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5화 (115/245)

115.

“쿨럭! 커헉!”

해군의 추적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다고 판단한 나비는 나무 기둥에 몸을 기대며 쇳내 나는 숨을 가까스로 골랐다.

터져 나오던 기침이 겨우 잠잠해질 즈음에야, 나비는 자신이 어디까지 왔는지 주위를 둘러볼 수 있었다.

‘산…?’

정신없이 도망치느라 오르막길인지도 모르고 끊임없이 달렸더니, 그제야 꽤 가파른 경사가 눈에 들어왔다.

‘어서, 어서 연락을 해야…!’

다급해진 나비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아직 해군은 자신이 여기에 있는 걸 모르는 눈치였다.

나비는 자신이 올라왔던 길을 슬쩍 내려다봤다. 아직까진 해군의 움직임이 감지되지 않았다.

나비는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정신이 좀 들고 보니 가파른 언덕이 아주 고문이었다.

사실, 그렇게까지 가파르지도 않았다. 지대가 평탄하기로 유명한 샤프 영지에서 가장 높은 곳이라곤 시내에 있는 나지막한 언덕 하나가 전부였다.

그러니 나비가 숨은 곳은 얕은 경사가 있는 숲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에겐 그런 걸 알아챌 정신머리가 없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리다가 따끔거리는 손바닥을 확인하니, 잔돌과 가시에 긁혀 피가 흥건했다.

그리고 피보다 더 선명하고 쨍한 연두색이 묻어 있었다.

“특수 안료라는 건데.”

“이게 무슨 뜻일까?”

“너희 X 됐다는 뜻이지.”

분에 겨워 악문 잇새 사이로 바드득 소리가 났다.

제압당한 자신들을 내려다보며 비웃던 해군의 목소리가 선명했다. 머릿속에서 떨치지 못한 그 비아냥은 나비를 또 한 번 조롱했다.

모든 게 다 함정이었다.

그 사실을, 나비는 지금에서야 확실하게 이해했다.

“…으아악! 아악! 아아아!”

억울하고 분통한 나비는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자신이 지금 도주 중이란 것도 망각한 듯했다.

“어떻게, 어떻게…!”

남부에 내려올 때만 해도, 나비는 믿고 있었다.

이번 출장이 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이고, 끝나고 돌아오면 승진은 따 놓은 당상이란 것을.

하지만 결국, 자신은 해군의 손바닥 안에 있었다.

크고 우람한 함선에 올라탔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거대한 바다 앞에 찢어진 돛단배 신세였었다.

문제없이 출항한 줄 알았더니, 이미 해군은 집채만 한 파도를 일으켜 자신들을 집어삼킬 준비를 끝마친 것이었다.

“으, 으으…!”

파르르 떨리는 두 손이 제 머리칼을 쥐어뜯듯 붙잡았다.

손에 묻은 연두색 안료가 이미 연두색으로 엉망인 머리에 또 연두색을 물들였다.

나비 칼루스는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뭐든 다 할 수 있었고, 뭐든 다 잘 해냈던 어린이였다. 몰락했을지언정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늘 주변 친구들의 관심을 독차지했고, 그걸 당연하게 여겼다. 자신의 인생은 태어날 적부터 승승장구였다.

그래서 나비는 지금 자신이 처한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아니, 정확히는 그걸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어려워했다. 거의 강박적으로 부정하고 회피하는 중이었다.

해군의 함정에 빠진 나비는 연두색으로 물든 전신을 웅크렸다. 

“…….” 

“…….” 

그때였다.

위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나비가 움츠렸던 몸에 힘을 바짝 줬다. 전신을 휘감은 긴장감과 함께 감각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남자 두 명이 떠드는 소리였다.

다행히 소리는 점점 멀어져 갔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든 나비는 그들의 차림새를 살폈다. 그냥 평범한 사람들인 것 같았다.

나비는 몸을 일으켜 아까 사람들이 지나간 곳으로 갔다.

“……!”

그곳엔 언덕을 산책하기 딱 좋게 포장된 도로가 있었는데, 나비의 눈을 사로잡은 건 그 길 한가운데 있는 공중전화였다.

서둘러 달려간 나비는 부스 안에 들어서자마자 문을 잠갔다. 그리고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때마침 전화기 옆에 누군가가 놓고 간 낡은 동전 몇 개가 있었다.

나비는 서둘러 동전을 넣고 번호 다이얼을 돌렸다.

곧 수화기 너머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안보국 전화 연결원이었다.

“소속 직원 나비 칼루스, 암호명은 음지 안에….”

암호명과 각 직원에게 주어진 신분 확인 번호를 말한 뒤에야, 수화기 너머 전화 연결원이 말했다.

[신원 확인했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상황 4호입니다.”

‘상황 4호’는 계획이 실패했음을 알리는 암호였다. 이를 알아들은 연결원이 서둘러 전화를 다른 곳으로 연결했다.

[무슨 일이야?]

수화기 너머로 당혹스러움이 여실한 목소리가 들렸다.

“국장님, 전부 체포되었습니다.”

나비는 서둘러 상황을 설명했다.

특함 직원 한 명을 간첩으로 조작하려 했던 계획은 처음부터 들통났었고, 안보국 직원 전원이 구금되었음을.

나비는 국장님이 서둘러 다음 지시를 내리길 기도했다.

지금의 그로서는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지 도무지 생각해 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새끼야!]

정작 수화기 너머에서 들리는 건 진노한 목소리로 내뱉는 욕설뿐이었다.

국장은 나비의 지능을 의심하고 존재를 부정하는, 인신공격이나 다름없는 욕지거리를 계속 쏟아냈다.

너무 놀란 나비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누군가에게 이렇게 욕을 먹는 건 처음이었다. 심지어 그 상대가 평소 저를 눈여겨봤다며 응원해 주던 국장님이란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지금 상황에서 전화를 걸면 어쩌자는 거야! 들키고 싶어서 환장했어? 이 XX…!]

쏟아지는 비난에 정신이 팔린 나비는 눈치채지 못했다.

자신의 등 뒤에 거구의 사내가 서 있다는 걸.

아니, 애초에 그에겐 주변을 경계하거나 예의주시하는 능력 같은 건 없었다. 나비 칼루소는 자신이 아는 것보다 무능력한 인간이었다.

그러니 이 숲 한가운데에 설치된 공중전화가 이상하단 것을 의심하지 못했다.

전부 함정이었는데.

[그래서 지금 너 혼자 도망쳤어? 이 미친! 이러다 흔적이라도 추적해서 잡히…!]

“아이고, 국장.”

수화기를 빼앗아 든 거구의 사내가 반갑게 인사했다.

“잘 지냈나? 술은 적당히 마시고 있지?”

[…….]

“그래, 그래. 놀랐지? 하지만 이게 무슨 상황이냐고 묻지는 말게. 지금부터 일어날 상황을 이해하는 건 그대의 몫이 아니거든.”

그럼 너는 뭘 하면 되느냐.

알버스 오케아누스가 입꼬리를 씩 올렸다.

그의 다리 밑에는 조금 전 알버스의 손에 기절한 나비가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져 있었다.

“자넨 죗값을 치르면 돼.”

곧 수화기 너머에서 정체 모를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누군가의 비명, 그리고 방 안을 부서트리는 듯한 과격한 소음까지.

시끄러운 굉음이 잠잠해질 즈음.

[…장군님.]

수화기 너머로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테네브레인가?”

알버스가 물었다. 그는 지금 안보국 관사에서 제 전화를 받고 있는 남자가 사돈총각이란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인사드려 송구합니다. 그리고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쪽이나 나나 국왕을 위해 일하는 것이니, 감사 인사는 필요 없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국왕 폐하께서 장군님께 전해 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티가 말했다.

[임무는 끝났습니다.]

“…그렇군.”

통화를 마친 알버스는 챙겨 온 천과 끈으로 기절한 나비를 단단히 포박했다. 손에 끼고 있던 검은 가죽 장갑이 연두색으로 물드는 건 순식간이었다.

장갑을 벗은 알버스는 해군 본부로 전화를 걸었다.

“…그래, 나다.”

나비를 잡았어.

알버스는 몇 분 뒤에 나타난 해군들에게 나비를 넘긴 뒤, 홀로 오케아누스 저택으로 돌아갔다.

***

해군이 요청했던 이틀 간의 엠바고, 그 마지막 날.

수도에서 엄청난 뉴스가 터졌다. 바로 안보국 국장이 횡령 및 주가 조작 혐의로 체포되었단 소식이었다.

심지어 현재 다른 여죄가 또 있는지 확인하는 중이랬다.

때마침 다음날에 올릴 기사를 마지막으로 점검하던 남부 기자들은 크게 당황했다.

그제야 아드벨로 대장이 엠바고를 요청한 이유 역시 확실하게 알았다. 이 사건들은 순서대로 보도되어야 파급력이 더욱 커지기 때문이었다.

“어지간한 일이 아니야…!”

남부에서 가장 큰 신문사의 사장이 겁에 질린 듯한 미소를 지었다. 오랫동안 기자로서 활약하며 쌓은 촉이 바짝 섰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어쩌면, 7년 전 전쟁 이후로 가장 커다란 사건이 왕국에 들이닥칠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음 날.

엠바고가 풀린 기사가 남부를 비롯한 전국에 보도됐다.

안보국이 해군을 상대로 간첩 사건을 조작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실, 그리고 안보국 국장이 에페레나 자작과 공모하여 주가 조작한 혐의가 의심된다는 것까지.

연달아 터진 충격적인 사건에 왕국은 혼란에 빠졌다.

안보국의 추악한 면모에 충격을 받았고, 이에 대해 엄벌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동시에 이번 사건에 대한 국왕의 의견을 요구하는 의견도 나왔다.

이를 의식한 국왕은 바로 다음 날에 이번 사건들과 관련하여 자신의 의견을 표명했다.

[아들라보르 왕국은 이번 일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젊은 국왕의 목소리는 라디오를 통해 전국으로 생중계됐다.

[왕국은 이번 사건이 마무리될 때까지 관심을 보일 것이며, 이들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끝까지 지킬 것이다.]

담담하지만 힘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왕국민들은 귀를 기울였다.

“…지금 뭐라는 거야?”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라디오를 듣던 클라레가 코를 후비며 물었다.

쏙 뺀 손가락에 뭐가 묻어 나오자, 그걸 형부 옷에 슬쩍 묻혔다.

“나쁜 일을 한 사람들을 혼내 주겠단 뜻이에요.”

아스가 클라레의 손가락을 닦아 주며 말했다.

하지만 레토의 옷에 묻은 것은 내버려 뒀다.

“그나저나 남아 있는 쓰레기는 어쩔 겁니까?”

여전히 제 옷에 뭐가 묻었는지 모르는 채, 레토가 글로리아에게 물었다.

클라레가 있어서 대놓고 묻지 못했으나, 그는 해군에 구금 중인 안보국 직원들의 처우를 궁금해했다.

“그것들은 우리가 다 조사할 순 없으니….”

글로리아가 말했다.

“…수도로 가겠지?”

안보국 직원들을 심문하는 건 국왕의 몫이었다. 그러니 수도에 있는 특수 수사기관이나, 테네브레가 나서서 조사할 가능성이 컸다.

[…고로, 안보국은 즉각 새로운 체제로 개편될 것이다.]

떠드는 사이, 국왕이 새로운 개혁안을 발표했다.

[테네브레를 해체하고, 그들 인력을 안보국에 투입하여 새로운 정보기관으로 탈바꿈할 것이다.]

글로리아가 충격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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