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열차가 출발하자, 닫힌 문 너머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렸다.
객실에 있던 승객들이 저마다 문을 열고 돌아다니는 소리였다.
“나도 나갈래!”
문에 달린 미닫이 창문으로 복도를 구경하던 클라레가 엉덩이를 들썩였다.
“열차 구경하고 올까요?”
“응! 할아버지가 기차 타면 화장실 어디에 있는지 꼭 알아 두라고 했어.”
“큰 부군은 지혜로운 분이시죠.”
아스의 손을 꼭 쥔 클라레가 노아와 레토에게 물었다.
“언니랑 형부는?”
“클라레 네가 가서 화장실이랑 식당칸 어딨는지 보고 가르쳐 줘.”
노아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하품하며 말끝을 길게 늘였다.
재판에서 증언하기 위해 본부 내 자료실에서 서류 더미에 파묻혀 지낸 탓에 아직 피곤이 가시지 않았다.
“이거 가져가세요. 카리나가 그러던데, 여기 매점에서 파는 감자 과자가 그렇게 맛있다고 하네요. 오렌지 주스도요.”
레토는 클라레에게 용돈을 쥐여 주며 말했다.
“남은 건 처제가 가져도 돼요.”
“와아! 10피나!”
“형부가 지폐를 줬네.”
노아가 부럽다고 일부러 과장되게 말했다.
용돈을 받아 기분 좋아진 클라레가 서둘러 제 가방에서 식칼토끼 지갑을 꺼냈다.
아스가 손수 만들어 준 동전 지갑인데, 목에 걸 수 있도록 끈이 달려 있었다.
클라레는 지폐를 반듯하게 접어 지갑 안에 고이 넣었다.
“형부 고맙습니다!”
레토는 인사성 바른 처제가 마냥 뿌듯했다.
반면, 돈 냄새를 맡은 두 언니가 레토를 둘러쌌다. 레토의 얼굴 위로 기다린 그림자 두 개가 겹쳤다.
“결혼했다고 난 관심도 없어? 몇 장 내놔.”
“작은 부군, 저는 뭐 굶으라는 건가요?”
“흑, 가진 게 이것뿐이라서….”
레토는 우는 소리를 내면서 노아와 아스에게도 지폐를 내밀었다. 클라레에게 준 용돈과 똑같은 액수였다.
“역시 여행이 좋긴 좋네요.”
남이 차려 준 식사가 준비되어 있고, 오랜만에 불로소득까지 챙긴 아스는 어느 때보다 들뜬 마음이었다.
“그럼 저희는 나갔다 올게요.”
“아스, 근데 아까 그건 뭐야? 형부한테 돈 뺏은 거야?”
“아니에요. 작은 부군이 절 사랑한 만큼 돈을 준 거죠.”
“잉? 형부가 아스를? 그거 불륜…!”
클라레와 아스가 열차 내부를 구경하러 나가자, 노아는 팔을 위로 쭉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피곤하지?”
한숨 자라며 레토가 제 허벅지를 툭툭 두드렸다.
노아는 거절하지 않고 머리를 눕혔다. 따뜻한 체온과 함께 느껴지는 단단한 촉감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편안한 자세를 잡은 노아의 눈에 레토의 얼굴이 들어왔다.
“있잖아.”
노아가 손을 뻗으니, 레토는 눈치껏 고개를 내렸다. 손가락에 닿은 결 좋은 은발이 사르르 빠져나가는 감촉이 간지러웠다.
나름 여행이랍시고 앞머리를 자연스럽게 내린 그의 모습은 평소보다 훨씬 어리고 천진난만했다.
“사실, 나도 좀 들떴어.”
그 말에 레토가 무슨 뜻이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남부를 벗어나는 건 나도 이번이 처음이거든.”
“아….”
뜻을 알아챈 레토가 머쓱하게 웃었다.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왕국으로 넘어온 노아에게 여행을 갈 만한 여유는 지금껏 전혀 없었다.
처음에는 제국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칩거해야 했고, 그다음엔 어린 동생을 돌보느라, 그러고 나선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곧장 군 복무를 시작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단 표정이네.”
점점 웃음을 잃어 가는 레토의 얼굴을 본 노아가 슬그머니 웃었다. 정작 노아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넌 여행 가 봤어?”
노아가 물음에 레토는 어떤 대답을 해야 할까 잠시 고민했다.
“응.”
하지만 노아의 올곧은 눈빛을 본 레토는 솔직하게 대답하기로 결정했다.
“어렸을 때, 후작님과 장군님이 자주 데려갔어.”
어린아이는 많은 걸 보고 경험해야 한다면서, 산이고 바다며 나름 유명한 곳으로 여행을 보냈었다.
“두 분 다 고생하셨지.”
“왜?”
“처음 여행 갔던 날에, 내가 기절했거든.”
처음 간 여행지는 오케아누스 별장이 있는 서부의 조용한 산이었다. 수풀이 우거지고 흙냄새가 푸근한 곳이었다.
어린 레토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흙냄새에 구역질을 해 댔다. 그러곤 비명을 지르다가 쓰러졌다.
“그날은 다시 저택으로 돌아왔지. 나는 기억이 잘 안 나는데, 며칠 꼬박 앓아누웠다나 봐.”
하지만 아픈 저를 간병하던 후작님의 모습은 어렴풋이 기억하곤 했다.
“그 뒤로는 바다나 도시 같은 곳만 다녔지. 산은 나중에 내가 좀 커서 흙을 덜 무서워할 때 갔었어.”
“여행은 재밌었어?”
노아가 레토의 볼을 어루만지며 물었다. 손바닥에 닿은 그의 뺨이 싱긋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재밌었어.”
두 번째로 갔던 여행지는 오케아누스 영지에 있는 바다였다.
어린 레토는 처음으로 낚시란 걸 해 봤다. 알버스의 도움을 받아 잡은 생선으로 저녁을 해 먹었는데, 아이트라가 맛있다고 칭찬해 줬었다.
“세상엔 이렇게 즐겁고 재미난 게 많다는 걸 처음 깨달았지.”
“나도 그랬어.”
제국에서 친부모님과 살았을 땐 노아도 여행을 종종 갔었다.
“…호수 옆에 있는 별장이었어.”
햇빛 아래 반짝이는 호수 물결을 헤치는 작은 배 위에, 세 가족이 모여 앉아 뱃놀이를 즐겼었다.
“아버지는 팔뚝을 걷어붙인 채로 노를 저으셨고, 어머니는 양산을 펼쳐서 내게 그늘을 만들어 주셨지.”
어린 노아는 자신도 노를 저어 보겠다며 고집을 부렸고, 부모님은 아이의 고집에 웃음을 터트렸었다.
“재밌었어?”
이번엔 레토가 물어봤다.
“응….”
노아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조금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살짝 잠긴 목소리가 다신 돌아오지 않을 그날의 호수처럼 잔물결 치듯 흔들렸다.
“재밌었어.”
“다행이네.”
다정한 목소리와 함께 커다란 손이 노아의 눈 위를 덮었다.
“처제도 이번 여행이 즐겁고 행복하면 좋겠다.”
“꼭 그럴 거야.”
“처형도 즐거웠으면 좋겠고, 너도 즐거워야 하고.”
“레토 너도.”
대답과 함께 상체를 일으킨 노아는 레토도 즐겁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 역시 저의 소중한 가족이고 사랑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일 때문에 가는 출장이지만, 어쨌거나 결혼하고 나서 처음 가는 여행이니까.”
“자기야, 우리 신혼여행은 없던 셈 치는 거야?”
“양심이 있으면 그걸 어떻게 여행이라고 말해.”
호텔 밖으로 나가질 않았는데.
그날을 떠올린 노아가 얼굴을 붉히며 우물거렸다. 그 모습을 아주 귀엽단 듯이 바라보는 레토의 눈동자에 장난기가 번뜩였다.
“아니지, 그것도 엄연한 여행이었어.”
“호텔에서 가구 수리비 내라고 영수증 보냈던 건 기억 안 나?”
“그만큼 격렬한 여행이었지. 둘이서 함께, 몇 번이고 갔….”
“어쩐지 요즘 잠잠하더라니!”
얼굴이 터질 것처럼 빨개진 노아가 손바닥으로 레토의 입술을 찰싹찰싹 때렸다.
“아야! 아파! 하하하!”
“으이구, 진짜! 요 방정맞은 입을 잊고 살았다니까!”
“설마 기억을 못 할 정도로 성에 차지 않았던 거야? 내가 많이 부족했었나 보네.”
진심으로 반성한 레토는 노아의 허리를 와락 잡았다. 그러곤 손끝으로 살살 간질였다.
방심했던 노아가 몸을 비틀며 레토의 품에 안겼다.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고객님.”
노아는 절 와락 끌어안는 레토를 보며 당황했다.
“미, 미쳤어? 조금 있으면 클라레랑 아스 온다고!”
“부인께서 왜 이러시지? 부부가 서로 좋으면 이렇게 꼭 껴안을 수도 있는 거지.”
“그럼 아까 최선을 다해 모시겠단 건 뭔데?”
“출장 내내 최선을 다해 보필하겠단 뜻이었지.”
무슨 뜻으로 받아들인 거야?
물어보는 레토의 표정은 순진무구했다.
“설마 여기서 거사를 치를 생각이었어?”
세상에! 레토가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놀라워했다.
“여보, 밖에 사람들 있잖아. 그리고 처제랑 처형도 언제 올 줄 모르고….”
“…….”
“하지만 네가 그렇게 원한다면, 어디 화장실이나 빈 객실이 있는지 알아보고….”
“야!”
벌떡 일어난 노아가 근처에 있던 클라레의 가방으로 레토를 마구 때렸다.
“너는! 정말! 그 주둥이를!”
“아야야! 아파!”
과자랑 장난감으로 가득한 솜인형 가방은 제법 묵직했다. 레토는 한 손으로 가볍게 매질을 막아내면서도 뻔뻔하게 아픈 척했다.
“자기야, 아파.”
“아프라고 때리는 거야!”
“나중에 호오, 해 줄 거지?”
“너 같으면 해 주겠냐!”
얄미워진 노아가 가방을 머리 위로 번쩍 든 순간.
“언니! 형부!”
닫혔던 문이 벌컥 열렸고.
“내가 방금 누구 만났게? 누구 만났게!”
촐싹거리는 클라레의 목소리와 함께, 그 누구보다도 지금 이 모습을 보아선 안 될 목소리들이 들렸다.
“이렇게 만나니 우연이네요. 수도로 여행 가는 건가요?”
“아니요, 저희는 두 분 출장 가는 길에 얹혀서 따라가는 거예요. 물론 저랑 아가씨 비용은 저희가 따로 내고요.”
“할아버지, 형님도 여기에 있는 거예요?”
“그래, 욘석아. 그러니까 기분 좀 풀….”
아스와 대화를 나누는 아이트라.
친구들과 헤어져 수도로 돌아가는 길이 슬펐던 카리나와, 그런 손주를 다독이는 알버스.
“…….”
“…….”
그리고 레토를 가방으로 때리던 노아.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마주친 양가 사람들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심지어 노아는 너무 놀라서 가방을 든 채로 굳어 버렸다.
“어? 내 가방!”
그 와중에 혼자 태연한 클라레가 객실 안으로 들어갔다.
“언니 너무해! 내가 형부 때릴 때는 내 물건으로 때리지 말라고 했잖아!”
“…….”
“형부가 또 언니한테 뭐라고 까불었어? 맞을 짓을 한 거야?”
“…….”
“설마 아까 뺏긴 돈 달래? 언니랑 아스가 형부한테 돈 뜯….”
아스는 황급히 클라레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
정말, 우연이었다.
“우리도 오늘 수도로 돌아가는 날이었거든요.”
아이트라는 아들 부부와 사돈아가씨들을 자신들의 객실로 초대했다.
말이 객실이지, 기차 칸 하나를 통째로 객실로 꾸민 특실이었다. 호텔 스위트룸과 다름없는 고급스러운 실내였다.
“카리나랑 같이 매점에 갔는데, 거기서 사돈아가씨들을 만났죠. 처음 봤을 땐 보고도 믿기지 않았답니다.”
“그러셨군요….”
“그래서 레토랑 노아 양에게 인사하려고 찾아왔던 거예요.”
“보기 흉한 모습을 보여서 죄송합니다.”
노아는 진심으로 사과했다.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시어머니 앞에서 아들내미에게 폭행을 가하는 모습을 보였으니 말이다.
‘하필 그때 문이 열리다니.’
노아는 원망스러운 시선으로 여동생을 바라봤다.
속 타는 언니 마음도 모르는 채, 클라레는 카리나와 함께 매점에서 산 감자 과자와 오렌지 주스를 나눠 먹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