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8화 (118/245)

118.

노아는 수도로 가는 이유를 설명해 줬다.

해군 소장 이적 사건의 첫 번째 공판이 일주일 뒤에 열리는데, 그곳에 레토와 함께 증인으로 나설 예정이라고.

“…….”

설명을 들은 아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혹시 그거….”

아스가 입을 떼는 순간.

“언니! 언니!”

방으로 올라갔던 클라레가 다시 뛰어 내려왔다. 무어라 말하려던 아스는 다시금 입을 다물었다.

“세상에, 아가씨!”

왜냐하면.

“나 준비 다 했어!”

수도로 놀러 갈 준비를 마치고 내려온 클라레의 위풍당당한 모습에 말을 잃었기 때문이다.

“너 꼴이 이게 뭐야!”

“푸하하하!”

마찬가지로 놀란 노아는 클라레의 몰골에 입을 쩍 벌렸고, 레토는 배꼽을 잡고 소파에 드러누웠다.

정작 클라레는 제 차림을 아주 만족스러워했다.

“어때? 근사하지?”

클라레는 챙이 넓은 밀짚모자를 머리에 쓰고, 화려한 분홍색 테가 매력적인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선글라스에는 식칼토끼 장식이 붙어 있었다.

목에는 알록달록한 구슬 목걸이를 찼고, 손가락에는 큼지막한 다이아 모양 장난감 반지를 꼈다.

그리고 등 뒤로 가장 아끼는 식칼토끼 가방을 메고 있었다.

“우리 처제는 역시 멋을 안다니까.”

레토는 실컷 웃은 뒤에야 클라레의 차림을 칭찬했다.

“형부 좀 아는구나? 이게 바로 세련된 아름다움이란 거야.”

“어쩐지 아까 내려오는데 눈이 부시더라니. 갑자기 정전이 나도 빛을 뿜는 처제의 눈부신 미모 때문에 어둡지도 않겠어요.”

“에이, 뭘 그렇게까지 말해!”

칭찬 듣고 기분이 좋아진 클라레가 몸을 비비 꼬았다. 그 틈에 아스는 서둘러 사진기를 챙겨와 클라레를 찍었다.

“이거 내 거 아냐?”

노아는 어쩐지 낯익은 밀짚모자를 발견했다.

“그새 또 내 방에 가서 가져왔어?”

“언니보다는 나에게 더 어울리지 않을까?”

“그래, 너 실컷 써라….”

어차피 작년 여름에 휴양지에서 산 싸구려 밀짚모자였다.

“노아.”

밀짚모자를 알아본 건 노아만이 아니었다.

“저거, 작년에 내가 사 준 거 아니야?”

레토가 노아에게 물었다. 작년 여름에 휴양지에서 데이트할 때, 햇빛으로 고생하던 노아를 위해 노점에서 급하게 샀던 걸 기억해 냈다.

“처제가 저 모자를 쓰는 걸 보니 감회가 새롭네.”

“난 그때만 생각하면 허파가 뒤집히는데.”

“에이, 뜨겁고 좋았잖아. 그렇게 사랑이 피어나서 이렇게 결혼한 건데.”

“더우니까 치근덕거리지 마.”

제 옆에 찰싹 달라붙어 칭얼거리는 레토를 무시한 채, 노아는 클라레가 멨던 가방 속을 살폈다.

보자마자 웃음이 튀어 나왔다.

안에는 평소 클라레가 잘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 대부분이었다. 그 와중에 방학 숙제도 잊지 않고 챙겼다는 게 참 대견했다.

“방학이라고 마냥 노는 건 좀 아니잖아.”

조금 전에 생활 계획표에 ‘계획 없음’이라고 적었던 것과 상반되는 발언이었다.

“내 할 일은 하고 놀아야 해. 그래야 나중에 무슨 사고를 쳐서 혼나더라도 정상참작이 가능하다고 할머니가 그랬어.”

“이게 애 입에서 나올 소리라고 생각해?”

레토가 사뭇 심각한 어조로 노아에게 물었다.

“자신의 일을 스스로 하는 건 대견한 일이지.”

“애 입에서 정상참작이란 단어가 나오는 게 문제라는 거야.”

레토 혼자 진지하게 걱정하는 동안, 클라레는 수도에서 뭘 하고 놀고 싶은지 재잘재잘 떠들었다.

“왕궁에 가 보고 싶어. 그리고 엄청 큰 식물원에도!”

“알았으니까 어서 자러 가.”

“잠이 오게 생겼어? 수도에 가는데!”

클라레의 마음은 벌써 수도에 가 버린 상태였다. 아이는 어서 빨리 이틀 뒤가 왔으면 좋겠다며 발을 동동 굴렀다.

“너무 기대돼서 잠이 안 와!”

하지만 클라레는 침대에 눕자마자 곯아떨어졌다.

수도에 갈 때 가지고 갈 가방을 품에 꼭 안은 채, 클라레는 수도로 떠나는 기찻길에 오르는 꿈을 꿨다.

“잘 땐 정말 천사라니까….”

“가방 안고 자는 거 봐요! 우리 아가씨는 정말 귀엽다니까요!”

“어휴, 저거 입술 오물거리는 거 봐.”

“처형, 어서 사진 좀 찍어…, 이미 찍고 계시는군요.”

어른들은 잠든 클라레를 한참 찍고 구경한 뒤에야 방에서 나왔다.

“그럼 우리도 이르지만 자러 갈까.”

“그나저나 할머니하고 할아버지가 아직도 안 오시네.”

“요즘 야근이 많으시네. 안보국 때문인가.”

“저기.”

아스가 침실로 향하려던 노아와 레토를 붙잡았다.

“…….”

하지만 정작 아스의 입에선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노아와 레토가 왜 그러냐고 물었지만, 아스는 결국 아무것도 아니라며 싱긋 웃었다.

“뭘 물어보려고 했는데, 까먹었어요.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나 봐요.”

“아스.”

“그간 피곤하셨을 텐데 어서들 주무세요.”

잘 자란 인사를 끝으로, 아스는 1층으로 내려갔다.

아스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서서 지켜보던 노아와 레토는 서로를 잠깐 바라보더니, 서둘러 침실로 들어갔다.

“…눈치챈 거 맞지?”

문이 닫히자마자, 레토가 노아에게 물었다.

노아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노아는 확실하게 봤다. 아까 무언가를 물으려고 했던 아스가 치마에 손을 얹는 것을.

그건 평소 아스가 위험한 생각을 할 때 종종 보이는 버릇이었다.

안에 숨겨 둔 암기를 꺼낼 때마다 하던 행동이 습관이 된 거다.

“하긴, 어제 좀 섬뜩하긴 하셨지.”

레토는 어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국왕의 연설을 묵묵히 듣던 아스를 떠올렸다.

테네브레를 해체한 뒤에 안보국에 편입시키겠단 개혁안을 묵묵히 듣던 옆모습은 모골을 송연케 하는 공포심을 자극했다.

분명 그때, 아티를 떠올렸던 게 틀림없었다.

“두 사람이 다시 맺어질 가능성은 아예 없는 걸까?”

“아스한테 직접 물어봐.”

“그날이 내 사망일이 되겠군.”

그래도 레토는 아티를 아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같은 남자라서 이입이 되는 것도 있지만, 저 역시 제 이기적인 판단으로 연인에게 상처를 줬던 과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내가 좀 더 낫지.’

적어도 자신은 사과하고 용서를 구했으니까.

레토는 자신에게 판정승을 내렸다.

“그런데 정말 어떻게 되는 거지?”

노아는 내심 앞으로 펼쳐질 일들이 궁금해졌다.

“테네브레가 안보국에 편입되는 거면, 오빠도 일단 안보국 직원이 되는 건데.”

“괜찮지 않나? 안보국이면 철밥통이잖아.”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잘릴 일도 없는, 정년퇴직이 보장된 안정된 직장이었다. 그리고 안보국이라는 환경에서 해낼 특수한 임무를 고려하면 봉급도 어지간한 수준이 아닐 거다.

“어차피 아드벨로 차기 가주는 처제로 결정난 상태고 말야.”

아직 어린 꼬마라서 두각을 나타내지 않을 뿐, 클라레는 피에타 가문 출신답게 상당한 마력량을 지니고 있었다.

피는 통하지 않을지언정, 아드벨로 가문은 이미 그 아이를 차기 후계자이자 차기 마탑주로 결정해 놓은 상태였다.

“뭐, 그거랑 상관없이….”

노아는 조금 떨떠름했다.

“들어가도 바로 나올 거 같단 말이지.”

그 망할 오빠가 누군가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묵묵히 일을 하는 모습이 제대로 상상되지 않았다.

아티는 제 이름처럼 바람 같은 사람이다. 저 내키는 대로, 하고픈 대로 자유롭게 살아가는 게 아티의 성향이었다.

어떤 의미론 아드벨로다운 사람이었다.

“…일단 자자.”

더 생각하려니 머리가 아프려고 했다. 아스가 했던 말마따나 안보국 때문에 너무 피곤했다.

침대에 누운 부부는 서로에게 다정한 인사를 나눴다.

“잘 자. 좋은 꿈 꾸고.”

침대에 먼저 누운 노아가 불을 끄고 돌아오는 레토에게 입을 맞췄다. 옆에 자리를 잡은 레토가 노아의 이마에 입술을 쪽 맞추며 기쁘게 웃었다.

“곧 꿈에서 만나.”

“넌 그런 말 하면 안 부끄럽니?”

듣는 저가 더 창피하다며 투덜거리는 노아의 귀가 새빨갰다.

그래도 꿈에서 만나자고 하니까, 서둘러 눈을 감고 이불도 목 위까지 푹 덮었다.

“…….”

그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본 레토는 소리 죽인 채로 어깨를 들썩거렸다.

***

만년설을 등에 업은 북부 국경선 사이사이마다 무장 군인들이 삼엄한 표정으로 순찰 중이었다.

위아래로 각각 길이 3m의 날카롭고 단단한 철조망 너머를 예의주시하고, 이따금 땅 위에 이상한 흔적이 없는지 세심하게 살폈다.

북부의 여름은 다른 지역과 비교하면 선선한 날씨지만, 꼼꼼하게 무장한 군인에겐 버거운 계절이었다.

그래도 그들은 흐르는 땀방울을 닦을 여유조차 부리지도 않았다. 그저 묵묵히, 자신들의 임무만을 수행할 뿐이었다.

이들은 국경선을 수호하는 육군 정예부대 중 하나인 국경 경비 부대였다.

작년 가을, 원인불명의 폭발 사고를 당했던 피해 군인들이 바로 이곳 출신이었다.

철조망 옆에는 높이 솟은 감시초소가 있었다.

그 위에선 통신병들과 감시병들이 조금 더 높은 시야에서 주위를 살피고, 근처에 있는 소초의 명령을 즉시 받았다.

“…….”

그중 어느 한 감시초소에서.

이름 모를 통신병이 어딘가에서 보내 오는 전보를 받는 중이었다.

그는 종이에 찍히는 의미 모를 암호문을 지켜보는 순간에도 모든 신경을 문 쪽으로 쏟고 있었다.

만에 하나 누군가가 올 것을 대비해서.

“…….”

그러나 다행히 아무도 이곳에 오지 않았다.

완성된 전보는 잉크가 마르도록 잠시 내버려 둔 뒤, 곱게 네 번을 접고, 거기에서 또 한 번을 더 접은 뒤에 군복 안쪽에 천을 덧대어 만든 주머니에 숨겼다.

“풀루스 대위님.”

옷차림을 확인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을 즈음. 누군가가 밖에서 문을 똑똑 두드렸다.

“교대하러 왔습니다.”

“암호는?”

“눈족제비.”

“기다란 꼬리.”

암호를 확인한 뒤, 풀루스 대위라 불렸던 남자는 정찰 업무를 교대했다.

“참, 대위님.”

나가려던 풀루스 대위를 붙잡은 부관이 말했다.

“닉스 소장님이 찾으셨습니다. 어제 제출하셨던 정찰 일지에 서명을 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알았다, 전해 줘서 고마워.”

“조심히 가십시오.”

감시초소에서 내려온 풀루스 대위는 곧장 소초로 향했다. 그리고 군용차를 몰아 어디론가 향했다.

그가 도착한 곳은 경계선 근처에 있는 조그마한 건물이었다.

입구의 대문 옆 기둥에는 ‘육군 국경 작전사령부 본부’라고 적힌 팻말이 조그맣게 붙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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