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4화 (134/245)

134.

과거에 비해 위세가 떨어진다고 한들, 귀족은 여전히 특권 계층이었다.

오히려 마탑 대폭발을 버티고 살아남은 대귀족들의 영향력은 그때와 비교도 안 된다는 말도 있었다.

“당시 가주셨던 오케아누스 장군님이 크게 화를 내셨대요.”

제 소중한 딸에게 상처를 입힌 사위.

심지어 사생아까지 뒀단다.

그것만으로도 지은 죄가 괘씸한데, 어린 손자가 아파 죽어 가는 와중에도 딴 여자와 같이 있었다니.

“그래서 모든 언론에 압력을 가했대요.”

“이혼 소식을 실으라고?”

“아니요.”

아스가 고개를 느리게 가로저었다.

귀족은 가십이 되기 딱 좋은 소재였다. 그러니 이혼 소송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걸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써먹을 순 있었다.

“절대 내 딸의 얼굴은 노출 시키지 말라고요.”

소문을 막지 않는 대신, 오케아누스 장군은 모든 언론사를 공개적으로 압박했다.

만일 이번 소식이 실리는 신문에 제 딸의 사진이 한 장이라도 들어간다면, 가문의 모든 권한을 사용해서 살육으로 보복하겠다고.

“…….”

“안 믿기시죠?”

끄덕끄덕, 노아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아는 슬쩍 뒷목을 만져봤다. 땀이 흥건했다.

조금 전 법정에서 있었던 일 때문인지, 아니면 그냥 더운 탓인지, 지금 막 들은 충격적인 사건의 전말 때문인지.

노아는 이제 뭐가 뭔지 모르게 되었다.

그러나 분명한 건, 이제 듣기 전으로는 돌아가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게, 신문에 났던 내용이야?”

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드벨로에 보관된 신문 기록엔 다행히 아이트라의 사진은 없었다. 백사자의 일살백계가 잘 먹힌 모양이었다.

그 대신에, 닉스 소장의 사진은 아주 큼지막하게 실렸었다.

“이게 당시에 엄청 커다란 이슈였던 모양이에요.”

“그런데 닉스 소장은 안 잘리고 군에 계속 있었나 보네?”

“군 내부 차원에서 징계를 받았던 것 같아요.”

신문 기사에는 군인의 명예를 실추시킨 닉스 대위에게 징계를 내릴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그 뒤엔 어떻게 되었는진 알 방법이 없었다.

“지금은 소장이라면서요.”

“응.”

“전 군대를 잘 모르지만, 대위가 20년 만에 소장이 되는 건 느린….”

“빠른 거야.”

노아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이런 사건이 있었는데도 지금 소장이라는 건, 어지간한 뒷배가 없으면 불가능해. 정말 예외나 다름없다고.”

“작은 주인님이나 작은 부군처럼요?”

“레토는 비교가 불가능한 천재고, 나와는 차원이 다른 특진이지.”

노아도 이례적인 특진이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진급은 아니었다.

하지만 닉스 소장의 경우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오히려 20년 전에 군대를 전역하지 않은 게 더 이상할 지경이었다.

‘뒷배….’

노아는 조금 전 제 입에서 튀어나온 단어 하나를 곱씹었다.

뒷배.

이런 어마어마한 사고를 쳐 놓고도, 군인의 명예를 바닥까지 실추시켰음에도 장성급 장교까지 진급한 이 남자.

‘도대체 뒤에 누가 있는 거지?’

노아는 무언가 얹힌 것처럼 속이 답답해졌다.

***

노아가 욕실에 들어간 사이.

레토는 다시 전화를 들었다. 다이얼을 돌리는 손은 조금 전 해군 본부에 걸 때와는 동작이 달랐다.

곧 통화 연결음이 들리고.

[…신성청이 끼어들었다며?]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카일리코 국왕이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묻는 국왕의 목소리는 평소와 전혀 달랐다. 여유로운 말투 대신 나온 짜증 섞인 목소리가 꼭 욕을 하는 것 같았다.

“알고 있었냐?”

레토의 물음에 국왕이 비웃었다.

[X발, 설마 이딴 식으로 끼어들다니.]

국왕도 신성청의 등장에 당황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 상황을 아예 몰랐던 건 아닌 모양이었다.

“어디까지 아는데?”

[플루스 대위는 닉스 소장이 끼고 다니는 놈이야. 나이는 우리랑 동갑이고.]

“…….”

[신성청이 변호까지 끼어들었다는 건, 그 새끼들도 닉스 소장과 모종의 거래를 했던 모양이야.]

“검사 말로는 바로 어제까지 사법 거래를 논했다는데?”

[그 와중에 우위가 정해졌군.]

수화기 너머로 탁탁, 규칙적인 손가락 소리가 들렸다. 카일리코 국왕이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들기는 소리였다.

[닉스 소장이 신성청의 약점을 쥔 모양이야.]

아마 신성청은 플랜시 전 소장을 변호하면서, 사법 거래를 할 때 신성청 관계자는 언급되지 않도록 손을 쓰려고 했을 거다.

그러면서 닉스 소장을 내치려고 했겠지.

하지만 이 계획을 눈치챈 닉스 소장이 그들과 접촉했을 거고, 그 뒤에 황급히 태도를 바꾼 것이다.

“…….”

레토 역시 국왕의 추리에 동의했다.

다만 한 가지.

“내일 어떡할 거지?”

내일 있을 증거 적부심 심사가 걱정이었다.

“만약 내일 피고 측 증인의 발언이 신빙성이 있다고 판사가 손을 들어 주면….”

험악한 인상으로 중얼거리던 레토가 멈칫했다.

“야.”

순간 그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판사가 피고 측의 증언이 신빙성이 있다고 손을 들어 주면, 우리 쪽에서도 그걸 확인하고 반박할 자료를 찾을 시간을 주지 않냐?”

[…….]

“이거, 마냥 기분 나빠할 일은 아니겠는데?”

[내가 나중에 연락할게.]

국왕이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끊어진 수화기를 바라보는 레토의 서늘한 얼굴 위로 희미한 미소가 그려졌다.

***

그 시각.

수도가 긴박하게 움직이는 동안.

“어휴, 평화롭구만!”

단어 그대로 평화롭고 나긋한 해군 본부는 평소와 변함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아미는 매점에서 사 온 신상 과자를 맛깔나게 먹으며 천하태평을 노래했다.

“만날 엎드려뻗쳐 시키는 얄미운 두 인간 없다고 이렇게 행복할 수 있나? 세상에, 창문 밖에 저거 갈매기? 끼룩끼룩?”

“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거 같은데?”

옆에서 과자를 얻어먹던 셀린이 비아냥거렸다.

울컥한 아미는 무어라고 하려다가, 심호흡을 깊이 한 번 내쉬고는 넓은 아량을 베풀며 과자 봉지를 숨겼다.

“네가 뭐라고 하든 말든, 난 행복하니 됐어.”

“그러면서 과자는 왜 치우냐?”

“미운 아이에겐 과자 하나도 주지 말랬지.”

“속 좁기는….”

“내가 좀 한 몸매 하지. 어때? 이 근육으로 다져진 날렵한 몸매가?”

“말 종아리 보는 거 같다.”

이러하듯, 특함은 여유롭기 짝이 없었다.

더운 여름 날씨와 뜨거운 햇볕 때문에 외부 훈련은 눈에 띄게 줄었고, 사람 속 긁는 중장님과 매사 철두철미한 대위님이 없으니 설렁설렁한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여름 내내 안 왔으면 좋겠다….”

마지막 남은 과자를 삼키던 아미가 진심으로 중얼거렸다.

대원 모두 내심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대놓고 동조하진 않았다. 입방정을 떨 바에야 이 짧은 평화를 즐기고 싶었다.

“너 그러다 통수 제대로 맞는다?”

그래도 친구라고, 셀린은 아미의 입방정을 나름 걱정했다.

“노아가 전에 뭐랬냐. 어느 곳보다 입을 조심해야 하는 곳이 바로 군이라고 했잖아.”

“에베베베베.”

“어휴, 넌 한번 당해 봐야 정신 차릴 거다….”

“이미 많이 당해 봐서 괜찮습니다아.”

무서울 게 없는 아미는 노아의 책상에 엉덩이 걸쳐 앉으며 얄밉게 대답했다.

다 먹은 과자 봉지를 쓰레기통에 넣은 아미가 입 주위와 함상복에 묻은 부스러기를 툭툭 털 때였다.

“치티아 중위.”

사령관실 문이 벌컥 열렸다.

레토를 대신해 사령관 대리를 맡은 아이스 중령이 아미를 호출했다.

“대장님이 부르신다.”

셀린은 꼬시단 표정으로 친구를 바라봤다.

“그러게 입방정을 작작 떨었어야지.”

절망 어린 친구의 표정이 참으로 마음에 들었다.

죽상을 하고 참모총장실에 도착한 아미는 똑똑 문을 두드렸다.

“특함 소속 아미 치티아 중위입니다.”

곧 문이 열렸다.

“어서 오게.”

은색 테두리 동그란 안경을 쓴 비서실장이 환한 미소로 아미를 반겼다. 아미는 비서실장에게 경례했다.

“대장님의 호출을 받고 왔습니다.”

“대장님은 안에 있으니 들어가 보게.”

“혹시 혼나는 겁니까?”

“혼날 짓을 했나?”

“전 항상 반듯하고 부지런합니다.”

“하하하.”

먹히지도 않을 농담에도 비서실장은 즐겁게 반응해 줬다.

안으로 들어가니, 응접용 소파에 앉아 서류 파일들을 뒤적거리던 아드벨로 대장이 맞은편 소파를 손으로 가리켰다.

“앉아.”

아미가 자리에 앉는 동시에, 비서실장이 문을 닫았다. 그는 밖으로 나가지 않고 안에 머물렀다.

“오케아누스 중장이랑 벨로 대위가 출장 가서 어때?”

“특함을 이끄는 두 인재가 자리를 비운 탓에, 남은 대원들이 많이 힘….”

“겉치레 말고 진짜 속마음.”

“아주 좋습니다! 주둥이 지옥 없으니 정신이 편안하고, 정규 방송 없으니까 일 좀 느슨하게 해도 되고!”

아미가 빵긋 웃었다.

“그럼 수도 좀 다녀와라.”

아미가 입꼬리를 축 늘어트렸다.

“어차피 너 지금 개인 함선 훈련도 안 나가잖아.”

“그래도 야간 당직은 꾸준히 합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내가 까라고 하면 까는 거 아니냐?”

그럴 거면 묻지나 말던가.

하고픈 말은 많으나, 아미는 제 분수를 잘 알았기에 침묵을 선택했다. 그건 아주 적절한 선택이었다.

“미리 신성청 족칠 기회를 한 번 주마.”

아미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구미가 당기지?”

아드벨로 대장이 씩 웃었다.

“그걸 지금…!”

말씀이라고 하십니까?

북받치는 기쁨을 가까스로 가라앉히느라, 아미는 들썩이는 몸을 서둘러 소파에 찰싹 붙여 얌전히 앉았다.

그리고 호흡을 가다듬은 뒤.

“…뭘 하면 됩니까?”

차분해진 어조로 내뱉는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무기 두 개와 사람 한 명을 수도로 배달해. 그리고 대기하다가 병력 지원 들어가고.”

“전투가 있는 겁니까?”

“거기선 네 힘을 마음껏 써도 돼.”

“위치는?”

“일단 목적지는 수도지만, 전투는 다른 곳에서 치를 거다.”

전투 예상지는 북쪽 국방 경계선 밖이었다.

“대외적으로는 재판 증언하러 간 두 사람에게 자료를 전달하는 명목이야. 실제로도 지금 수도에서 재판 때문에 일정에 차질이 생겼거든.”

뒤에서 대기 중이던 비서실장이 기차표를 내밀었다.

아드벨로 대장이 명했다.

“준비는 다 마쳤으니, 오늘 퇴근하는 즉시 출발하도록.”

“죽여도 됩니까?”

신성청 관계자를.

아미가 물었다.

“내가 널 그렇게 키웠냐?”

소파에 등을 푹 기댄 아드벨로 대장이 피식거렸다.

“찢어발기고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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