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효도라.’
죽을 수 있단 걸 본인도 알았을 텐데.
지금이야 개인 함선이 최강의 무기, 과학과 마법의 정수라고 불리지만, 7년 전만 해도 아직 성능이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시제품에 불과했다.
그런데 어찌 그것이 효도가 될 수 있나.
노아는 호텔에서의 상견례 날을 떠올렸다. 그때 알버스는 참전한다는 레토에게 처음으로 손찌검했다고 말했었다.
‘나 같아도 화냈지.’
그래, 그게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사지로 가겠다는데, 어떤 가족이 그런 걸 이해하고 옳은 선택이라며 지지할까.
그리고 그걸 레토도 모를 리가 없다.
‘…아니야.’
저 새낀 진짜 그게 효도라고 생각했을지도.
노아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연애하던 시절에 차곡차곡 쌓아 뒀던 애틋한 짜증과 사랑스러운 분노를 기억해 냈다.
‘날 위한답시고 진급 취소하고 검까지 빼앗아 갔었지.’
완전히 틀어질 뻔했던 그날들이 아직도 새록새록했다.
레토는 자신이 욕먹고 혼자 몰래 해내는 걸 너무 당연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아이스 중령과 몇몇 제독들이 저를 따로 불러서 미리 알려 둘 정도로 심각한 겁쟁이였다.
‘지금도 용서가 안 되지만….’
또 그런다고 해도 이혼하거나 헤어질 생각은 없었다. 그저 다정하게 설득해 볼 심상이었다.
아드벨로 가문의 비기인 ‘다정’과 ‘설득’은 정신 교육에 효과가 좋기로 유명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심각한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거리는 노아를 재밌단 듯이 지켜보던 레토가 물었다.
노아는 제 속마음은 곧 죽어도 모를, 은근히 속 많이 썩이는 남편을 잠시 말없이 지켜봤다.
“그냥.”
그러곤 다시 서류에 시선을 고정하며 말했다.
“플랜시 소장 사건 보니까, 우리 둘이 헤어질 뻔했던 날이 떠올라서.”
“아이고, 나의 수치스러운 흑역사….”
“또 그랬다간 팔다리를 꺾어 가둬 버릴 거야. 발목 힘줄도 끊어서.”
“그거, 처제가 추천한 제정신 아닌 제목의 소설에 나오는….”
“…너 읽었냐, 결국 그걸?”
노아는 레토의 취향이 점점 클라레에게 물들어 가는 것만 같아 걱정이 들었다.
***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알버스가 아드벨로 저택에 찾아왔다.
“아침부터 푹푹 찌는군.”
어마어마한 선물을 가지고 온 왕국의 백사자는 웬일로 덥수룩한 백발을 깔끔하게 넘겨 묶은 채였다. 수염도 평소보다 윤기가 좀 흐르는 것처럼 보였다.
“…할아버지?”
잠옷 차림으로 내려온 카리나는 알버스를 보고 깜짝 놀라더니, 이내 풀이 팍 죽은 표정을 지었다. 벌써 자신을 집으로 데려가려고 온 것이라 생각했다.
“집에 가요…?”
“녀석아, 그렇게 대놓고 싫은 표정을 지어?”
할아버지 속상하게.
부러 과장되게 툴툴거린 알버스가 씩 웃더니 카리나의 까치집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늘은 너랑 클라레랑 같이 놀러 가려고 온 거다.”
때마침 클라레도 현관 앞에 나타났다.
“사돈 할아버지다!”
알버스를 알아본 클라레가 쪼르르 다가가 달라붙었다.
“으으, 더워….”
그러나 덩치 좋은 백사자의 몸에서 느껴지는 체온에 깜짝 놀라며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 모습에 웃음을 터뜨린 알버스는 가지고 온 선물들을 보여 줬다. 고용인들이 차에서 가져와 옮기는 선물들이 상당했다.
“아침은 먹었느냐? 네 형하고 형수님은?”
“아직 자요.”
클라레가 옮겨지는 선물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말했다.
“아까 일어나서 방에 가 봤는데, 둘이 꼭 끌어안은 채로 자고 있었어요. 어휴, 덥지도 않나.”
“으흠.”
알버스가 머쓱한 헛기침을 토했다. 큰손주의 은밀한 신혼생활을 의도치 않게 들어 버린 탓이었다.
“그러고 보니 다른 언니도 있지 않더냐?”
“아스는 수영하고 있어요.”
“수영?”
“저택 지하실에 커다란 수영장이 있거든요.”
이번 출장에서 가장 들뜬 사람은 단연코 아스였다.
벨로 저택의 집안일을 도맡는 그녀에게 수도행은 천국행이었다.
남이 해 주는 식사.
남이 해 주는 빨래.
남이 해 주는 모든 집안일.
심지어 저에게 지극정성인 보살핌과 시중을 들어주는 고용인들이 준비된 대귀족의 저택.
“아스가 본전을 뽑겠다는데, 눈이 좀 이상했어요. 막 동그랗게 커졌는데, 콩벌레가 동그랗게 움츠린 것처럼….”
클라레는 자신이 본 걸 열심히 설명했다.
‘요컨대 맛이 갔단 건가.’
대충 그렇게 이해한 알버스는 지나가던 고용인들을 불러 아이들 치장을 도우라고 말했다.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아침식사를 시작했다.
“…장군님?”
“언제 오셨어요?”
식사하는 도중 속속들이 늦잠 잔 어른들이 도착했다. 노아와 레토는 서둘러 자신들의 차림을 점검했다. 다행히 부끄러운 꼴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아스는?”
자리에 앉은 노아가 아스를 찾았다.
“아스는 수영하러 갔어. 그리고 아침은 정원 테라스에서 먹을 거라고 했어.”
“우리 처형, 정말 행복한 모양이네.”
다행이라며 레토가 진심으로 기뻐했다. 이에 노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수도가 체질이었나?”
“그냥 자본의 맛에 푹 빠지신 거지, 뭐.”
“돌아갈 때 울겠다, 야.”
아침 식사를 끝낸 뒤, 알버스는 오늘 자신이 이토록 일찍 저택에 방문한 이유를 알려 줬다.
“애들을 데리고 왕궁에 가려고 하는데, 어떠냐?”
“좀 갑작스럽긴 하군요.”
깜짝 놀란 레토가 연유를 물었다.
“그래도 수도에 왔는데, 왕궁 구경이라도 한번 해 봐야지.”
“하지만 장군님….”
노아가 염려스러운 말투로 여쭸다.
“아시겠지만, 제 여동생은 상당히 자유분방합니다. 가끔 뇌를 거치지 않고 말을 할 때도 있고요.”
노아는 클라레가 혹여 왕실에 가서 말실수라도 할까 걱정이었다.
가뜩이나 집안 어른들, 특히 글로리아에게 듣고 배운 게 많아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가면 분명히 사고를 칠 것이다. 노아는 그렇게 확신했다.
“그게 또 우리 사돈아가씨의 매력 아니겠나.”
정작 알버스는 너무 걱정 말라며 도리어 노아를 안심시켰다.
“내가 지켜봤는데, 사돈아가씨는 눈치가 좋고 똘똘해.”
“다른 집 애랑 착각하신 거 같습니다.”
“아니, 정말로.”
알버스는 생각 이상으로 클라레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지난번 남부에서 비밀리에 간첩들을 체포할 때, 사돈아가씨의 빠른 판단과 냉정한 대처에 큰 도움을 받지 않았던가.”
평소에는 그 나이대 또래처럼, 어쩌면 그 이상으로 씩씩하고 엉뚱한 아이다.
하지만 중요한 순간에는 누구보다 기민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 재빨리 떠올리는 우수한 판단력을 지녔다.
“…뭐.”
여동생 칭찬에 기어코 노아의 이성이 무너졌다.
“동생이 좀, 우수한 편이죠.”
흐물흐물 녹아 버린 입꼬리가 히죽거렸다.
레토는 그런 노아를 신기하게 바라보다가, 도로 알버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이들이 좋아할 것 같으니 상관없습니다만, 장군님께서도 바쁘시지 않습니까?”
“사실 오늘 입궁해서 그간 있었던 일들을 보고하긴 해야 해.”
“…….”
“눈치챘냐?”
알버스의 의미심장한 물음에 레토가 눈을 질끈 감으며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국왕이군요.”
바로 정답이라며 알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덩달아 분위기를 파악한 노아가 놀란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국왕이 데려오라고 한 겁니까? 제 여동생을?”
노아는 해군에서 만났던 붉은 머리 남자를 떠올렸다.
마치 자신은 모든 걸 다 안단 듯이, 마냥 여유롭고 능글거리던 태도가 제 남편보다 재수 없었던 그놈.
“…….”
노아는 빠르게 고민했다.
“미안하게 되었네.”
그런 노아에게 알버스가 순순히 사과했다.
“그 재수, 아니, 국왕이 남부에서 사돈아가씨가 간첩 체포에 도움을 줬단 소식을 알았나 보더군.”
저 말에 노아가 가장 먼저 떠올린 건 망할 오빠 새끼였다.
하지만 아티는 가족 이야기를 국왕에게 함부로 떠벌릴 인물은 또 아니었다.
‘어차피 다른 테네브레가 근처에 있었겠지.’
아티는 모종의 이유로 국왕과 손을 잡은 임시직, 심지어 테네브레와 오랫동안 갈등한 아드벨로 출신이다.
국왕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는 필시 아티의 주변에 다른 테네브레를 숨겨 뒀을 거다.
‘불쾌한데.’
그런 식으로 여동생의 정보가 흘러갔다고 생각하니, 노아는 역시 국왕이 영 아니꼽고 재수 없었다.
“…역시 데려가는 건 좀 그렇겠나?”
알버스는 여전히 반응이 없는 노아의 눈치를 살폈다.
그제야 정신 차린 노아는 서둘러 오해를 고쳐 줬다.
“저야말로 그래 주신다면 감사하지요. 장군님, 사실은 저랑 레토가 일 때문에 바쁜 걸 알고 계셨던 거죠?”
“며칠 뒤에 있을 공판 때문이란 건 대충 짐작했지.”
“배려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덕분에 큰 도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뭘 고마울 것까지야. 손주며느리한테 그런 것도 못 해 줄까!”
노아의 감사에 기분이 좋아진 알버스가 껄껄 웃었다.
“너….”
반면, 노아의 의중을 파악한 레토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눈이 마주친 노아는 그저 어깨만 으쓱거릴 뿐이었다.
“왕궁 구경이라잖아.”
예약한다 해도 언제 갈 수 있을지 모르는 귀한 곳.
나라의 왕이 기거하는 곳.
아들라보르의 중심.
“좋은 경험이 될 거야.”
과연 누구에게 좋은 경험이 될지, 노아는 굳이 주어를 언급하진 않았다.
***
클라레와 카리나의 왕궁 나들이엔 아스도 동행하기로 했다.
“괜찮겠어?”
노아는 외출 준비를 마친 아스를 붙잡았다.
“어제 푹 쉬어서 괜찮아요. 거기다 사돈 어르신 혼자서 두 아이를 돌보게 할 수도 없고요.”
“가면 오빠랑 마주칠지도 몰라.”
“벌레 새끼 있다고 못 갈 이유가 있나요?”
걱정 마시라며 싱긋 웃은 아스가 제 치맛자락을 손바닥으로 퐁퐁 두드렸다.
“큰 주인님이 챙겨 주신 게 있어요.”
“뭔데? 또 유통기한 지난 짐승용 마취제야?”
“후후후.”
“…왜 그렇게 웃어?”
더 불안하잖아!
“다녀올게!”
“다녀오겠습니다.”
씩씩한 클라레와 얌전한 카리나를 배웅하는 노아의 마음은 조마조마했다.
“내가 살다 살다 클라레보다 아스를 걱정할 때가 오다니….”
“그렇게까지 걱정 안 해도 될 거 같은데.”
레토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노아는 그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맞잡은 손은 곧 자연스럽게 깍지를 꼈다.
“처제가 눈치껏 아스를 지켜 줄 거야. 전에도 나한테 처형 앞에선 형님 이야기하지 말라고 알려 줬거든.”
“이상한 데서 애가 눈치를 챙긴다니까.”
“근데 좀 재밌겠다.”
레토는 내심 클라레가 국왕에게 한 방 먹이는 걸 기대했다.
그리고 그건 노아도 마찬가지였다.
“제발 가서 사고치고 와라….”
노아는 진심으로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