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노아의 간절함을 전혀 모르고 있는 알버스는 직접 차를 운전했다.
“두 분 다 기대되죠? 국왕 전하가 사는 궁전이래요.”
조수석에 앉은 아스는 뒷좌석에 앉은 클라레와 카리나를 살폈다.
“전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어서, 엄청 궁금해요.”
카리나가 들뜬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스의 얼굴에 절로 포근한 미소가 그려졌다. 룸미러에 비친 알버스 역시 뿌듯한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나도 가 본 적 없어!”
클라레도 처음 가 보는 왕궁이 궁금하긴 마찬가지였다.
“거기선 뭘 할 수 있어? 재밌는 놀이기구 있어?”
“클라레, 왕궁은 노는 곳이 아니야.”
카리나가 자신이 아는 것을 설명해 줬다.
“왕궁은 국왕 전하랑 왕후 전하랑 왕자 저하가 사는 곳이야.”
“그 정도는 나도 알거든? 그치만 엄청 큰 곳이니까, 뭔가 재미있는 게 있을지도 모르잖아.”
“왕궁에서는 함부로 뛰거나 놀면 안 돼. 거기엔 국왕을 지키는 기사들이 있어서, 사고 치는 아이들을 잡아간대.”
“피이, 그게 뭐람.”
클라레가 입술을 삐죽이며 흥미를 잃은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왕궁은 자신이 상상한 것과 완전히 다른 곳인 모양이었다.
“왕궁에도 나름 재미난 것이 있단다.”
알버스의 목소리에 아이들이 귀를 쫑긋했다. 속도를 낮춰 좌회전하는 파란 마동력차는 흔들림 없이 부드러웠다.
“요즘은 방문하는 어린이들을 위해 보물찾기도 한다더구나.”
“어머, 보물이요?”
깜짝 놀란 아스가 일부러 과장된 목소리로 물었다.
“너무 재미있겠네요. 그쵸, 아가씨?”
“그래봐야 공책이나 연필 주겠지, 뭐.”
나는 다 알아!
클라레는 괜한 허세를 부리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학교 안 다니는 아기들은 멋모르고 열심히 하겠지만, 난 학교 다니는 언니라서 그런 거에 현혹되지 않아. 날 꼬시려면 식칼토끼 한정판 스티커 책 정도는 되어야지!”
떠들썩한 대화를 나누는 사이, 알버스의 파란 마동력차는 어느새 왕궁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클라레는 주변을 둘러봤다.
“…설마 이거 다 국왕 거예요?”
“여긴 아직 주차장이에요.”
아스가 클라레의 머리에 밀짚모자를 씌우며 말했다. 그리고 카리나에게도 따로 챙겨 온 모자를 씌웠다.
남부만큼은 아니지만, 수도의 여름날도 햇볕이 꽤 따가웠다.
“마침 오는군.”
알버스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새하얀 마동력차를 가리켰다. 차에는 왕실을 상징하는 늑대 문장이 그려져 있었다.
“왕궁에 들어가려면 여기에 차를 두고, 저렇게 따로 차를 타고 들어가야 한단다.”
“왜요?”
“안전을 위해서지.”
“안전?”
“혹여 나쁜 사람들이 왕궁에서 사고를 치지 않도록.”
“왜 사고를 치는 거지?”
클라레는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냐하면 국왕 전하는 이 나라의 상징이거든. 그분이 위험하면, 이 나라도 위험해지지. 그래서 지켜야 하는 거다.”
“한 사람 때문에 나라가 위험해지는 건 좀 이상한디?”
허를 찌르는 클라레의 질문에 알버스는 맥 빠진 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이내 곧 심각한 표정으로 ‘확실히, 대비는 해 둬야지.’라며 중얼거렸다.
차를 옮겨 탄 네 사람은 어느 커다란 건물 앞에 도착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차에서 내리니, 이번에는 또 다른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자신을 국왕 폐하의 비서관이라고 소개했다.
“와아…!”
화려한 본궁을 드디어 두 눈으로 직접 본 클라레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내 평생에 이렇게 큰 집은 처음이야!”
클라레의 짧고 굵은 6살 인생에서 이토록 아름답고 웅장한 건물은 처음이었다.
너무 놀란 아이는 기어코 딸꾹질까지 터져 버렸다.
“할아버지, 여기가 정말 궁이에요?”
카리나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다만 클라레와 놀라는 방식이 조금 달라서, 아이는 놀란 눈을 끔뻑거리며 알버스의 손을 꼭 쥘 뿐이었다.
“그럼요, 아주 대단한 궁전이지요.”
아이들의 순수한 반응이 만족스러웠던 비서관이 설명해 줬다.
“아들라보르 왕궁 건물 중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궁전입니다. 이곳에서 국왕 전하께서 집무를 보시고, 국가 행사가 열리지요.”
궁에 들어선 클라레와 카리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왕궁에 일반인이 방문하는 게 마냥 없는 일은 아니었다. 예약을 하면 소수를 추첨해 방문 허가를 내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궁은 국왕의 안전을 이유로 출입이 금지되었다.
때문에 누가 봐도 관광객 차림인, 심지어 어린아이인 클라레와 카리나는 시선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이곳에서 기다리시면 됩니다.”
비서관이 안내한 곳은 넓고 화려한 응접실이었다. 손님들이 온 것을 알았는지, 달콤한 과자와 따뜻한 차가 미리 준비되어 있었다.
“아가씨, 아무거나 함부로 만지시면 안 돼요.”
소파 옆 길쭉한 테이블에 놓인 화분에 손가락을 가져대려던 클라레가 지레 뜨끔하고는 황급히 손을 내렸다.
“근데 할아버지, 여기서 누굴 기다려요?”
카리나가 코코아를 홀짝거리며 물었다.
“우리를 만나고 싶어 하는 분이 계신단다.”
“그게 누구인데요?”
“그 사람은 바로….”
알버스가 대답하려는 순간.
“실례합니다.”
똑똑, 도착을 알리는 예의 바른 노크 소리였다.
곧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온 건 자주색 머리가 인상적인 젊은 남자였다.
훤칠한 인상의 사내는 싱긋 웃으며 그들에게 인사했다.
“……!”
남자를 마주한 알버스의 눈매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누구신가요?”
아스가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국왕 전하께서 보낸 비서관입니다.”
그는 자신을 아르카라고 소개했다.
***
그 시각.
노아와 레토는 집무실에서 재판 자료를 읽고 확인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들이 증언할 재판은 플랜시 전 소장의 이적 사건 하나인데, 얽힌 사건들이 많아서 관련 자료들도 전부 파악해야 했다.
“…이거, 한 달 안에 끝날 재판이 맞을까?”
자료를 읽느라 지친 숨을 돌리던 중, 노아가 끝내 고개를 아래로 떨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심 수도에서 편안하게 지낼 줄 알았던 노아는 저의 착각이었음을 호되게 깨달았다.
‘하긴, 할머니가 그럴 리가 없지.’
노아는 글로리아의 악랄함을 잠시 까먹었던 스스로를 탓했다.
“재판은 오래 걸릴 거야.”
레토 역시 재판을 썩 긍정적으로 보지 않았다.
“하지만 우린 플랜시 전 소장 공판에서만 증언하면 돼. 이후는 만약을 대한 대기 발령이겠지.”
“손가락 해적단은 우리가 직접 소탕했잖아.”
“그건 보고서로 충분할걸? 거기서 중요한 건 그 녀석들이 마약 유통책이었단 점이니까. 그리고 간첩과 접촉했단 점도.”
그쪽 증거는 특함 대원들의 보고서와 키르코 준장이 지휘했던 제8성분전단의 해적단 은신처 보고서로도 충분했다.
“그나저나 이 새끼는….”
그의 말을 듣고 있던 노아가 대뜸 인상을 삐뚜름하게 찡그렸다.
그녀의 시선은 아직도 손에 들려 있는 자료에 적힌 어느 피의자의 이름이었다.
바로 프레드 랠리였다.
“아주 마당발이시네.”
정말 안 낀 범죄가 없었다.
왕실 기사란 신분으로 마약을 밀재배한 것으로 모자라 해적단을 통해 제국에 밀수출했으며, 간첩과도 밀통한 정황이었다.
거기다 플랜시 전 소장의 이적 사건 때도 은밀하게 모든 계획을 짰던 실질적인 주범이었다.
“분명 뒤에 누가 더 있을 거 같아.”
노아가 중얼거렸다.
“모든 사건에 발은 걸쳤는데, 자세히 보면 지시자는 아니야.”
“전에도 그렇게 말했었지?”
레토는 일전에도 이것과 비슷한 대화를 노아와 나눈 적이 있었다.
“진짜 힘 있는 놈이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행동하겠어?”
테네브레였던 아티가 해군에 방문해, 자신들의 결혼식장에 난입했던 위장 테네브레를 데려갔던 날.
노아는 진짜 흑막은 따로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리고 마침, 저 대화를 나누고 며칠 지나지 않아서 아티가 엄청난 정보를 흘렸었다.
“육군 고위급 장교에 반역자가 있답니다.”
그 반역자가 플랜시 전 소장과 전 델라트 경을 유혹했다는 것도 확인했다고 말했었다.
“노아 네 말마따나.”
레토가 헛웃음을 짧게 터트렸다.
“정말 머리 아픈 사건이네.”
“그 육군 장교가 누구일까?”
“글쎄….”
레토가 말끝을 흐렸다.
짐작 가는 사람이야 있다. 하지만 그 사람의 이름을 제 입으로 꺼내긴 싫었다.
역겨운 쓰레기를 굳이 제 기력 써 가며 언급할 필요가 있을까.
거기다 노아에게 아직 말하지 못한 비밀이 하나 더 있었다.
‘어지간하면 이건….’
평생 몰라야 해.
다른 건 전부 알려 줄 수 있다. 그러나 그딴 인간이 저의 생부란 사실만큼은 노아가 모르길 바랐다.
‘하지만 노아 앞에서 거짓말하긴 싫으니….’
역시 결론은 하나였다.
제 손으로 서둘러 치우는 수밖에. 아예 언급조차 할 필요가 없도록.
“난 말이지….”
그런 남편의 속내를 전혀 알지 못하는 노아가 평온한 목소리로 제 생각을 말했다.
“그 흑막 말인데.”
여느 때와 다를 게 없는 목소리는,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단어를 언급했다.
“난 디모네 닉스 소장을 의심하고 있어.”
“…뭐?”
못 믿을 것을 들은 것처럼, 그리고 지금부터 이어질 끔찍한 전개를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지금, 뭐라고…?”
레토는 충격으로 어떤 표정도 짓지 못했다. 다만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낮게 가라앉았다.
그 변화를 눈치챈 노아는 레토가 제 생뚱맞은 말에 놀라서 저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전에 너한테 했던 말 기억나? 호텔에서 양가 상견례 했던 날 말이야….”
조부모님이 아드벨로 대장과 비서실장이었고, 부모님이 마탑주와 수석 보좌관이란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을 때.
노아는 양파처럼 끊임없이 드러나는 집안의 비밀로 아찔해하는 레토에게 예고했었다.
“큰 거 하나, 작은 거 하나 있어.”
그 중 ‘큰 거 하나’는 노아의 출생과 관련된 것이었다.
“피에타 가문, 오러, 내 목표.”
“확실히 큰 비밀이긴 했어.”
“응. 그리고 작은 건….”
잠시 말을 멈춘 노아가 단어를 신중히 골랐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그 탓에 방 안은 무거운 정적에 휩싸였다.
“내 출생보다 대단한 건 아니라서 작은 거라고 했지만, 다시 생각하니 그리 작은 건 아니었네.”
혼자 피식거린 노아가 이어 말했다.
이어진 말은 충격 그 자체였다.
“나와 아드벨로는 그 사람을 의심하고 있어.”
“어떤 걸…?”
“7년 전 피에타 가문을 무너트린 원흉으로 추측되는 인물이 있어. 왕국 출신인 것만 알았는데. 이번 사건들로 윤곽이 드러난 거 같아.”
물론 아직 확실한 건 아니야.
노아는 확실하지 않은 제 추측에 서둘러 뒷말을 덧붙였다.
“…….”
하지만 이미 레토의 눈앞은 새하얗게 점멸된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