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설명하는 아드벨로 대장의 표정은 점점 일그러져 갔다.
“…아, 다시 생각해도 어이없네.”
어린 국왕 따위가 감히 저와 해군을 장기 말처럼 이용했단 사실이 너무 어이없고 자존심 상했다.
마치 길을 걷다가 누군가가 씹던 껌을 밟아 버려서 그걸 종이로 감싸 쓰레기통에 대신 버려 주는 기분이었다.
하나 자신의 감정과는 별개로, 국왕의 선택은 인정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제안을 수락했다.
“언제 출발하면 됩니까?”
노아가 물었다.
“첫 번째 공판은 1주일 뒤니까….”
수도 법원에서 열릴 예정인 1차 공판의 주요 쟁점 사건은 해군 소장 이적 사건이었다.
“출발은….”
책상 위 탁상달력을 살피던 아드벨로 대장이 어느 날짜 칸 위에 손가락을 멈췄다.
“이틀 뒤가 좋겠군.”
너무 빠른데.
레토는 급하게 잡힌 출장이 당혹스러웠지만, 구태여 티를 내지 않았다. 노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노아는 저 없는 동안 특함 대원들에게 넘길 제 서류 작업들과 당직 순서 교체까지 빠르게 머릿속으로 정리 중이었다.
“…클라레가 자기도 데려가 달라고 삐지겠습니다.”
노아의 속삭임에 레토는 상상해 봤다. 저만 두고 놀러 간다고 투정 부리는 클라레가 눈에 선했다.
“가방 안에 넣고 갈래?”
“걘 진짜로 들어갈 겁니다.”
마찬가지로 상상해 버린 노아가 입꼬리를 느슨하게 올렸다.
“뭔 소리야?”
그때, 아드벨로 대장이 말했다.
“클라레랑 아스도 데려가야지.”
이번 출장은 특이하게도 가족 동반이 가능했다.
“클라레가 내일부터 방학이잖아.”
아드벨로 대장은 막내 손녀를 진심으로 사랑했지만, 여름보다 뜨거운 피를 지닌 혈기왕성 꼬맹이를 여름 내내 집안에 둘 생각은 없었다.
“방학 숙제로 현장학습도 할 겸 데려가.”
***
“여러분, 방학 동안 건강하게 지내요.”
개학식 때 만나요!
어느 때보다 행복하고 기분 좋은 선생님들의 배웅을 받으며, 마레이 학교 학생들은 즐거운 여름방학을 맞이했다.
“아스! 아스!”
클라레는 교문 밖에서 기다리던 아스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세워 둔 자전거 옆에서 친하게 지내는 학부모들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던 아스가 고개를 돌렸다.
“세상에, 등에 그게 뭐예요.”
아스는 클라레의 가방을 보자마자 깜짝 놀랐다.
클라레의 가방은 터질 것처럼 가득 채워져 있었다. 부푼 가방 크기는 클라레의 몸만 했다.
정작 클라레는 무겁지도 않은지 마냥 해맑았다.
“헤헤, 교실에 있던 짐 챙겨 왔어!”
“안 무거우세요?”
“이까짓 게 날 막진 못하지!”
“어휴, 이러다 어깨 상해요.”
서둘러 가방을 받은 아스가 이를 자전거 바구니에 넣었다. 묵직한 무게에 자전거가 앞으로 휘청거렸다.
“있지, 오늘부터 방학이다?”
“아침에도 말씀하셨고, 어제도 말씀하셨잖아요.”
“무려 두 달이나 쉬어!”
클라레는 손가락 두 개를 활짝 펼쳤다. 방학의 위대함을 어떻게든 설명하고 싶었다.
“어떻게 두 달 동안 학교를 안 갈 수 있지? 내 평생 이렇게 오래 노는 건 처음이야!”
“…….”
천진난만한 감탄에 아스는 웃음이 터질 뻔했다.
“혹시 학교에 돈이 없나?”
그래서 우리보고 오지 말라는 건가?
대뜸 이상한 쪽으로 생각이 뻗친 클라레가 퍽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아스는 클라레를 자전거 뒤에 태우며 물었다.
“그럼 아가씨께서 돈을 좀 보태 주시려고요?”
“그 정도로 학교를 사랑하진 않아.”
“아가씨는 냉철하고 침착하시네요.”
“나는 학교 다니는 언니잖아. 젖병 빠는 아기와 다르다고!”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 클라레는 교복을 벗고 활동하기 좋은 옷으로 갈아입었다.
“아스, 우리는 어디 놀러 안 가?”
옆에서 클라레의 책가방을 정리하던 아스가 고개를 들었다.
“그 전에 짐 정리부터 해야겠죠?”
“이잉, 놀다 와서 하면 안 돼?”
“안 돼요.”
“피이.”
클라레가 입술을 삐죽였다. 그래도 아스 말대로 가지고 온 짐들을 꺼내어 정리했다.
다 쓴 교과서는 책장에 꽂아 두고, 음악 수업 때 쓰는 조그만 타악기는 서랍에 넣어 뒀다. 물감 도구는 아스가 대신 씻어 주기로 했다.
“이거, 방학 안내문.”
클라레는 알림장에 꽂아 둔 안내문을 아스에게 줬다.
“방학 첫날에 생활 계획표를 그리라고 적혀 있네요?”
“할머니가 그랬는데, 계획은 지키지 않기 위해 세우는 거래.”
짐 정리를 다 마친 클라레는 친구들과 놀다 오겠다며 집 아래 공원으로 내려갔다.
“나중에 친구분들하고 간식 먹으러 오세요!”
아스의 배웅을 받으며 공원으로 간 클라레는 먼저 온 친구들과 인사를 나눴다.
“보르! 리리!”
“내가 1등이고 리리가 2등이야!”
“클라레는 3등이네?”
뒤이어 세레니와 센샤가 도착했고, 가장 마지막에 온 건 카리나였다. 카리나는 무려 검은색 마동력차를 타고 왔다.
차를 몰고 온 사람은 알버스였다.
“어, 사자 할아버지다!”
“유괴범인 줄 알았던 백사자 할아버지다!”
“사돈 어르신!”
아이들은 알버스를 알아보곤 쪼르르 달려갔다.
유괴범인 줄 알았던 할아버지가 사실은 착하고 좋은 사람이었단 걸 알게 된 뒤, 아이들과 알버스는 사이좋은 친구가 되었다.
“이 더운 날에도 씩씩하니 보기 좋구나.”
알버스는 제 팔다리에 매달리는 꼬마들을 보며 껄껄 웃었다.
“있잖아요, 우리 방학이에요!”
어느새 알버스의 등에 업힌 클라레가 말했다.
“아이고, 좋겠구나. 너희는 방학도 있고.”
“할아버지는 방학 없어요?”
“할아버지는 일 안 하잖아요.”
“만날 노는데 왜 방학이 필요해요?”
“할아버지도 일해요?”
부럽다는 알버스의 한 마디에 아이들이 뼈 아픈 질문을 던졌다.
알버스는 천진난만함이란 이따금 흉기보다 잔인하단 사실을 새삼스레 깨우쳤다.
“아니야, 우리 할아버지도 일해.”
그나마 카리나가 편을 들어줬다.
“엄청 중요한 일 해.”
“무슨 일?”
“나라를 지키는 일이야.”
“그치만 사돈어르신은 지금 우리랑 같이 있잖아.”
클라레가 진짜 나라를 지키는 제 가족들을 떠올렸다.
“울 언니랑 형부랑, 할머니랑 할아버지는 지금 해군에서 일하고 있는걸?”
“우리 할아버지는 수도에서 일해.”
“지금은 휴가 때문에 잠시 남부에 내려온 거란다.”
알버스가 말했다.
“그리고 이제 휴가가 끝났으니, 곧 수도로 올라갈 거란다.”
그 말에 카리나의 눈이 흔들거렸다.
“…어? 어어?”
당황한 카리나가 알버스를 올려다봤다.
“할아버지, 저희 수도에 돌아가요?”
“그럼 가야지. 이제 할아버지 휴가가 다 끝났거든.”
“그, 그러면 저 학교는요?”
“다시 수도에서 가정교사들에게….”
남부에 오기 전처럼 돌아간다는 말을 하려던 알버스가 멈칫했다.
그는 어린 손자가 고개를 떨군 채 눈물을 뚝뚝 흘리는 걸 알아챘다. 흙바닥 위로 떨어진 눈물방울이 애달팠다.
“사돈어르신이 카리나 울렸어!”
클라레가 손가락으로 알버스를 가리켰다. 옆에 있던 세레니가 어른에게 손가락질은 좋지 않다고 말했다.
그래서 클라레는 손가락 다섯 개를 전부 펼쳤다.
***
그날 저녁.
“그러고 보니 이제 수도로 돌아가시겠네.”
클라레에게서 공원에서 있었던 일을 전해 들은 레토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카리나가 여기서 잘 지냈나 봐.”
“카리나는 우리 비밀 조직의 일원이에요. 내 따까리지.”
“그런 표현 쓰지 마.”
노아가 클라레의 머리를 가볍게 두드리며 경고했다.
“이잉!”
언니의 잔소리가 귀찮아진 클라레가 냉큼 레토의 옆으로 도망쳤다.
레토는 제 옆에 앉은 클라레의 헝클어진 머리를 손가락 빗질로 정리해 줬다.
“형부, 그럼 이제 카리나는 우리랑 못 놀아요?”
“그러면 섭섭할 거 같아요?”
“응….”
클라레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카리나는 단순한 사돈총각이 아니었다. 클라레에게 아주 소중한 친구가 되었다. 그건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알버스의 말에 놀란 아이들은 우는 카리나를 다독이다가 같이 울어 버렸고, 결국 공원에서 제대로 놀지도 못한 채 간식만 먹고 헤어졌다.
“다들 울면서 들어오는데, 얼마나 놀랐다고요.”
씻고 나온 아스가 소파에 앉았다. 아스는 눈물범벅으로 돌아온 아이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런 와중에도 간식을 남기지 않고 다 먹은 것도 놀라웠다. 물론 그 순간은 사진기로 담아 뒀다.
“사돈총각이 계속 여기서 학교를 다니지는 못할까?”
노아가 레토에게 물었다.
“음, 그건 후작님이 결정할 문제지.”
일단 아이트라와 알버스 둘 다 수도를 근거지로 두고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아이트라가 소장으로 있는 연구소가 수도에 있고, 알버스는 국방부 장관이라 수도에서 대기해야 했다.
“게다가 카리나는 차기 오케아누스 후계니까.”
귀족 후계자들이 으레 거치는 명문 교육과정을 거쳐야 하니, 수도에 있는 게 훨씬 이득이었다.
“넌 어떻게 생각해?”
노아의 물음에 레토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하고 대견하지.”
“차기 오케아누스 후계지만, 그것 때문에 친구들과 헤어지는 건 조금 안타깝네.”
노아의 시선은 레토 옆에 있던 클라레를 향했다.
그새 어른들 이야기가 재미없어진 아이는 테이블 아래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 생활 계획표를 그리는 중이었다.
새하얀 도화지 위에 ‘계획 없음’이란 글자만 큼지막했다.
“…성의껏 좀 그려라.”
보다 못한 노아가 한마디 했다.
“계획 따위는 날 막지 못해! 난 방학 때 불싸지를 거야.”
“이러니 할머니가 널 수도로 보내려는 건가 보다….”
아무리 사랑해도, 저 혈기왕성한 사고뭉치와 여름 내내 보낼 자신은 천하의 글로리아도 없었던 모양이다.
“…수도?”
클라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 수도 가?”
“깜짝 선물이에요.”
말이 나온 김에, 레토가 설명해 줬다.
“이틀 뒤에 갈 거예요. 한 달 동안 수도에서 즐겁게 놀 준비가 되었습니까?”
“한 달이나? 수도에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클라레는 이럴 때가 아니라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고는 후다닥 계단을 올라갔다.
곧 뭔가 우당탕탕 하는 소리가 천장 위에서 들렸다.
“…갑자기 수도요?”
마찬가지로 이 소식을 처음 접한 아스가 놀란 눈을 끔뻑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