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처음에는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놀란 거라고 여겼지.’
하지만 분명 자신이 닉스 소장을 언급한 뒤부터, 레토의 말수가 줄어들면서 안색이 창백해지기 시작했었다.
“…….”
노아는 제 손을 붙잡던 레토의 모습이 계속 잔상처럼 아른거렸다.
당장 울 것처럼 촉촉이 젖은 시선으로 절 바라보던 그 시선이, 마치 그가 얘기해 줬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생모가 죽고 고아가 되었던.
먹을 게 없어서 흙을 퍼먹으려고 했던.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 시절의 레토를 떠올리게 하는 얼굴이었다.
“…느리야.”
“…….”
“손주며느리야.”
부르는 소리에 노아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넌 괜찮은 것이냐?”
“아, 죄송합니다. 레토가 좀 걱정되어서….”
“네가 고생이 많구나.”
알버스가 노아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그 녀석, 덩치는 그렇게 커도 속은 허약하거든.”
“피로가 쌓인 걸까요?”
“아니라곤 못 하겠구나.”
노아의 능청스러운 둘러댐에 알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도 올해 해군에선 사건이 많았었고, 그 일들을 해결한다고 레토가 바빴던 것 역시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장군님.”
노아가 물었다.
“국왕 전하는 어디 계시나요?”
***
아르카는, 아니, 카일리코 국왕은 얌전히 집무실로 돌아가 미뤄 뒀던 업무를 빠르게 해치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책상 아래 감춰진 다소곳한 그의 두 다리는, 조금 전 공개적으로 된통 혼났던 그 순간을 잊지 못하는 중이었다.
“어쩐지 보통내기가 아닌 것 같더라니….”
카일리코 국왕이 헛웃음을 비식 흘렸다.
“…네 녀석 동생이었냐.”
그는 조금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눈앞에 있는 남자를 응시했다.
바로 아티였다.
덥수룩한 갈색 머리를 웬일로 멀끔하게 정리해 묶은 그는 막냇동생의 활약을 진심으로 대견해하는 중이었다.
늘 심드렁한 표정만 짓던 얼굴 위로 희미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세상에, 그럼 난 여태 아드벨로한테 시비를 걸었단 건가….”
“살아 계시는 게 용하지 않으십니까?”
아티의 빈정거림에 국왕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안타깝게도 저 말이 맞았다.
“나도 명줄 하난 정말 질기군.”
어쩐지 보통내기가 아닌 것 같더라니.
그는 해군 본부에서 마주쳤던 노아를 떠올렸다.
실력 뛰어난 군인인 거야 알고 있었지만, 시선 하나만으로 저를 옥죄던 그 살기와 위압감은 다시 생각해도 아찔했다.
‘그래, 아드벨로 대장의 손녀였단 말이지?’
카일리코 국왕은 다신 까불지 말자고 다짐했다.
“레토 녀석, 엄청난 곳에 장가를 갔네….”
“본인은 몰랐던 모양입니다만.”
“알았으면….”
말을 하다 멈춘 국왕이 씁쓸하게 웃었다.
‘알았으면 절대 결혼 안 했지.’
그는 레토의 비밀을 아는 몇 안 되는 친구였다. 그리고 레토가 얼마나 겁이 많은 놈인지도 잘 알고 있다.
조심스럽고 겁이 많은 제 친구.
남들은 괜찮다고 해도 절대 그 말을 믿지 않고, 항상 자신이 욕먹고 힘들어지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어리석은 멍청이.
‘그래도 결혼한 뒤로 얼굴이 좀 편 것 같은데.’
아무래도 아드벨로 가풍이 레토에게 상당한 자신감을 심어 준 것 같았다.
“…일단 됐어.”
카일리코 국왕이 다시 본론으로 넘어갔다.
“어쨌거나 내가 궁금한 건, 그대가 나에게 가족에 대한 걸 밝히기로 한 이유란 말이지.”
“일부러 숨겼던 건 아닙니다.”
아티가 말했다. 감히 한 나라의 왕에게 말하는 것치고는 무례하고 뻔뻔스러운 태도였다. 물론 두 사람은 크게 상관치 않았다.
“다만, 이젠 말해야 할 필요를 느꼈을 뿐입니다.”
“필요….”
그래, 필요.
의자에 앉은 채 몸을 살짝 옆으로 돌린 국왕이 손가락으로 책상을 툭툭 쳤다.
시계 초바늘에 맞춰 움직이는 규칙적인 동작엔 많은 고민과 계책들이 숨어 있었다.
국왕은 하염없이 생각했다.
‘나한테 보호를 요청하는 건 아닐 테고.’
서글프게도, 아직은 아드벨로의 보호 제도가 왕국의 것보다 훨씬 우수하고 뛰어났다.
그러니 오히려 국왕이 아드벨로에게 제 여동생을 보호해 달라고 부탁까지 했을 정도다.
“…뭐가 필요한데?”
짐작이 되지 않던 국왕이 솔직하게 물었다.
아티가 대답했다.
“아드벨로의 지원입니다.”
“벨로 대위를 통해 요청해 달라는 건가?”
“아마 들어줄 겁니다.”
아티는 무력을 요청했다.
“불법 사병 집단이 숨은 근거지를 찾았습니다. 최대한 빨리 진압하고 증거를 찾아와야 한다는 것이 저의 판단입니다.”
“위치는? 혼자나 다른 테네브레의….”
“이제 테네브레는 안 됩니다.”
아티가 단호히 말했다.
테네브레는 이제 해체되어 안보국으로 편입되었다. 그들은 와해 직전까지 갔던 안보국을 정상화시키려고 고군분투 중이었다. 인력을 빼내는 건 무리였다.
거기다 아티는 이 사건에 왕실이 지나치게 간섭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조용히 처리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국왕은 골치 아픈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빌어먹을, 망할 욕지거리가 목구멍까지 차올라 숨 쉬는 것도 벅차고 짜증 날 지경이었다.
“아니, 그래서 결국 위치는 어디라고?”
“대충 짐작하셨을 그곳일 겁니다.”
“…피니치?”
아티가 고개를 끄덕였다.
7년 전에 사라진 불법 사병 집단의 근거지로 파악된 곳은 북부 피니치 국경선 너머.
국외였다.
***
열기구 체험은 아이들에게 근사한 추억을 선물했다.
“재밌었느냐?”
돌아가는 차 안, 알버스가 뒷좌석에 앉은 아이들에게 물었다.
“땅에 있는 게 전부 다 보였어요! 산도 보이고, 강도 보였어!”
“모든 게 개미처럼 요만큼 작았어요.”
“구름을 못 잡은 건 조금 아쉬웠어….”
“응, 먹으면 정말로 솜사탕 맛이 났을까?”
아이들의 대답에 알버스는 마냥 기분이 좋았다.
약간의 사고가 있긴 했지만, 그래도 역시 데려가기를 잘한 것 같았다.
‘국왕이 제법 괜찮은 선택을 했군.’
알버스는 피식거렸다. 다시금 떠오르는 국왕의 영 좋지 않은 사고의 순간 덕분에 한동안 웃음이 부족하진 않을 것 같았다.
“할아버지.”
그때, 카리나가 말했다.
“집에 가기 전에요….”
카리나가 한결 기운 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형님을 뵙고 가면 안 될까요?”
“그리 걱정되냐?”
“가기 전에 인사는 드리고 가야 하고, 또 피곤하시다고 하니까….”
“인사하지 않고 가면 레토가 무척 서운해할 거예요.”
조수석에 앉아 있던 노아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니면 오늘 하룻밤 더 같이 자고 가요.”
“그,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미 폐를 끼쳤는걸요.”
카리나는 사돈끼리 예의를 지켜야 한다며 야무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노아는 어린아이가 너무 야무진 것도 조금 서운하단 생각이 들었다.
아드벨로 저택에 도착하기 무섭게, 카리나는 레토부터 찾았다.
“형님! 형님!”
“야, 손부터 씻어!”
다른 의미로 야무진 클라레가 제동을 걸었다.
비누로 꼼꼼히 손을 씻고, 깨끗한 물로 입 안까지 헹군 카리나는 다시 레토를 찾았다.
“재밌게 놀다 왔어?”
다행히 레토는 아이들이 아침에 떠났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상태였다.
노아는 내심 가슴을 쓸었다.
“형님, 괜찮으세요?”
카리나가 레토의 손가락을 조심히 쥐며 말했다.
“피곤하셔서 오지 못했다고 들었어요.”
“형부는 은근히 약골이네. 만날 피곤해서 쓰러지고.”
“아, 아니야! 형님은 약골 아니야!”
“그럼, 약골이 아니지.”
이거 보라며 레토가 카리나를 한 팔로 번쩍 들었다. 깜짝 놀란 카리나는 덥썩 레토의 목에 팔을 둘렀다.
“어, 나도! 나도오!”
자기도 안아 달라며 클라레가 발을 동동 굴렀다.
“이상하네, 아까 나보고 약골이라고 놀린 건 누구였지?”
“요 주둥이가 잘못했습니다!”
클라레는 냉큼 자기 입술을 찰싹찰싹 때렸다.
때리는 소리가 어찌나 야무진지, 웃음이 터져 버린 레토는 나머지 팔로 클라레를 들어 올렸다.
“좀 쉬엄쉬엄 일해라.”
알버스가 눈살을 찌푸리며 잔소리했다.
“군인이면 자기 몸도 챙길 줄 알아야지.”
“앞으로 신경 쓰겠습니다.”
아이들을 도로 내려놓은 레토가 순순히 대답했다.
“형님, 이거 기념품이에요.”
카리나는 왕궁에서 받아온 선물들을 레토에게 전부 줬다.
“왕후 전하께서 주셨어요. 왕실에서만 마시는 찻잎이랑 쿠키, 찻잔들이래요.”
“근사한 걸 주셨구나.”
“전부 형님 주려고 가져왔어요.”
카리나가 선물 중 하나인 쿠키 봉투를 레토의 손에 꼭 쥐여 주며 말했다.
휘둥그레진 레토의 눈에 카리나의 얼굴이 들어왔다. 아이는 아주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먹고, 기운 내세요. 일 힘내시고요.”
“나 이런 거에 약한데….”
뒤에서 지켜보던 아스가 감동에 젖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넌 뭐 없냐?”
마찬가지로 감동했던 노아가 슬쩍 클라레에게 물었다.
“…이 분위기는 뭘까나?”
클라레가 슬그머니 뒷걸음질 쳤다.
“나도 언니를 사랑하지만, 이건 너무 맛있어서, 나 혼자 다 먹고 싶은데….”
“솔직한 욕심쟁이 같으니.”
너 다 먹어.
노아는 클라레를 꼭 안아 줬다.
선물을 준 뒤, 카리나는 알버스와 함께 오케아누스 저택으로 돌아갔다.
“내일 또 놀러 와.”
레토가 배웅하면서 말했다.
“네가 선물해 준 쿠키랑 차, 같이 먹자.”
“또 와도 돼요?”
“당연하지. 안 오면 내가 서운한데?”
“카리나 네가 와야지, 저 녀석도 쉴 수 있을 거다.”
알버스의 말에 카리나가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형님이 피곤하지 않게 자신이 쉬도록 도와주겠다고 다짐했다.
“이제 혼자 남아서 심심하겠네?”
노아가 클라레에게 물었다. 클라레는 카리나가 탄 차가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뭐, 쪼금 그러하네.”
새초롬한 대답엔 섭섭함이 묻어 있었다.
“그래도 내일 또 볼 거니까 별로 심심하진 않아. 나도 이젠 좀 쉬어야지.”
어른인 척하는 말투에 어른들이 입꼬리를 느슨하게 올렸다.
“이러다 겹사돈 되는 거 아니에요?”
그러면 너무 재밌겠다며 아스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겹사돈이 뭐야?”
“작은 주인님이랑 작은 부군이 결혼해서 양쪽 가족이 사돈 관계가 되었잖아요? 여기서 아가씨랑 카리나 도련님이 결혼하면 또 사돈을 맺게 되니까, 겹사돈이에요.”
“사돈을 두 번 한다는 의미야.”
“그렇구나.”
새로운 단어를 배운 클라레는 빠르게 머릿속에 단어를 저장해 뒀다.
“근데 나 카리나랑 결혼 안 할 건데?”
나 결혼할 상대 있어.
클라레는 남부에 두고 온 자신의 남자친구를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