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1화 (121/245)

121.

“이거 엄청 맛있다! 너도 먹을래?”

“근데 아까, 형수님이 형님을 때리던데….”

“보나 마나 형부가 또 까불었겠지.”

“혀, 형님이 얼마나 점잖고 근사한데…!”

이른 간식을 먹는 중에도 저 얄미운 입술은 멈출 기미가 없었다.

소심하게 반박하는 카리나에게 노아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한쪽에선 레토가 알버스의 오해를 풀어 주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

“내가 널 믿곤 있다만, 혹시 맞고 사냐?”

“그런 거 아닙니다.”

“그러면 그쪽 취향인 게냐? 돌아올 수 없는 강으로 눈을 담가 버린 거냐! 이 할애비는 다 이해하마!”

“이해를 전혀 못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눈이 아니고 발 아닙니까?

알버스는 혹여라도 저의 소중한 큰 꼬맹이가 처댁에서 눈칫밥 먹고 사는 건 아닌지 걱정하고 있었다.

“어휴, 그런 거 아니에요.”

같이 있던 아스가 다행히 제대로 설명해 줬다.

“작은 부군 몸 보세요. 이게 어디 눈칫밥 먹은 몸인가요?”

“처형….”

레토가 배신감 어린 시선으로 아스를 바라봤다.

귀 쫑긋 세워 주변 상황을 훔쳐 듣던 노아도 절망했다.

“걱정 마요.”

고개 숙인 노아의 귀에 다정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레토가 속을 썩인 거죠? 안 봐도 알아요.”

“…….”

저도 모르게 긍정할 뻔한 노아가 황급히 말을 삼켰다. 하지만 아이트라는 노아의 속내를 눈치채고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이 상황을 아주 즐거워했다.

“레토.”

아이트라가 레토를 불렀다.

부르는 소리에 레토가 재빨리 다가갔다. 그제야 피학적 성향의 상담 치료 방법을 설명하려던 알버트의 일장연설에서 가까스로 도망칠 수 있었다.

“녀석, 아내를 괴롭히면 어떡하니.”

“죄송합니다.”

“신혼이라고 너무 어리광부리면 안 돼.”

“아, 그….”

차마 부정하지 못한 레토가 쭈뼛거리며 노아의 눈치를 살폈다. 후작님한테 우리 농담했던 거 다 말했어? 그런 눈빛이었다.

하지만 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곤란해하란 듯이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머님 말씀 들었지?”

시어머니를 제 편으로 만든 아내에겐 무서운 게 없었다.

“너 또 그러면 어머님한테 다 이른다?”

“어머, 지금 일러도 괜찮은데.”

“앞으로 제가 더 잘하겠습니다.”

레토가 황급히 사과했다. 노아와 아이트라는 눈을 마주하며 소리 없이 웃었다.

***

약간의 사소한 소동이 있었지만, 양가는 이 우연한 만남을 무척 기뻐했다.

그리고 아이트라는 자연스럽게 노아에게 합석을 제안했다.

“아이도 있으니, 조금 더 넓은 곳에서 지내는 게 편할 거예요. 아무리 급행이라고 해도 이틀이나 여기 있어야 하잖아요.”

내심 클라레의 활발한 성격과 현직 군인 뼈를 발라 먹을 정도로 엄청난 활동량을 걱정하던 노아에겐 반가운 제안이었다.

“그러면 우리도 여기서 지내는 거야?”

클라레가 노아에게 물었다.

“하긴, 나에겐 이런 곳이 어울리지.”

“…너, 뭐 돼?”

“좀 돼.”

뭔가 좀 되는 클라레는 아이트라에게 공손히 감사 인사를 드렸다.

노아는 다른 건 몰라도 제 여동생의 두꺼운 낯짝과 뻔뻔한 예의 바름은 좀 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두 가족의 합류는 무사히 진행되고, 카리나와 아스가 이를 가장 좋아했다.

“형님도 저랑 여기서 같이 지내시는 건가요?”

“그래, 꼭 같이 여행 온 거 같네.”

“나중에 수도에 도착해도 집에도 들르실 거죠?”

친구들과 헤어져서 풀이 죽었던 카리나는 레토와 만난 것만으로 기력을 다 회복해 버렸다.

어린 동생의 순수한 기쁨에 레토는 괜히 미안해졌다.

“작은 주인님, 봤어요? 특실 손님에게만 제공하는 칵테일이 있대요. 역시 사람은 돈이 있어야 뭐든 즐길 수 있다니까요!”

그리고 아스는 특실에만 제공되는 서비스에 감동하다 못해 눈시울을 뜨겁게 붉혔다.

“내가 나중에 돈 많이 벌면, 아스에게 돈을 줄 거야.”

클라레는 오늘도 효심을 불태웠다.

벨로 가족은 원래 자신들이 머무르던 객실에서 짐을 챙겨 옮겼다. 아이트라는 역무원을 불러 특실에 지낼 사람들이 늘어났으니 침구를 추가로 달라고 요청했다.

“다행이다, 너 침대 걱정했었잖아.”

노아가 레토에게만 들리게끔 소곤거렸다.

“넌 괜찮아?”

“나? 왜?”

“라디오 부부 상담에서 들었는데, 며느리는 보통 시댁이랑 만나서 얽히는 걸 탐탁지 않게 여긴다고….”

“그거랑 이건 상황이 다르잖아.”

그나저나 아직도 그걸 들어?

노아는 오히려 그 점이 더 놀라웠다.

레토는 부부 상담 방송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괜히 들었다가 클라레의 아찔한 지식 습득을 방조하게 될까 봐.

하지만 그걸 감수하면서까지 라디오를 들으며 여러 가지 상황을 공부했다고 생각하니, 노아는 괜히 가슴이 찡했다.

“…어휴, 이리 와 봐.”

노아가 두 팔을 벌리자, 레토는 넙죽 품을 파고들었다.

널따란 등을 와락 끌어안은 두 팔이 토닥토닥 움직였다. 제 노력을 칭찬해 주는 손길이 부끄러우면서도 기분 좋았던 레토가 노아의 머리에 턱을 괸 채로 배시시 웃었다.

“혹여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말해. 알았지?”

“후작님은 내게 잘해 주셔. 그리고 이번에는 우리가 오히려 도움을 받는 거잖아. 불편할 건 하나도 없어.”

오케아누스 가족이 예약한 특실은 처음 자신들이 들렀던 그 넓은 호텔 스위트룸 같은 공간만이 아니었다.

“남부에 올 때는 1등급을 한 칸 빌려서 왔는데, 올 때는 무려 특실을 두 칸이나 내주더구나.”

이곳 스위트룸 같은 칸 뒤에 침실용 칸이 따로 더 있었다. 덕분에 노아와 레토도 푹신하고 넓은 침대에서 잠을 청할 수 있게 되었다.

‘카일리코 새끼….’

이것까지 다 염두에 둔 건가?

레토는 괜히 찝찝했다.

재판 증언을 위해 수도로 올라가는 길에, 기차에서 저들을 만나는 건 단순한 우연으로 치부할 수 없었다.

알버스는 애초에 국왕의 명으로 남부에 내려와, 국왕의 명으로 다시 수도로 올라오는 것이니까.

‘하여튼 전부터 꾀 하나는 타고난 놈이었지.’

생도 시절에 락소와 그 녀석의 성격을 진지하게 논한 적이 있었다. 차기 국왕 후계자라서 다행이지, 조금이라도 수틀렸으면 반드시 사기꾼이 되었을 놈이라고.

“뭘 그리 생각해?”

한참 국왕 새끼의 팔다리를 톡톡 뜯어내는 걸 상상하던 레토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여행이 좋구나, 싶어서.”

레토는 몸을 살짝 기울여 노아의 어깨에 기대었다.

“오늘 밤에 또 다른 여행을 한 번 가 볼까?”

“…….”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방금 말한 여행은 부부의 뜨겁고 음란한….”

“아니까 조용히 해.”

말을 끊은 노아의 목소리는 새침했다.

그런 노아를 힐끔거리던 레토가 슬쩍 물었다.

“음, 하면 안 될 농담이었나?”

“언제부터 그런 걸 신경 썼다고.”

여전히 제 어깨에 기댄 레토의 등을 가볍게 도닥이던 노아는 이내 심각하게 고민했다. 침묵이 길어지자, 레토는 슬그머니 노아의 금발을 만지작거렸다.

“레토.”

노아가 물었다.

“…안 들킬 자신 있어?”

레토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너무 놀라서 활짝 펼쳐진 손가락 사이로 노아의 금발이 도망치듯 풀어졌다.

“진짜로? 진짜?”

“싫으면 말고. 난 상관없….”

“아냐, 아냐, 아냐!”

노아가 혹여 조금 전 긍정의 대답을 무를까 봐, 레토는 고개가 떨어져 나갈 것처럼 끄덕였다. 눈에 띄게 상기된 표정은 숨길 여유조차 없었다.

“진짜지? 거짓말 아니지?”

“그만 진정해.”

너무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레토를 보니, 노아는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그래서 노아는 슬쩍 그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미치겠네….”

머리 위에서 무언가를 꾹 참는 듯한 한숨 소리가 들렸다. 레토는 지금 제 모든 인내심을 끌어다 쓰는 중이었다.

“있잖아. 이제 앞으로 서로 은밀한 부부의 밤을 보낼 때면 ‘여행’을 신호로 삼는 거야?”

“너 하고픈 대로 해.”

“우리 부인께서 허락해야 하지.”

레토가 노아의 얼굴에 입술을 쪽쪽 맞추며 허락을 기다렸다.

작은 아기 새의 날갯짓처럼 간질간질한 입맞춤은 이내 성격이 조금씩 변해 갔다. 갈증에 미친 사람처럼 성급해졌고, 숨이 덩달아 가빠져 갔다.

그리고 노아가 침대 위로 쓰러지려는 순간.

“언니이이!”

문이 벌컥 열렸다.

노아는 서둘러 레토를 밀쳤다. 레토는 후다닥 벽에 붙어선 입술을 손등으로 벅벅 닦았다.

“나 언니랑 잘래! 아까 같이 자기로 했잖아아아!”

“어? 어, 그래! 같이 자기로 했지!”

“근데 둘이 왜 그러고 있어?”

클라레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언니와 형부를 번갈아 보았다.

“형부 혼냈어? 벽에 붙어서 벌 서는 거야?”

“그런 거 아니야.”

또 이상한 걸 물을라, 노아는 클라레를 끌어안고 침실 밖으로 나갔다.

“…후우.”

홀로 남은 레토는 벽에 기댄 채로 쪼르르 주저앉았다.

여행은 물 건너간 듯했다.

***

이틀간의 기차 여행은 편안하고 즐거웠다.

특히 아스가 기찻길을 가장 즐겼는데, 그녀는 자본주의의 수발을 받으며 오랜만에 자유로움을 만끽했다.

“이 맛에 사람들이 여행을 다니는 건가 봐요!”

“네가 즐거웠다니 다행이네.”

“작은 주인님의 결혼을 반대하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작은 부군과 결혼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 결혼 축하는 바라지 않았어….”

조금 떨떠름했지만, 노아는 대충 넘기기로 했다. 어찌 되었건 아스가 저리 행복해하니 그거면 되었다.

“이제 곧 수도에 도착하겠구나.”

창밖을 바라보던 알버스가 아이들에게 말했다. 클라레와 카리나는 창문에 얼굴을 붙이고 바깥을 구경했다.

“수도는 어떤 곳이에요?”

클라레가 물었다.

“아주 크고 넓단다. 그리고 왕이 사는 곳이지.”

“할머니가 그랬는데, 왕은 하는 것도 없으면서 나라의 녹만 처 받아먹는 도둑이라고….”

“아이고, 저길 봐라!”

때마침 짧은 터널을 지나 컴컴하던 창이 밝아지자, 알버스가 밖에 있는 커다란 건물 하나를 가리켰다.

“와아!”

“왕궁이다!”

클라레와 카리나가 환호했다.

“저기가 바로 왕이 사는 궁이란다.”

“오, 그걸 도둑놈의 소굴이라고 하죠?”

클라레의 똘똘함에 알버스는 눈앞이 아찔했다.

[우리 열차는 곧 수도 아들라보르 역에 도착합니다. 승객 여러분들은 내리실 때 오른쪽 문을…]

그리고, 도착을 알리는 방송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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