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내가 먼저 내릴래! 내가 먼저!”
“알았으니까 손 꼭 잡아.”
가방을 멘 채 발을 동동 구르는 클라레가 불안해, 노아는 동생의 손을 단단히 붙잡았다.
“언니, 나 여행 와서 너무 즐거워.”
클라레가 노아의 손을 꼭 쥔 채 말했다.
“언니가 같이 있으니까 행복해. 만날만날 이렇게 함께 있으면 천국일 텐데.”
“클라레….”
울컥한 노아는 가슴이 미어졌다. 절 올려다보며 씩 웃는 어린 여동생의 소박한 행복이 고마우면서도 미안했다.
매번 일 때문에 바쁘단 이유로 제대로 돌봐 주지도 못하는 못난 언니인데도, 클라레는 항상 제 한 몸 가득 사랑을 표현했다.
“언니도 나랑 같이 있어서 좋아?”
“당연하지.”
세상에서 너무 좋아.
노아는 사랑을 담아 클라레의 양 볼과 이마에 입술을 오랫동안 맞췄다. 기분이 좋아진 클라레는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카리나가 레토의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톡톡 건드렸다.
“형님.”
“응?”
자매의 다정한 순간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레토가 그 표정 그대로 카리나를 바라봤다.
“저, 저도 형님이랑 같이 있어서, 어, 그러니까….”
부끄러워진 카리나는 고개를 푹 숙이더니, 개미가 기어가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클라레처럼 솔직하게 말하는 건 쉽지 않았다.
결국 우물쭈물하다가 풀이 팍 죽은 카리나는 제 손가락만 만지작거렸다.
“카리나.”
커다란 손이 아이의 떨어진 머리 위에 툭 얹어졌다.
다정한 목소리에 이끌려 고개를 들어보니, 절 보며 쓰게 웃는 레토가 있었다.
“일 때문에 수도에 온 거라서, 바로 오케아누스 저택에 가지는 못할 거야.”
“네….”
더 풀이 죽어 버린 카리나의 눈망울이 점점 젖어 들었다.
“그러니까.”
카리나가 정말로 울어 버리기 전에, 레토가 말했다.
“오늘 같이 놀까?”
“…네?”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카리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레토는 동생에게 한 번 더 설명하는 대신, 아이트라와 알버스에게 허락을 구했다.
“카리나랑 하루 정도 같이 지내도 될까요?”
“출장 때문에 왔다더니, 바쁘지 않겠니?”
아이트라가 염려스러운 마음으로 물었다. 출장 내용을 묻진 않았지만, 곧 열리는 해적 소장 이적 사건 공판과 관련되었단 건 짐작할 수 있었다.
“하루 정도는 괜찮습니다.”
레토가 노아와 아스를 바라봤다. 두 사람 역시 괜찮단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부탁할까?”
아이트라가 카리나에게 물었다.
“카리나, 엄마랑 할아버지랑 떨어져서 지낼 수 있겠니?”
“첫 외박이구나. 형아랑 즐겁게 놀다 오렴.”
알버스가 씩 웃으며 카리나의 머리를 벅벅 쓸었다.
“…….”
카리나는 동그란 눈을 멍하니 끔뻑거릴 뿐, 아무 말도 없었다.
“…이런.”
말 없는 손주를 살피던 알버스가 그만 피식거렸다.
“이 녀석, 기절했군.”
존경하는 형이랑 하루 종일 함께 있을 수 있단 사실에 감격한 나머지, 벅차오르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만 기절해 버렸다.
결국 카리나는 좋아하는 형아의 품에 안긴 채로 열차에서 내렸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카리나는 그 엄청난 순간을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화가 나, 남몰래 씩씩거렸다고 한다.
***
“그럼 내일 데리러 갈게.”
“수도에 머무는 동안 식사라도 하자꾸나.”
아이트라와 알버스는 역 앞에 마중 나온 차를 타고 먼저 저택으로 떠났다.
“형님, 오늘 하루 잘 부탁드립니다.”
기절했다가 정신 차린 카리나가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누가 형한테 그렇게 말해.”
하여튼 엉뚱한 녀석.
피식 웃은 레토가 손을 내밀었다. 카리나는 그 손을 꼭 쥐며 입꼬리를 배시시 올렸다.
아스는 가방에서 꺼낸 사진기로 두 형제의 모습을 찰칵 찍었다.
“어때, 클라레?”
노아가 물었다.
여전히 언니의 손을 꼭 쥔 채, 눈을 반짝이며 수도를 구경하던 클라레가 상기된 표정 그대로 노아를 올려다봤다.
“언니.”
황홀한 목소리는 마치 꿈속을 걷는 것처럼 몽롱했다.
“수도는, 남부랑 완전히 달라.”
건물 양식도, 도로를 달리는 버스와 택시도, 아이들이 입고 있는 교복도. 심지어 거리 노점상에 파는 간식이나 장난감도.
모든 것이 남부와 달랐다.
클라레는 그 점이 너무 신기하고 흥미로웠다.
“근데 사람은 우리랑 비슷하네?”
때마침 옆을 지나가는 정장 차림의 남자를 따라 시선을 돌리던 클라레가 중얼거렸다.
“수도 사람들은 다 머리에 뿔 달리고, 팔이 4개에다가 엉덩이에 꼬리 달린 줄 알았어.”
“그건 어디에서 들은 정보니?”
“보르가 그랬어. 보르네 부모님이 일 때문에 수도를 다녀오면 만날 수도 사람들을 욕했대. 악마들이 사는 곳이랬어.”
“그런 건 잊어버려.”
섬뜩한 편견을 바로잡아 준 뒤, 노아는 근처에 정차하고 있던 택시를 잡았다.
앞좌석에 덩치가 가장 큰 레토가 탔고, 뒷좌석에 나머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탔다.
“그런데 왜 택시를 타요?”
카리나가 옆에 있던 노아에게 속삭이듯 물었다.
“차가 없어서 그런 거예요?”
“어른의 사정 때문이에요.”
“어른의 사정?”
“저와 레토는 일 때문에 수도에 온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수도에 무사히 도착했단 증거를 남겨야 하거든요.”
“그게 영수증인 거군요.”
똘똘한 카리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노아의 말을 순순히 믿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
사실 돈 한 푼 안 들이고 수도에서 머물 수 있었다. 이미 글로리아가 수도 내 아드벨로 저택에 연락을 해 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출장이란 명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영수증을 확보해 놔야 했다.
택시가 도착한 곳은 조그만 숙박업소였다. 호텔이라기엔 조금 작은 곳이었는데, 노아와 레토는 예약해 둔 방을 결제하고 영수증을 챙겼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를 타는 척하다가 다시 밖으로 나갔다.
“어휴….”
이 어처구니없는 헛짓거리에 아스가 기어코 한숨을 내뱉었다.
“참 부지런도 하십니다.”
“그럼 처형께선 저 호텔에서 지내시겠습니까?”
레토가 아까 받았던 호텔 방 열쇠를 내밀며 물었다.
“옆에 동생분 계신 걸 다행인 줄 아세요.”
사근사근한 미소로 무장한 아스는 눈빛으로 자아낼 수 있는 모든 욕이란 욕을 전부 쏟아냈다.
레토는 웃는 낯짝으로 노아의 옆으로 도망쳤다.
“이기지도 못할 거면서.”
들러붙는 남편을 도닥인 노아의 앞에 붉은 마동력차 한 대가 멈춰 섰다. 어딘가 낯이 익은 차체였다.
“형부 차랑 비슷한 거!”
클라레의 말대로였다. 아들라보르에 다섯 대밖에 없는 체티 사의 신형, 레토가 아끼는 붉은 애마와 똑같은 차량이었다.
“아드벨로에서 왔습니다.”
차에서 내린 운전사가 말했다. 그는 벨로 가족의 짐을 트렁크에 옮긴 뒤, 다시 차를 운전해 진짜 목적지로 데려다줬다.
푸른색 지붕이 고풍스러운 아드벨로 저택이었다.
“…….”
차에서 내린 클라레는 거대한 저택을 보자마자 입을 쩍 벌렸다. 같이 있던 카리나도 아드벨로 저택의 규모에 제법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뜬 채였다.
“언니, 여긴 어디야?”
“할머니 집이야.”
“할머니가 왕이었어? 여긴 왕궁이야?”
“나중에 할머니한테 그 이야기 해 주면 무척 좋아하실 거야.”
저택 안으로 들어가자, 좌우로 나란히 줄을 선 고용인들이 어서 오시라며 공손히 인사했다.
깜짝 놀란 클라레가 후다닥 노아의 뒤에 숨었다. 반면 카리나는 태연했다. 이런 반응이 익숙한 듯했다.
“아가씨들!”
그중 턱시도 차림의 콧수염 남자가 반가워하며 다가왔다.
“오랜만입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세상에, 아저씨!”
“어머 어떡해! 아저씨 맞으시죠?”
노아와 아스는 아는 사람인지 덩달아 기뻐하며 알은체했다.
“큰 주인님께 말씀 전해 들었습니다. 한 달 동안 편히 지내실 수 있도록 보필하겠습니다.”
콧수염의 남자는 한 걸음 뒤에 떨어져 있는 레토를 발견했다.
“오케아누스 중장님. 노아 아가씨와 결혼하신 것을 축하합니다. 참석하지 못해 죄송하고요.”
“아닙니다. 이렇게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이름은 베닝입니다.”
콧수염이 멋들어진 베닝은 이목구비가 무척 진하고 험하게 생긴 중년의 남자였다.
하지만 상냥한 말투와 정이 넘치는 행동은 그가 선한 사람이라는 걸 대신 말해 주고 있었다.
“그럼 이분이 클라레 아가씨인가요?”
그는 감격 어린 눈빛으로 노아의 다리 뒤에 숨은 클라레를 바라봤다. 시선이 마주친 클라레는 더욱 몸을 숨기며 베닝을 경계했다.
“넌 기억 못 하겠지만.”
노아가 설명해 줬다.
“아기였던 널 돌봐 주신 분이야.”
“기억 안 나….”
“기억 안 나는 게 당연합니다. 그때의 클라레 아가씨는 아침에 먹는 흰 빵처럼 작고 앙증맞으셨으니까요.”
“난 지금도 앙증맞은데.”
그치, 언니?
클라레의 물음에 베닝이 목젖이 보일 정도로 크게 웃었다.
“클라레 아가씨는 세상에서 가장 앙증맞고 사랑스러운 분이시죠.”
“아저씨 좋은 사람이네요!”
칭찬 한 마디에 경계를 푼 클라레는 그제야 해맑은 미소를 보여 줬다.
베닝은 가족들이 묵을 방을 직접 안내했다. 그는 예고 없이 방문한 카리나에게도 무척 친절했으며, 눈치껏 카리나의 방을 레토가 묵을 방 바로 옆에 배정했다.
“여기 벽에 있는 문을 통해 서로의 방으로 통할 수 있습니다.”
“바로 옆에 형님이 있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
감격한 카리나는 문을 몇 번이나 여닫기를 반복했다.
“저녁에 놀러 가도 되지?”
레토가 물으니, 카리나는 들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방을 다 소개한 베닝이 말했다.
“짐가방은 고용인들이 옮겨드릴 겁니다. 혹여 따로 필요하신 것은 있으십니까?”
“외출을 좀 하고 싶은데.”
“차를 준비해 둘까요? 아직 운전사가 밖에….”
“아니요, 저희끼리만 갈게요.”
플랜시 전 소장의 공판은 아직 나흘이나 남았다. 시간적 여유가 있기 때문에, 노아는 그 사이에 동생들과 놀아 주기로 했다.
“아스도 갈래?”
“전 좀 피곤해서요.”
동행을 거절한 아스는 대신 사진기를 건넸다. 그녀는 가족을 사랑하지만, 오랜만에 혼자 편히 쉬는 여유를 즐기는 쪽을 선택했다.
“아가씨랑 도련님 사진 많이 찍어 오세요. 필름 여분도 챙겨 가시고요.”
“아스, 올 때 뭐 사 올까?”
“가서 즐겁게 놀다 오시면 돼요. 도련님도요.”
잘 다녀오란 배웅을 받으며 저택을 나선 노아와 레토, 클라레와 카리나는 차를 타고 시내로 나왔다.
“확실히 샤프 영지랑 비교하면 도로가 한적하네.”
운전대를 잡은 레토가 수도 시내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는 마동력차가 신호에 잡혀 멈춘 사이에 뒤에 앉은 아이들에게 물었다.
“어디 가고 싶은 곳 있어?”
“어어….”
클라레가 고민했다.
“…화장실?”
쉬 마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