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4화 (124/245)

124.

사관학교에서 레토가 세운 무공을 배울 때만 해도, 노아는 그닥 관심이 없었다.

‘애국심 대단한 등신 새끼라고만 생각했지.’

살기 위해 조국에서 도망쳤던 노아 입장에선 그의 무공은 껄끄러운 내용이기도 했다. 그냥 출세욕이 대단하구나, 라고 감탄만 하고 넘어갔었다.

그리고 해군에 입대해서 당사자를 직접 만났을 때는 영웅이고 뭐고, 그냥 한 대만 때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입만 열면 재수 없고.

다가오면 짜증 나고.

웃는 얼굴만 봐도 욕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었는데.

‘…나 쟤랑 왜 결혼했지?’

노아는 새삼 자신의 선택에 의구심을 품었다.

하지만 어린 동생들을 챙기는 그의 모습을 보니 찰나의 의문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그러나 그게 레토의 참전 이유에 대한 궁금증이 사라졌단 뜻은 아니었다.

오히려 더욱 커졌다. 궁금함과 함께 걱정도 들었고. 사진 속 레토는 자신이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마치….’

어떤 감상이 떠오르려던 찰나였다.

“형님, 여기서 형님이랑, 사진 찍어도 돼요?”

“좀 부끄럽네.”

“한 장만 찍어 주시면, 더는 귀찮게 안 굴….”

“그런 거 아니야. 너랑 사진 찍으면 나도 기뻐. 대신 사람들이 많으니까 모자는 써야 하는데.”

“괜찮아요! 저는 상관없어요.”

“그럼 둘이 붙어 볼까요?”

다정하게 붙은 두 형제를 찍어 주면서, 노아는 생각했다.

일단 제 석연찮은 의구심은 집어넣어 두기로. 적어도 지금 여기서 그걸 물어볼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처제도 찍을래요?”

“네! 언니 나 예쁘게 찍어 줘!”

“오냐….”

사진을 몇 장 더 찍은 뒤, 네 사람은 마지막 전시관으로 이동했다.

“이번엔 네가 모자를 써야겠네.”

레토가 씩 웃으며 자신이 썼던 모자를 노아의 머리에 얹었다.

마지막 전시관은 군사 홍보관이었다.

역대 기사단 및 각 군부대에서 자신들을 어떻게 홍보하고 모병 활동을 했었는지, 그와 관련된 자료들을 전시해 뒀다.

그리고 그곳에서 가장 많은 인파가 몰린 곳은, 바로 해군 모병 홍보물 구역이었다.

싱긋 웃으며 경례하는 제복 차림의 노아가 수많은 관람객에 둘러싸여 있었다.

다들 노아의 사진을 배경 삼아 기념사진을 찍거나 아름다운 외모를 칭찬하기 바빴다. 노아가 세운 무공을 얼마나 아는지 자랑하는 사람들도 제법 많았다.

“…….”

그리고 그 광경을 처음 목격한 노아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며 입을 꾹 다물었다.

설마 저렇게까지 많은 사람이 몰려들어 구경할 줄이야.

이따금 주변 사람들이 제 사진이 수도에서 자주 도난당한다는 둥, 아주 연예인 저리 가라 할 정도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냥 으레 하는 칭찬인 줄 알았는데….’

태생이 귀족인지라, 노아는 사람들의 칭찬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저 예의상 하는 말이라고 여길 뿐이었다.

한데 정말로 제 사진이 연예인 뺨을 칠 정도로 인기였다니.

“내 인기는 인기도 아니었네.”

레토가 모자를 푹 눌러쓴 채 말이 없는 노아를 놀렸다.

살짝 헐렁한 모자 너머로 튀어나온 둥근 귀가 어느 때보다 빨갛게 달아오른 채였다.

그걸 봐 버렸으니, 레토는 놀리는 걸 멈출 수 없었다.

“난 굳이 모자 쓸 필요도 없었겠는데?”

레토의 말대로였다. 그의 큰 키와 훤칠한 미모 때문에 힐끔거리는 게 다지, 레토를 알아보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럴 때가 아니군. 나도 가서 사진 한 번 찍고 와야겠다. 저 사진 속 아름다운 여인이 나랑 결혼해 준다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할 텐데.”

“형부 바보!”

클라레가 대뜸 엉덩이를 흔들며 놀렸다.

“이미 언니랑 결혼했잖아!”

“아차, 그랬지.”

깜빡했다며 레토가 덩달아 앙증맞은 표정을 지었다.

“그럼 전 이미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군요.”

“그러니까 울 언니한테 잘해요. 허구한 날 속 썩이고 장난치지 말고. 언니 아니었으면 형부가 어디 가서 사람 구실이나 했겠어요?”

“…우리 조금 전까지 되게 재밌는 분위기 아니었나요?”

갑자기 뼈를 때리네.

어린 처제의 냉혹한 객관적 평가에 레토는 우울해졌다.

그러건 말건, 이미 클라레는 인파를 헤치고 노아의 사진 앞에 섰다. 그러고는 사진 속 노아처럼 오른손으로 경례하며 멋진 척을 했다.

“언니, 나 사진 찍어 줘!”

그 모습에 주위 사람들이 웃음을 키득거렸다.

“누구 동생인지 몰라도 신수가 훤칠하네.”

아직도 창피함에 굳어 버린 노아를 대신해, 레토가 사진기를 들어 클라레를 찍어 줬다.

***

박물관 관람을 마친 네 사람은 곧장 저택으로 돌아왔다.

“노아 넌 혼자 밖으로 돌아다니지도 못하겠다.”

돌아오는 길에, 운전하던 레토가 말했다.

“혹시 증언하러 갈 때도 난리 나는 거 아니야? 세상에, 여기 그 유명한 노아 벨로 대위가 왔습니다! 이러면서 기자들이 네 사진만 찍는 거지.”

그리고 다음 날 신문과 라디오 뉴스에선 노아에 대한 기사만 잔뜩 나올 거라며 짓궂게 놀렸다.

“…계속 한번 그리 말해 봐봐.”

노아가 나긋한 목소리로 권했다.

“재판 때까지 시간도 있겠다, 관공서 구경이나 하러 갈까?”

기념품으로 이혼 서류도 가져오고 말이야.

노아가 싱긋 웃으며 물었다.

“재밌겠다, 그치?”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깝죽거렸습니다.”

다행히 뒷좌석에 앉아 있던 동생들은 입 벌리고 곯아떨어진 상태였다.

저택에 도착하니, 새하얀 목욕가운을 입은 채 고용인들에게 마사지를 받던 아스가 마중하러 나왔다.

“재밌게 놀다 오셨어요?”

아스는 얼굴에 정체불명의 희멀건 덩어리 같은 걸 덕지덕지 바른 채였다. 수도에서 유행한다는 미용 팩이었다.

“…처형도 재미나게 보내신 것 같습니다.”

레토는 예의 바른 미소로 놀란 속내를 감췄다.

잠든 아이들을 각자의 침실에 눕혀 두고 나오자, 베닝이 노아와 레토를 따로 불렀다.

“두 분이 해군에 제출하셔야 할 출장 비용 영수증은 저희가 따로 준비해 두겠습니다. 그리고 조금 전에 왕실이 보낸 등기들이 도착했습니다.”

베닝이 안내한 곳은 집무실이었다.

“이곳에서 일하시면 됩니다. 필요하시면 따로 불러 주십시오. 저녁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먹을 거예요. 나중에 아이들이 깨어나면 알려 주고요.”

“그럼 가볍게 드실 차를 올리겠습니다.”

그는 두 사람이 집중하는 데 도움을 줄 차가운 허브차를 준비해 뒀다.

“유능하시네.”

레토가 차를 마시며 감탄했다.

시원한 얼음물에 우러난 허브 향이 박물관에서 동생들 챙기느라 피곤했던 정신을 단번에 차리게 했다.

“베닝 아저씨는 대단한 사람이야.”

“어쩐지 범상찮은 이력을 지니셨을 것 같은데….”

레토가 경험한 아드벨로는, 모두 자신들의 대단한 이력과 정체를 꽁꽁 감추는 요상한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베닝 아저씨는 평범해.”

노아의 대답에 레토가 아쉬워하려던 찰나였다.

“특수부대에서 일했다는데, 남부엔 해군 출신이 워낙 많잖아.”

“노아, 특수부대는 평범한 이력이 아니야.”

레토는 조용히 지적했다.

아무래도 너무 대단한 사람들이 주변에 널린 탓에, 노아는 평범함이란 것의 기준이 남들과 많이 다른 모양이었다.

왕실이 보낸 등기는 재판과 관련된 사건 자료들이었다.

말이 등기지, 서류로 가득한 커다란 상자들이 무려 다섯 개였다.

노아와 레토는 노는 건 오늘로 끝이겠구나, 라는 걸 직감했다.

둘은 묵묵히 서류를 읽어 가기 시작했다.

“참 많이도 엮였네….”

노아가 피곤에 겨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얀 건 종이고, 까만 건 사건 개요라는 걸 파악하느라 피로가 쌓인 눈두덩이 주변을 살살 만졌다.

플랜시 전 소장 재판이 열릴 때까지 몇 개월이나 걸린 이유가 바로 자신의 눈앞에 있었다.

그의 재판에는 여러 가지 사건이 얽혀 있었다.

플랜시 전 소장과 밀항하려 했던 왕실 기사가 수도 외곽에서 마약을 재배 및 제조했고, 남부에서 악명 높던 해적단을 유통책 삼아 그걸 제국에 밀수출했다.

왕실 기사에게 해적단을 소개해 준 것이 제국 간첩이었으며, 이들은 작년 가을 국경선 폭발 사건 때 몰래 숨어들었다.

“그리고 저 폭발 사건엔 육군 고위직이 얽혔고, 안보국 국장이 간첩 무리를 몰래 도왔다….”

노아는 헛웃음을 삼켰다.

제 입으로 직접 말해 놓고도 믿기지 않았다. 아니, 저 사건 중 몇몇은 노아가 직접 해결까지 했었다.

그래서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은 전시 상황이 아니었다. 하물며 제국은 완벽하게 패배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반역 행위를 계속해서 일으키는 걸까.

마찬가지로 어처구니가 없던 레토가 말했다.

“아마 사형은 확정이겠지만….”

“이겠지만?”

“뭐 때문에 이딴 짓을 벌였는지, 그리고 또 따로 진행된 반역죄나 이적죄가 있는지 밝히는 것을 조건으로 감형할 수도 있지.”

“사법 거래는 질색인데.”

노아가 투덜거렸다.

그렇게 한참 자료를 읽던 중, 노아는 불현듯 박물관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런데 너.”

“응?”

노아의 부름에 레토가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의 손은 자료를 넘기느라 여념이 없었다.

“왜 참전한 거야?”

물어보는 목소리는 평이했다.

“…….”

하지만 거기에 반응하는 레토는 평범하다고 할 수 없었다. 고장 난 인형처럼 멈춰 버린 그는 천천히 입을 열다가, 이내 다물었다.

“너 그때 겨우 갓 졸업한 생도였잖아. 그리고 오케아누스의 양자였으니까, 굳이 전쟁에 참전할 필요도 없었고.”

사실 노아는 제 손에 들린 재판 자료 속 범죄들의 이유보다, 레토의 참전 이유가 더 궁금하고 이해되지 않았다.

“이건 묵비권 행사 못 하나?”

기어코 자료에서 눈을 뗀 레토가 머쓱하게 웃었다. 이대로 넘어가 줬으면 하는 간절함을 숨기지도 않았다.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노아가 말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내가 이상한 오해를 하게 될 거란 걸 알아 둬.”

“가령?”

“오케아누스가 실력 좋은 널 질투해서 죽일 의도로 전장에 내밀었다던가?”

“그러면 안 되는데….”

곤란해하던 레토가 잠시 고민했다.

“그렇게 대단한 이유는 없어.”

노아는 참전 이유를 말하는 레토의 손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냥 효도 한번 하려고.”

그는 깍지 낀 제 손가락을 압박하듯 만지작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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