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9화 (119/245)

119.

사령부 건물에 도착한 풀루스 대위는 곧장 사령관실로 향했다.

문을 열기 전, 그는 복도 벽에 걸린 낡고 네모난 거울 앞에 서서 제 옷차림을 한 번 점검했다.

어디 하나 지적할 곳 없었지만, 그는 끝내 제 상의 끝에 생긴 주름을 찾아내 탈탈 털어 펼쳤다.

“소장님.”

잠시 후 안에서 들어오란 말이 들렸다.

안으로 들어가자, 알싸한 연초 냄새가 가득했다. 목이 타는 듯한 자극적인 향에 기침이 절로 나올 뻔했지만, 풀루스 대위는 내색하지 않고 견뎠다.

“미안하군. 창문 좀 열까?”

“괜찮습니다.”

“오느라 고생했어.”

창문을 활짝 열자 시원한 바람이 방 안을 환기했다. 풀루스 대위도 한결 숨을 쉬기 편안해졌다.

“대위.”

등을 지고 서 있던 디모네 닉스 소장이 몸을 돌렸다.

빛이 들어오는 창문을 등진 닉스 소장은 상당한 미남이었다.

가르마를 기준으로 깔끔하게 넘긴 남색 머리는 그 나이대에 흔히 있는 새치 하나 없었다. 염색을 꾸준히 하는 것처럼 보였다.

얼굴에 난 주름까지는 어쩌지 못했으나, 닉스 소장의 웃는 인상과 잘 어울려, 오히려 중후한 멋을 자아냈다.

다만.

“보고서에 서명이 빠졌더군.”

“죄송합니다.”

“요즘 실수가 잦은 거 같아. 바쁜 건 알지만 조심하게.”

그의 얼굴에 그려진 웃음은 어딘가 섬뜩했다. 웃고는 있지만, 그 안은 마치 시커먼 수렁처럼 속내를 알 수 없었다.

닉스 소장은 보고서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뒀다.

풀루스 대위는 보고서 빈 곳에 자신의 이름을 적고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보고서 위에는 조금 전 감시초소에서 숨겨 온 전보가 놓여 있었다.

닉스 소장은 전보를 집어 들었다.

“…….”

전보에는 어느 유명한 사건의 1차 공판 날짜가 적혀 있었다.

“나도 참….”

전보를 다 읽은 닉스 소장은 재떨이에 전보를 넣었다. 재떨이에 남아 있던 시가 잔불이 종이에 옮겨붙으면서 순식간에 불타더니 이윽고 재가 되었다.

전보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너무 자만했던 것 같군.”

닉스 소장은 진심으로 반성했다.

젊은 시절에는 자신이 세상의 중심인 줄 알았다. 솔직히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없었다.

자신이 하는 일에 걸림돌 따윈 없고, 모든 것을 이용하고 조종할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세상은 녹록지 않았다.

자신의 계획은 이제껏 전부 뒤틀렸다. 예상했던 만큼의 결과조차 얻지 못했고, 심지어 그런 저를 비웃기라도 하려는 듯, 조금씩 압박까지 해 오고 있다.

“이러다 한 방 먹겠어.”

닉스 소장이 가장 방심했던 건 젊은 국왕이었다.

왕태자 시절부터 예의주시하긴 했다. 멍청하고 얼빠진 선왕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능력 있는 인재이기도 했고.

그래 봤자 제 손바닥 안이라고 생각했는데.

‘국왕은 어디까지 아는 걸까.’

아니, 이미 다 알고 있겠지.

닉스 소장은 딱히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억울해하거나 부정하지 않았다. 만약 과거로 되돌아간다고 해도 자신은 또 같은 짓을 저지를 테니까.

대신에 이번보다 훨씬 치밀하고 조심스럽게 행동할 거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그는 과오를 찾기 위해 과거를 조금씩 되짚어 갔다.

아들라보르 역공전이 너무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점일까?

그것도 아니면 연합국의 침략에서부터 문제가 있었을까.

‘아니면….’ 

결혼에 실패하고 이혼하면서 명예를 실추했던 것일까?

그 때문에 자신은 아직도 소장 자리에 머무르고 있었다. 최연소 육군 대장이 되고자 했던 저의 계획은 여기서 크게 무너졌었다.

실패해 버린 진급.

죽은 내연녀.

그리고 사라진 사생아.

“…….”

거기서 생각을 멈춰 버린 닉스 소장이 풀루스 대위를 바라봤다.

풀루스 대위는 여전히 차렷 자세로 입을 다문 채 서 있었다.

“넌 나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는데.”

앞으로 나온 닉스 소장이 풀루스 대위 앞에 섰다. 그는 손을 뻗어 대위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날 참 많이 닮았구나.”

조금의 흠칫거림도 없이, 풀루스 대위는 저를 어루만지는 소장의 손길을 묵묵히 받았다.

“그래서 가끔 상상하곤 한단다.”

사라진 사생아가 훌쩍 자랐다면, 너 정도 되지 않았을까.

그리고 나를 위해 열심히 일하지 않을까.

제 핏줄에 대한 그리움은 아니었다. 애초에 닉스 소장에겐 그런 건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저 제 뜻대로 이용할 수 있는 장기 말을 잃어버린 것이 조금 아까울 뿐이었다.

“난 널 내 아들처럼 생각한다.”

닉스 소장이 다정히 속삭였다.

“그러니 앞으로도 열심히 해 다오.”

***

“수도 간다, 헤이! 수도 간다, 호!”

클라레의 즉흥 노래는 아침 댓바람부터 우렁찼다.

어린아이의 씩씩하고 쾌활한 목소리가 참으로 듣기 좋았지만….

“이상하게! 생각해도! 어쩔 수 없지, 수도 가니까!”

문제는 노래를 부르는 무대가 길거리란 점이었다.

하필 출근하느라 분주한 아침 시간대라서 사람들도 많았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클라레의 노래에 킥킥 웃음을 터트리거나 놀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봤다.

“내 마음은 흔들흔들! 놓치기 싫…!”

“길거리에서 노래 좀 부르지 마.”

창피해진 노아가 기어코 한마디 했다.

어지간하면 그냥 무시하고 내버려 두려고 했지만, 노래 부르면서 흥이 돋았는지 본격적으로 춤을 추는 것까진 두고 볼 수 없었다.

“에이, 지금이 딱 최고로 즐거운 구간인데!”

팔 뻗고 엉덩이를 흔들기 직전이었던 클라레가 입술을 뾰로통 내밀었다.

“언니 때문에 흥이 다 깨졌잖아. 책임져!”

“난 너 때문에 창피하니까 책임져.”

“그치만 아스는 사진 찍는걸?”

내 노래가 멋져서 그런 거잖아!

클라레가 가리킨 곳엔, 어느새 앞서간 아스가 사진기로 클라레의 모습을 찰칵찰칵 찍고 있었다.

“그래도 우리 처제는 노래를 참 잘 부르네요.”

나름 노래를 즐겁게 감상하고 있던 레토가 칭찬했다. 그의 팔에는 원래 클라레가 메고 있었던 가방이 들려 있었다. 클라레가 무겁다고 레토에게 넘겨 버린 것이었다.

“형부는 역시 뭘 좀 안단 말이지!”

“뭘 좀 아니까 노아와 결혼한 거죠.”

“그렇다기보단, 형부는 울 언니 아니면 사람 구실도 못 하니까 결혼한 거 아냐? 아스가 그러던데?”

“…….”

정곡을 찔린 레토는 슬픈 표정으로 노아를 바라봤다.

“날 사람으로 만들어 줘서 고마워.”

“알고는 있어서 다행이네.”

노아가 이리 와 보라며 손짓했다. 그리고 다가온 레토의 얼굴에 입술을 쪽쪽 맞췄다. 조금 전 봤던 그의 울상이 조금 귀여워서 뽀뽀가 하고 싶어졌다.

“…길거리에서 주둥이 박치기하는 건 안 창피하고?”

클라레가 노아와 레토를 불만스럽게 노려봤다.

“이게 바로 내가 하면 불륜이고, 남이 하면 낭만이란 거구나.”

“아가씨, 거꾸로 말했어요.”

사진을 다 찍은 아스가 다가오며 말했다.

시내로 나온 네 사람은 곧 기차역에 도착했다. 남부의 종착역인 샤프 역은 이미 많은 인파로 북적거렸다.

“와….”

역 안으로 들어선 클라레가 움찔거렸다. 기차역 밖은 몇 번인가 본 적 있지만, 안에는 처음 와 봤다.

모르는 어른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과 머리가 울릴 정도로 웅성거리는 소음이 낯설고 무서웠다.

그런 동생의 변화를 눈치챈 노아가 클라레를 아예 품에 안았다. 노아가 들고 있던 가방은 레토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었다.

“기차에 타면 조금 편안해질 거예요.”

레토가 클라레의 잔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며 말했다. 노아의 어깨에 얼굴을 숨기고 있던 클라레가 눈만 빼꼼 내밀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 많은 곳을 힘들어하나?”

레토가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그것보다는 이유 없는 웅성거림이 불편한 거지.”

노아가 클라레의 등을 쓸어 주며 대답했다.

“작은 부군, 몇 번 승강장이죠?”

“5번 승강장입니다. 저쪽에 내려가는 계단이 있네요.”

북적이는 인파를 헤치고 5번 승강장으로 내려가니, 때마침 열차가 승강장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와아!”

새하얀 증기를 내뿜으며 들어오는 거대한 철마의 모습에, 클라레가 입을 쩍 벌렸다.

승강장으로 들어오는 기차는 귀가 찢어질 정도로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하하하!”

냉큼 두 손으로 귀를 막은 클라레가 꺄르르 웃었다.

“언니 잔소리보다 더 시끄러워!”

“비교를 해도 꼭….”

노아는 품속의 얄미운 여동생을 살짝 고쳐 안았다.

열차가 완전히 멈추자, 각 칸에서 내린 역무원들이 승객들의 표를 확인했다.

“내가 할래, 내가 할래!”

“저기 역무원 아저씨한테 주면 돼요.”

레토는 클라레에게 표를 건네줬다.

클라레는 긴장된 표정으로 역무원에게 표를 내밀었다.

“수도에 갈 거예요. 저랑, 언니랑, 아스랑, 형부랑!”

“예, 표 확인했습니다.”

“아저씨, 수도는 어떤 곳이에요?”

“아주 크고 멋진 곳이랍니다. 거기엔 없는 게 없죠.”

“그치만 바로 나, 클라레 벨로는 없지롱!”

“어휴, 얘가 진짜!”

창피해진 노아는 다시 클라레를 들쳐 업고 열차에 올랐다. 등 뒤에서 들리는 역무원의 웃음소리는 결코 환청이 아니었다.

“우리는 여기야.”

레토가 표에 적힌 칸 호수를 확인했다. 2등석 침대칸이었다.

내부는 평범했다. 간이침대가 위아래로 양쪽에 총 4개씩 있고, 벽에 난 창문 아래에 간이 테이블이 설치되어 있었다.

“와아!”

안으로 들어간 클라레가 창가에 앉았다.

“우리 집 화장실보다 작다, 그치?”

“너, 그 소리 밖에 나가서 하면 절대 안 된다?”

노아는 혹여 클라레가 밖에서 말실수라도 할까, 몇 번이고 당부했다.

애가 오늘 너무 들떠서 그런지 평소보다 기운이 넘쳐 조금 걱정이었다.

“주무실 수 있겠어요?”

침대들을 살핀 아스가 레토에게 물었다.

“…뭐, 이틀만 참으면 되니까요.”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레토도 이 좁은 침대에 제 몸뚱아리를 구겨 넣을 생각에 막막했다.

그래도 전쟁 때와 비교하면 여긴 천국이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위에서 잘래!”

“떨어지니까 밑에서 자.”

“그럼 언니가 내 옆에서 자라, 응?”

잠시 후 열차가 출발했다.

[수도로 향하는 우리 열차는 이틀간 계속 달릴 예정이오나, 긴급한 정비가 필요한 상황엔 임시 정차가…]

안내 방송과 함께, 각 칸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급행열차는 식당칸이 있네요. 여기서 마실 거나 과자 같은 걸 판대요.”

테이블 위에 있던 안내문을 읽던 아스가 감격했다.

“남이 차려 주는 식사라니…!”

“앞으로 아스를 많이 도와주자, 응?”

클라레가 진지하게 당부했다. 노아와 레토 역시 고개를 끄덕거리며 아스를 앞으로 더욱 많이 도와줄 것을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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