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3화 (123/245)

123.

레토는 신호가 바뀌기 무섭게 출발했다. 그는 적정 속도를 준수하며 운전을 서둘렀다.

“여기 근처에 박물관 있어! 거기로 가자!”

조수석에서 지도를 읽던 노아가 가리키는 대로, 레토는 서둘러 차를 몰았다.

차가 주차장에 멈추자마자 클라레를 번쩍 안아 든 노아가 근처에 있던 화장실로 달려갔다.

곧 변기 물 내려가는 소리가 쾌청하게 울렸다.

“휴, 아슬아슬했네.”

시원하게 비우고 나오신 클라레의 표정이 한결 개운해졌다.

아이는 어린이용 세면대에서 슥슥 손을 닦고, 챙겨 온 손수건으로 손을 꼼꼼히 닦았다.

“언니, 나 다 했어.”

“…….”

세면대 옆에 지친 기색으로 서 있던 노아가 원망스러운 눈으로 클라레를 내려다봤다.

그러곤 부질없단 듯이 한숨을 푹 내쉬더니, 클라레의 옷맵시를 정리해 줬다.

“아슬아슬했냐?”

“응. 그치만 난 교양을 배운 여자잖아. 딱 참아서 화장실에서 해결했지.”

“잘했어.”

노아의 칭찬에 클라레가 빵긋 웃었다. 동생이 웃는 걸 보니, 조금 전까지 지치고 피곤하던 것이 단숨에 사라졌다.

밖으로 나오니 주차를 마친 레토가 카리나와 함께 다가왔다.

“처제, 볼일은 다 봤어요?”

“네! 손도 깨끗하게 씻었어요. 짠!”

“근데 여긴 어디야?”

노아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박물관인 것만 보고 왔지, 어떤 주제로 전시하는 곳인지 확인도 하지 않았다.

“군사 박물관이에요.”

카리나가 말했다.

“저 여기 온 적 있어요. 할아버지랑 자주 왔거든요.”

레토를 그리워하는 작은 꼬맹이를 위해, 알버트가 쉬는 날이면 틈틈이 데려와 준 곳이었다. 그래서 주차장에 도착하자마자 여기가 군사 박물관인 걸 알 수 있었다.

“하필 와도 직장이랑 연관된 곳을….”

출장의 저주인가?

그래도 노아는 아이들과 방문하기 딱 좋은 곳이라고 생각했다.

보아하니 카리나는 들어가 보고 싶은 눈치였고, 클라레도 처음 와 본 곳이라 흥미를 보였다.

노아도 딱히 다른 곳 찾으러 이리저리 돌아다닐 필요 없는 것 같아 내심 다행이라 여겼다.

“레토, 여기서….”

아이들하고 구경할까?

라고 물으려던 노아가 멈칫했다.

“…….”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활기 넘치던 그의 얼굴이 거짓말처럼 굳어 있었다. 뭔가 곤란해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는 금방 제 감정을 갈무리했다. 그러곤 어떤 흔들림도 없었단 듯이 천연덕스럽게 웃어 보였다.

“아, 미안. 불렀어?”

“…….”

“그럼 온 김에 한번 들어가자. 또 다른 데 가다가 우리 처제가 쉬 마렵다고 하면 큰일이니까.”

“누가 들으면 형부는 쉬 안 싸는 줄 알겠네.”

클라레가 볼을 부풀리며 심통 난 표정을 지었다.

***

“가족 관람객은 할인된 가격으로 입장권을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 입장권을 들고 가시면 어린이용 증정품을 무료로….”

직원분의 상냥한 설명 덕에 네 사람은 할인된 가격으로 입장권을 구매했고, 클라레와 카리나는 박물관 이름이 큼지막하게 적힌 목걸이 수첩을 받았다.

“어린이 박물관은 저쪽이네.”

레토가 서쪽 별관을 가리켰지만, 클라레와 카리나는 바로 맞은편에 있는 본관 건물로 가고 싶어 했다.

“난 학교 다니는 언니야. 어린이 박물관 따윈 안 가도 돼.”

“할아버지가 저기로 자주 데려가 줬어요. 저리로 가도 돼요.”

하지만 노아와 레토는 망설여졌다. 군사 박물관이니 잔인한 묘사가 있거나, 어린아이가 보기에 적절치 않은 것들이 전시되어 있을지 모른다.

때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박물관 직원이 있어서, 노아와 레토는 서둘러 물어봤다.

“여기랑 여기만 제외하면 나머지는 괜찮습니다.”

그제야 박물관 견학이 시작되었다.

본관은 유서 깊은 귀족의 저택처럼 고풍스러운 외관을 자랑했다.

반면 내부는 현대적으로 수리하여 돌아다니는 데 큰 불편함이 없었다.

실제로도 본 건물은 한때 왕국에서 내로라하던 귀족의 소유였다고 한다.

“…그런데 아드벨로에게 빚을 지고 몰락했다는군.”

레토가 안내문에 적힌 귀족의 마지막을 소리 내 읽었다. 이에 노아는 콧방귀를 뀌었다.

“보나 마나 아드벨로를 깔봤다가 큰코다친 거겠지.”

“코만 다친 것치곤 많은 걸 잃었네.”

각 전시관은 시대순으로 되어 있었다. 아들라보르가 건국되기 이전 시대부터 시작해, 건국 이후의 시대까지 군사와 관련된 유물과 자료가 전시되어 있었다.

중간 즈음에 조그맣게 외국의 군사 전시관도 있었다.

“…….”

노아는 시스타 제국의 피에타 가문과 관련된 전시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시스타 제국의 천년 역사와 함께한 명예로운 피에타 가문은 역사상 전례가 없는 강인한 무력, 그리고 흔들림 없는 도덕심과 정의로움으로…]

슬픈 것도 아니고, 화가 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7년이란 시간이 흘렀는데도 왕국의 박물관에서 제 가문의 흔적을 접하는 이 상황이 꿈 같아, 현실감을 느끼지 못할 뿐이었다.

“형님, 이게 뭐예요?”

이곳엔 처음 와 본 카리나가 레토에게 물었다.

아이는 진열장 안에 전시된 두 자루의 검 그림을 가리켰다.

“피에타 가문의 보물인 부부검이야. 동화책이랑 영웅담에 자주 등장하는 오러 알지? 저 검들은 그 오러를 쓸 수 있게 해 준다는 전설이 있어.”

“와아, 신기하다.”

카리나는 동화책에서 읽었던 오러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

반면, 클라레는 그저 노아의 손을 꼭 잡았다.

“넌 안 신기해?”

노아가 이상할 정도로 얌전한 클라레에게 물었다.

“응.”

대답하는 클라레의 목소리엔 망설임 따윈 없었다.

“그냥, 좀 그래.”

“오러가 안 신기해?”

“그런 건 아닌데….”

클라레가 노아를 올려다봤다.

“언니는 꼭 오러 이야기만 나오면 표정이 막 이래.”

클라레는 제 눈에 비친 노아의 표정을 흉내 냈다. 아이는 입꼬리를 축 늘어트리곤 눈을 멍하니 떴다.

“언니가 이런 표정 지으면, 나는 조금 무섭고 슬퍼.”

“…….”

“언니, 나 다른 데 가고 싶어.”

클라레가 재촉했다.

노아는 내심 놀랐다. 평소엔 눈치를 뉘 집 개한테 버리고 온 것처럼 제멋대로 구는 주제에, 꼭 이럴 때만 제 상태를 기민하게 눈치채고 있다.

“그럼 이제 다른 곳으로 갈까요?”

레토가 물었다. 그 역시 아까부터 노아를 예민하게 살피고 있었다. 클라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튼….”

노아는 맞잡은 조그만 손을 아프지 않게 꼭 쥐었다.

웃기게도, 저와 다른 체온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노아는 큰 위로를 받았다.

저조차 제대로 명명하지 못한 복잡한 감정은 금세 잊을 수 있었다.

아니, 사실은 그냥 가슴 한구석 어두운 곳에 숨겨 뒀을 뿐이었다.

감정의 이름은 모르지만, 아직은 이걸 드러낼 때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처제가 언니를 무척 사랑하네.”

레토가 노아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그도 내심 클라레의 예리함에 놀라던 중이었다.

“못난 언니 때문에 똘똘한 녀석이 고생이지, 뭐.”

중간에 목마르단 아이들을 데리고 매점에 들렀다가, 불상사를 대비해 한 번 더 화장실에 들르고 나서 관람을 다시 시작했다.

“여기! 여기예요!”

여태 얌전히 구경하던 카리나가 처음으로 몸을 들썩거렸다.

“야, 박물관에선 조용히 해야지.”

클라레가 야무지게 말했다.

노아는 너나 잘해,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조금 전 감동을 떠올리며 꾹 참기로 했다.

“그치만 여기에 형님이 있단 말이야!”

얌전한 카리나를 흥분시킨 마지막 목적지는 ‘아들라보르 역공전’ 전시관이었다.

가장 최근에 발발한데다가, 심지어 완벽한 승전으로 마무리했던 전쟁이라 그런지 전시관 규모가 여태 본 것 중 가장 컸다.

그리고 관람객들 수가 유독 많은 곳이 따로 있었다. 카리나 역시 그곳으로 향했다.

바로 역공전을 승리로 이끈 어느 젊은 영웅을 기리는 특별전시관이었다.

노아는 떡하니 걸린 남편의 대형 사진을 보자마자 입을 쩍 벌렸다.

“야, 너 괜찮겠어?”

노아가 황급히 물었다.

레토는 아내가 뭘 걱정하는지 대충 알 것 같았다. 아마 제 정체가 들켜서 소란스러워지는 걸 염려하는 듯했다.

“당당하게 굴면 들키지 않을 거야.”

“그게 말이 돼? 네 얼굴은 한 번 보면 눈을 떼지 못할 정도로 아름답고 잘생겼단 말이야. 바로 들킨다고!”

“자기야….”

감동한 레토가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건 말건 노아는 혹여 관람객들이 레토를 알아볼까 전전긍긍이었다.

“이러면 됐지?”

다행히 레토는 조금 전에 아이들 마실 것을 사러 매점에 들렀을 때, 이런 순간을 대비해 모자를 몰래 사 뒀었다.

“샀으면 재깍재깍 쓸 것이지.”

하지만 노아는 레토가 모자를 썼는데도 영 불안했다.

“모자를 써도 감춰질 얼굴은 아니네.”

“오늘따라 칭찬이 후하시네요, 부인?”

“네 얼굴 크다는 뜻이거든?”

“에이, 아까 그렇게 칭찬했으면서.”

내 얼굴 좋아하잖아.

치근덕대는 레토를 무시하며, 노아는 박물관이 찬양하는 레토 오케아누스라는 영웅의 업적을 관람했다.

사진 속 레토는 노아의 옆에 있는 남편과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고작 18살.

사관학교를 갓 졸업한 생도는 실험조차 제대로 거치지 않은 신형 무기를 짊어진 채 바다를 건넜다.

그곳에서 젊은 생도는 돌고래의 도움을 받아 제국으로 무사히 숨어들었고, 황궁이 있는 수도까지 진입해 깃발을 꺾으며 완벽한 승리를 가져왔다.

그 탓일까.

사진 속 레토는 날카롭고 서늘한 인상이었다. 웃음이나 긍정적인 감정을 전혀 모르는 것처럼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이 섬뜩하기까지 했다.

“형부랑 안 닮았어.”

눈썰미가 좋은 클라레도 사진을 보고도 믿지 못했다.

한쪽에는 그 당시 젊은 영웅이 짊어졌다는 신형 무기가 전시되어 있었다. 개인 함선의 초창기 모델이었다.

“저건 가짜야.”

레토가 속삭였다.

“진짜는 마탑 연구소에 있어.”

“하긴, 이렇게 공개된 장소에 함부로 내놓진 못하지.”

“하지만 저건 진짜야.”

레토가 가리킨 건, 아주 낡고 허름한 전투복과 군화였다.

젊은 영웅이 바다를 건너 제국 수도로 진입할 때 입었던 것이었다. 옆에는 그가 썼다는 군용품도 나란히 진열되어 있었다.

“저렇게 썩은 옷을 입고 싸웠다고?”

나라가 돈이 없나?

충격을 받은 클라레는 고개를 하염없이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야, 그만큼 형님이 엄청 힘들고 대단한 전투를 했단 뜻이야. 아주 근사한 거라고.”

반면 카리나는 레토를 칭송하기 바빴다. 그는 자신의 형님이 이렇게나 멋진 전쟁 영웅이란 사실이 아주 자랑스러웠다.

“…….”

하지만 다 해진 전투복을 바라보는 노아의 눈빛은 점점 가라앉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노아는 아이들을 챙기는 레토를 바라봤다.

18살의 레토 오케아누스는 무슨 생각으로 시험도 거치지 않은 80kg짜리 신형 무기를 짊어지고 바다를 건너겠다고 자처한 걸까.

그건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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