졌다.
“어떻게 되었나요?”
노아가 물었다.
[자세한 건 만나서 이야기하죠. 법원 근처 카페에서 만날까요?]
노아와 레토는 차를 몰아 약속 장소로 향했다.
“보아하니 뭐가 안 좋은 것 같지?”
레토가 속도를 올리며 말했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상황이라잖아. 벌써 부정적으로 생각하진 말자.”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는 건, 결국 나쁘다는 뜻이야.”
두 사람은 뒤숭숭한 마음으로 카페에 도착했다.
“여기예요.”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로세카 검사는 구석진 곳에서 아주 달아 보이는 음료를 티스푼으로 괴롭히는 중이었다.
“신이 원망스러워지네요.”
다짜고짜 성호를 그은 로세카 검사가 말했다.
“추기경은 증언뿐이었어요. 구체적인 물증은 없었지만요.”
“그래서 판사가 유예 기간을 준 겁니까?”
레토는 검사의 손에 들린 음료를 바라보며 물었다.
달콤한 커피 음료 같았는데, 위에 잔뜩 뿌려져 있는 생크림이 티스푼에 으깨져 엉망이 되었다.
검사는 그걸 한 모금 벌컥 들이킨 뒤에 말했다.
“…추기경의 증언은 듣기엔 신빙성이 있어요.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들었다면 진짜라고 믿을 정도였어요.”
심지어 아직 세간에 밝혀지지 않은 간첩 사건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명패로 그 추기경 새끼 입을 찍을 뻔했다니까요?”
“검사님은 믿으십니까?”
“중장님, 전 국왕 전하께 언질을 받았습니다.”
이번 사건의 배후에 숨겨진 진짜 ‘흑막’을 알고 있으며, 이 모든 것의 최종 목표 역시 그것의 정체를 밝히고 처벌하는 것.
로세카 검사는 어느 정도 사정을 아는 ‘관계자’였다.
“아까도 말했지만, 구체적인 물증이 없어서 증언만으로 어떻게 할 수 없어요.”
“그래서 판사가 유예 기간을 준 것이군요.”
노아의 말에 로세카 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는 이게 양측에게 준 유예 기간이에요.”
“양측이라면….”
“피고 측도, 우리 검사 측도. 그 증언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 혹은 반박할 수 있는 증거를 찾아오라고요.”
기간은 오늘부터 일주일이었다.
“일주일 뒤에 2차 증거 적부심 심사가 있어요. 그때까지 찾아야 하는데….”
말이 쉽지.
검사의 말에 다들 곤란한 기색을 내보였다.
“우리에게 불리한 일이군요.”
레토가 혀를 짧게 찼다.
피고 측은 이미 작심하고 위증에 들어갔다. 그렇다면 그것과 관련된 증거 역시 현재 위조 중일 게 분명했다.
반면, 검사 측은 상대측의 실체 없는 주장을 반박하는 증거를 제시해야 했다.
노아가 물었다.
“현재 이쪽에서 가진 증거로는 반박이 힘드나요?”
“우리는 플랜시 전 소장과 전 기사들의 부정행위만 증명할 수 있지, 저쪽에서 제시한 ‘흑막’과 관련된 증거물이 없어요.”
“흑막?”
“피고 측이 고해성사한 플루스 대위를 그렇게 표현하더군요.”
“기가 찬다….”
노아는 웃음도 아니 나왔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 하나는 알아냈다.
‘…디모네 닉스 소장.’
육군 고위급 장교 중에 있다던 반역자.
‘이제 확실해졌어.’
그자가 이 모든 사건의 배후에 있는, 진짜 흑막이었다.
“일단 이쪽에서도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할 말을 마친 로세카 검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가 손에 쥔 증거는 적어도 거짓이 아니니까요. 최악의 경우엔 저쪽 측 증거들이 다 거짓이라고 잡아떼야겠지만요.”
“국교를 상대로?”
레토의 물음에 검사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성녀도 가출했는데 국교는 무슨.”
로세카 검사는 자리에 없는 누군가에게 가운뎃손가락을 날리곤 덧붙였다.
“변호인단이 준 자료는 내일까지 보내드릴게요. 아드벨로 저택으로 보내면 되죠?”
로세카 검사는 그렇게 말하며 먼저 자리를 떠났다.
남은 노아와 레토도 저택으로 돌아가기 위해 차에 올랐다.
“…….”
“…….”
안전띠를 매고, 차에 시동을 걸 때까지도. 둘은 어떤 대화도 주고받지 않았다.
노아는 일전에 닉스 소장 이야기를 꺼냈다가 쓰러진 레토가 마음에 걸려서였고, 레토는 코앞까지 나타난 닉스 소장을 향한 살기를 억누르기 바쁜 탓이었다.
“일주일 동안, 뭘 할 수 있을까?”
노아가 슬쩍 물었다.
“글쎄.”
그 말에 정신을 좀 차린 레토가 액셀을 부드럽게 밟았다. 마동력차도 따라 부드럽게 움직였다.
“시킬 게 있다면 연락이 오지 않을까?”
“누구에게?”
“대장님이 지원 병력을 보낸다고 하셨잖아. 신성청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라고.”
“…….”
‘뭔가 알고 있는 거 같은데….’
분명 레토는 뭘 알고 있다.
그런데 노아는 이상하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 달 동안 평화로우면 좋겠다, 그치?”
“그러게….”
“오늘 저녁 식사는 뭐 나올까? 수도는 확실히 육류 쪽 요리가 많이 발달한 거 같더라. 디저트도 너무 달고.”
기분 탓이 아니었다. 레토는 아까부터 재판과 관련된 대화를 은근슬쩍 피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노아는 저걸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레토.”
고민은 빨리 끝났다.
“일단 지원 병력이 오면, 그때 생각하자. 내 생각이지만 국왕이 따로 연락을 줄 거 같아.”
“응.”
대답하는 레토의 목소리엔 아까보다 힘이 가득했다.
‘뭐가 또 무서워서 저리 숨기나….’
노아가 당장 레토에게 닉스 소장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느냐고 묻지 않은 건, 사고라도 날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식은땀을 흘리며 쓰러졌던 때가 마음에 걸렸다.
‘후작님만이 아니라 레토도 개인적으로 관련이 있는 거 같은데….’
그러나 노아는 차마 물어보지 못했다.
닉스 소장과 얽힌 아이트라의 과거가 계속 경고를 보냈다. 어쩌면 레토도 그와 비슷한 괴로움을 겪었을지 모른다고.
노아는 레토가 저를 믿고 먼저 속사정을 털어주기를 바라는 거지, 제 호기심을 해결하려고 그걸 강제로 파헤치긴 싫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아드벨로 저택에 예상치 못한 손님이 찾아왔다.
“…….”
“…….”
노아와 레토는 손님을 바라보기 위해, 고개를 한참 내려야 했다.
“안녕!”
바로 자신들에게 쾌활하게 인사하는, 아들라보르 왕국의 4살배기 왕자 저하 때문이었다.
그리고 왕자의 뒤에는 낯익은 남자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