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남자친구가 있다고요?”
어찌나 놀랐는지, 레토는 목젖이 다 보이도록 입을 쩍 벌렸다.
그는 알고 있었느냔 시선으로 노아와 아스를 바라봤다. 그러나 놀라기는 두 언니도 다 마찬가지였다.
“너 남자친구가 있어?”
“세상에, 아가씨 그게 무슨 소리예요!”
특히 아스가 가장 소스라치게 놀랐다.
누구보다 클라레를 가까이서 지켜보고 돌본 만큼, 어린 아가씨의 연애 소식에 거의 거품 물고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제가 누누이 말했잖아요.”
아스는 기어코 클라레의 어깨를 붙잡았다.
“사랑은 전부 착각이에요. 작은 주인님 보세요, 얼굴이랑 몸이랑 재력만 번지르르한 남자한테 푹 빠져서 당한 것도 다 잊은 채 결혼해서 헤벌쭉거리는 거!”
“노아.”
얼굴과 몸, 재력이 번지르르한 남자가 물었다.
“저거 칭찬이야?”
“무조건 칭찬이야.”
그 남자에게 푹 빠져서 당한 거 다 잊고 헤벌쭉거리는 여자가 대답했다.
“그치만 세레니는 달라!”
세레니.
그 이름을 듣자마자, 레토는 남부에서 종종 만났던 밤톨 머리 꼬마를 떠올렸다.
분명 클라레의 비밀 조직 중 한 명이었던 걸로 기억했다.
귀여운 얼굴에 조용한 인상.
항상 클라레 옆에 붙어 있던 남자아이.
“…너 세레니랑 사귀어?”
노아가 믿기지 않는단 듯이 물었다.
“아니, 가장 친한 친구라며?”
“배우자란 내 인생에서 가장 친한 친구인 법이지.”
클라레는 인생 다 산 어르신처럼 대답했다.
“세레니는 어떤 애들보다 장래가 보장되어 있어.”
그러곤 남자친구 자랑을 시작했다.
“조용하지만 내 말을 잘 들어줘. 뭐든 열심히 하고, 내 농담에 항상 웃어 주고, 공부도 열심히 하는걸?”
거기다 놀다가 목이 마르면 항상 마실 물을 건네주고, 물이 없으면 손수건으로 땀을 톡톡 닦아 줬다.
“그리고 만날 나보고 예쁘다고 해 준다?”
“…….”
잠자코 듣던 노아가 중얼거렸다.
“내 남편보다 나은데?”
“뭐, 세레니라면….”
아스 역시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
레토 혼자만 슬퍼졌다.
어쨌거나 클라레의 느닷없는 연애 고백은 어른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심지어 상대가 얌전한 세레니였다니.
어쨌건 둘이 나란히 선 모습을 상상하면 나름 잘 어울렸다.
“둘이 언제부터 사귀었어?”
저녁 식사를 마친 뒤, 노아가 슬쩍 다가가 물었다.
이 쪼그만 것들이 연애 놀음 같은 것을 한다고 하니까 궁금해졌다.
“좀 됐어.”
클라레는 친구들에게 보낼 엽서를 적으며 대답했다. 어제 군사 박물관에서 산 기념엽서였다.
“한 2년 됐나?”
“세상에….”
아스는 헛숨을 들이켰다.
별일 아니란 듯이 말하는 대답도 기가 찼지만, 어린 아가씨가 인생의 3분의 1이나 되는 시간 동안 저 몰래 연애했단 사실이 큰 충격이었다.
“고백은 누가 했는데?”
“내가. 한눈에 알아봤지. 저것은 내 남자구나, 하고.”
아이고.
레토가 앓는 소리와 함께 소파에 드러누웠다.
“뽀뽀는 했어?”
“우린 신중하게 사귀는 중이야.”
슬슬 대답하기 귀찮아진 클라레가 엽서 쓰는 걸 멈췄다.
그리고 조금 삐친 표정으로 야무지게 자신의 연애를 설명했다. 그냥 어른들이 궁금해할 것을 다 말하기로 했다.
“어른들 눈에는 우리가 장난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나랑 세레니는 진지해.”
“어? 아, 어….”
당황한 노아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어른이 되면, 적당히 대출 끼고 마당 있는 2층짜리 집 하나 사서 자식 둘 낳고 오순도순 살 거야.”
“거기까지 계획했어?”
“진지하게 사귄다고 했잖아.”
“…….”
“그리고 우린 손만 잡고 볼뽀뽀만 했어.”
클라레가 말했다.
“나중에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무책임하게 행동하지 않기로 했거든. 세레니도 동의했고.”
“그, 그랬구나….”
노아는 제 예상보다 훨씬 진지한 여동생의 연애에 할 말을 잃었다.
“언니들이랑 형부 보고, 저렇게 하면 안 된다는 걸 확실하게 배웠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러니 이제 말 시키지 마.
클라레는 다시 엽서 쓰는 것에 집중했다.
남겨진 어른들에겐 상처만 남은 발표였다.
***
“쟨 누굴 닮아서 저러는 거지?”
그날 밤.
침대에 누운 노아는 아직도 클라레의 연애 사실에 큰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그건 레토 역시 마찬가지였다.
“너도 저랬어?”
레토가 슬금슬금 노아의 허리에 팔을 두르며 물었다.
“난 안 저랬어.”
한때 귀족 아가씨로 자란 노아는 자신이 얼마나 보수적이고 얌전했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시스토 제국에선 나름 말괄량이 아가씨였지만, 왕국으로 도망친 이후엔 자신이 얼마나 정숙했는지 깨달았다.
“그치만 그때도 예뻤을 거 아니야.”
레토는 입술을 살짝 내밀며 웅얼거렸다. 귀 가까이서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간지러워 노아가 피식거렸다.
“귀족은 어린 나이에도 약혼하고 그러잖아.”
“혼담이 없었던 건 아닌데….”
노아의 말에 레토는 저도 모르게 팔에 힘을 더욱 실었다.
“하지만 결국 다 거절했어.”
피에타 백작 부부는 노아가 어렸을 적부터 아들라보르 왕국으로 망명할 준비를 조금씩 하고 있었다. 그러니 들어오는 혼담도 전부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나중엔 너랑 만나서 결혼하지 않았을까?”
노아의 말에 레토가 말없이 웃었다.
“…….”
그 모습에서 노아는 묘한 것을 느꼈다.
‘오랜만에 보네.’
저 못된 버릇.
레토는 무언가를 숨기는 상황에선 항상 저렇게 말없이 웃었다.
저 표정 때문에 자신이 올봄에 얼마나 속을 태웠던가.
“레토.”
하지만 노아는 또 무얼 감추고 있느냐고 묻지 않았다.
대신, 레토의 뺨을 살살 어루만지며 나긋한 목소리로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이제 노아는 그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몸은 어때? 정말 괜찮은 거 맞아?”
“괜찮다고 했잖아. 어, 설마 이거 유혹….”
“기어오르진 마라.”
노아는 어림도 없단 듯이 옷 속으로 기어들어 오려는 커다란 손을 막아냈다.
서운해진 레토가 입술을 삐죽였다. 하지만 그 이상 집적거리진 않았다.
“레토.”
노아가 말했다.
“내가 너 사랑하는 거 알지?”
갑작스러운 사랑 고백이었지만, 레토는 그새 또 기분이 좋아져 입꼬리를 한껏 올렸다.
“알아. 그래서 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지.”
“그럼 나를 사랑해?”
그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서, 레토는 두 팔로 상체를 지탱하듯 일으켰다.
제 몸 아래에 가둬지듯 누운 노아의 푸른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고 반짝였다.
“사랑해.”
무거운 진심이 담긴 고백이었다. 그런데도 노아는 마냥 기꺼워 행복하게 웃었다.
“그러면 절대 잊지 마.”
노아는 팔을 뻗어 제 가슴에 얼굴을 파묻는 겁쟁이를 안고 몇 번이고 속삭였다.
“난 너를 사랑하고, 너도 나를 사랑해.”
이 사실을 어떤 상황에서도 잊지 마.
노아는 제 품에 안긴 레토가 잠들 때까지 나긋한 목소리로 몇 번이나 속삭였다.
사랑스러운 겁쟁이가 또 지레 겁을 먹고 이상한 짓을 하지 못하도록.
어째선지 불안한 제 마음을 다독이기 위해서.
***
아침 일찍 눈을 뜬 노아는 제 옆에서 잠든 레토를 잠시 바라보다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잘 때만큼은 순둥이처럼 얌전한 남편의 이불을 고쳐 준 뒤, 방을 나가 지하에 있는 수영장으로 향했다.
‘말로는 들어봤지만….’
정말 엄청나네.
탈의실에서 수영복으로 갈아입은 노아가 샤워가운을 두른 채로 수영장에 들어섰다.
지하에 설치된 수영장은 어지간한 호텔도 명함을 못 내밀 정도로 크고 화려했다.
은은한 조명 아래로 벽면에 설치된 나무빛깔의 커다란 타일 덕에 마치 이국에 온 것 같은 착각까지 들었다.
그리고 그 넓고 깊은 수영장엔 이미 먼저 온 사람이 있었다.
“아스.”
때마침 물 밖으로 나오던 아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작은 주인님도 수영하시게요?”
“그러려고. 요 며칠 제대로 운동을 못 했더니 몸이 답답해서.”
“이젠 정말 천상 군인이시네요.”
“원래도 타고난 팔자가 무인이라서.”
근처에 있던 선베드에 샤워가운을 벗어 던진 노아는 가볍게 몸을 푼 뒤에 물 안으로 들어갔다.
“아스.”
물에 젖은 앞머리를 뒤로 넘기며, 노아가 말했다.
“뭐 좀 부탁해도 될까?”
“무엇을요?”
“사람 좀 한 명 알아봐 줘.”
아무도 모르게, 오직 너 혼자서만.
생각지 못한 노아의 부탁에 아스가 동그래진 눈을 느리게 끔뻑거렸다.
조금 당혹스러웠다. 노아가 저에게 이런 걸 부탁하는 게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작은 주인님도 아시겠지만….”
일단, 아스가 말했다.
“전 이제 일반인이에요. 뭘 조사한다고 해도 일반인 수준에서밖에 조사할 수 없어요.”
“누구 뒤를 캐라고 하는 게 아니야. 그냥 네 선에서 알아낼 수 있는 것까지만 알아내면 돼.”
노아가 필요한 건 조금 전 아스가 말한 ‘일반인 수준’의 정보였다.
“그렇다면야….”
고개를 끄덕인 아스가 물었다.
“그래서, 누굴 알아봐 달라는 건가요?”
“디모네 닉스 육군 소장.”
“육군 소장? 군인인가요?”
“응.”
그걸 내가 조사해도 되는 건가?
군인과 관련된 정보라면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을 통해 조사하는 게 더 효율적일 텐데.
“언제까지 조사하면 되나요?”
하지만 노아도 크게 뭘 바라고 조사하라고 하는 것 같진 않으니, 아스는 크게 부담가지지 않기로 했다.
“나 이틀 뒤면 증언하러 재판장에 가거든? 그때까지 조사해 줘.”
“알겠어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한테는 비밀로 해 주고.”
“그 정도면 작은 주인님이 조사하셔도 되는 거 아닌가요?”
“난 안 돼.”
그 말을 끝으로 노아는 물속으로 머리까지 담그며 잠수했다.
‘나는 아직 그자를 몰라야 해.’
디모네 닉스 소장은 여러 사건과 얽혀 있는 잠정적 용의자이며, 피에타 가문의 멸문과도 관련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남자다.
노아가 직접 조사한다면 열 일 다 제쳐 두고 파고들 게 뻔했다. 그 남자와는 아직 거리를 둬야 했다.
‘하지만 조금은 알아야 할 것 같아.’
레토가 그 이름에 분명 반응했다.
그걸 의아하게 여기던 노아는 문득, 어쩌면 닉스 소장이 오케아누스 가문과도 관련되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간첩을 잡기 위해 샤프 영지로 내려왔던 오케아누스.
안보국 직원으로 위장했던 국왕이 상담 중에 제게 했던 말.
“디모네 닉스 소장의 체포 말이야.”
“그대들이 체포했던 간첩들을 왕국으로 들여보낸 게, 바로 그였거든.”
자칫 관련 없어 보이는 일련의 사건들이, 노아는 이젠 단순한 우연처럼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