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느닷없이 찾아와서 미안하게 되었어.”
“아닙니다.”
정말 느닷없는 방문이긴 했지만, 아이트라는 크게 티 내지 않았다. 오히려 이번 방문에 어떤 목적이 있단 사실을 짐작했다.
“카리나, 할아버지한테 아드벨로 대장님이 오셨다고 말씀 좀 전해 줄래?”
“할아버지는 어디 계시나요?”
“정원에 계실 거야. 찾아봐 주겠니?”
“네!”
카리나는 자리를 떠나는 중에도 글로리아에게 편히 머물다 가시라며 꾸벅 인사했다.
글로리아는 떠나가는 카리나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봤다. 저도 어서 집으로 돌아가 막내 손녀의 재롱을 보며 푹 쉬고 싶었다.
하지만 글로리아에겐 중요한 용건이 있었다.
“응접실로 모시겠습니다.”
아이트라가 안내했다.
“사람도 전부 물리고.”
“차는 드시겠습니까?”
“유감스럽게도 차보다는 술과 어울리는 주제를 갖고 왔거든.”
술을 즐길 여유 따윈 없을 거라며 글로리아가 미리 경고했다.
아이트라는 그래도 손님에게 예의를 갖춰야 한다며 가볍게 즐길 다과를 준비했다.
귀한 분께서 직접 오셨는데 아무것도 대접하지 않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글로리아 역시 굳이 차려 주는 다과를 물리진 않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뭐 좀 물어보려고.”
앞에 놓인 찻잔을 바라보던 글로리아가 본론을 꺼냈다. 이제 응접실에는 그녀와 아이트라, 단 두 사람뿐이었다.
“최근 왕국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태들.
글로리아는 이 모든 사건에 숨겨진 연결점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아이트라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파였다.
”정확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시일 내로 안보국이 해군에서 사건 하나를 터트릴 거야.“
“안보국이라면….”?
무언가를 떠올린 아이트라가 마침 열리는 문을 바라봤다. 때맞춰 등장한 알버스였다.
그는 글로리아를 발견하자마자 흠칫거리며 주춤거렸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자리에 앉았다.
“안보국 국장이 드디어 움직이나 보군.”
“아버지께서 그 사람과 자주 어울렸었지요?”
아이트라는 수도에서 만났던 안보국 국장을 떠올렸다. 술 좋아하는 전형적인 중년 남성의 외형이었다.
피부는 조금 붉고, 동그랗게 술배가 나온.
그리고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어딘가 졸렬한 느낌도 있었다.
“반역자랑 친구 한다고 팔자에도 없는 고생을 했지.”
그런 것치고는 자주 어울려 술을 드셨던 것 같지만, 아이트라는 구태여 말을 보태진 않았다.
알버스가 이어 말했다.
“역시 북부와 종종 연락하는 모습을 보였어. 국왕에게도 보고했지만, 중간 연락망으로 접선하던 놈이 육군 소속이야.”
그리고 역시, 디모네 닉스 소장의 심복이었다.
“보아하니 안보국이 사고를 칠 모양이지?”
“특함 대원 중 한 명을 간첩으로 조작할 거야.”
“음….”?
알버스가 풍성한 턱수염을 쓸었다.
안보국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른단 예상은 했다. 하지만 설마 해군 본부 내에서, 그것도 아드벨로의 영역에서 그런 무리수를 둘 것이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지목될 대상은?”
“아드벨로가 신원을 보증하는 인물이야. 특함 출신이지.”
지뢰를 건드렸군.
알버스는 안보국의 멍청한 행보를 욕하기보단, 그 때문에 아드벨로에게 찍혀서 크게 당할 그들의 미래를 동정했다.
“그럼 대장님이 말씀하시려는 건 뭐죠?”
아드벨로가 글로리아에게 물었다.
“최근 일어난 사건들, 그러니까 안보국과 닉스 소장이….”?
“연관되었다는 뻔한 사실을 말하려고 온 게 아니야.”
글로리아는 아미와 나눴던 대화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신성청은 7년 전을 기점으로 크게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글로리아는 그게 행방불명된 성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신성청은 그 때문에 엄청난 비난을 받았었다.
‘하지만 정말 그것뿐이었을까?’
미심쩍은 의심은 성녀 가출 이전까지 최고의 부흥기를 겪었던 신성청의 위세를 떠올리게 했고.
덩달아 위세를 떨쳤던 또 하나의 세력이 그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안보국….”?
글로리아가 음미하듯 중얼거렸다.
“안보국, 육군, 신성청….”?
“갑자기 신성청은 왜 꺼낸 거지?”
사정을 모르는 알버스와 아이트라 입장에선 ‘신성청’ 등장은 꽤 당혹스러운 전개였다.
하지만 이어진 글로리아의 말에 두 부녀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난 이 세 곳이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해.”
“증거는 있나요?”
“아직 없지만, 내 감이 경종을 울리고 있어.”
“그렇다면 심증은 있단 거군.”
알버스는 이미 글로리아를 믿고 있었다.
미우나 고우나 가장 신뢰하는 전우였고, 그렇기에 알버스는 글로리아의 성정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지금 그녀의 분위기는 결코 농담을 하려는 게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가 그렇게 말할 때면 추측은 거의 섬뜩할 정도로 들어맞았다.
일전에 글로리아의 남편인 비스에게 들은 적이 있다.
글로리아의 감은 운으로 찍어 내는 게 아니라, 그녀의 다양한 경험과 풍부한 지식이 무의식 속에서 도출해 낸 가장 현실성 높은 가능성이라고.
지금 글로리아는 그 가능성을 입에 담았다.
“우린 과거로 되돌아가야 해.”
“과거?”
“7년 전 역공전.”
그녀가 언급한 가능성은 충격 그 자체였다.
“어쩌면 전쟁의 시발점은 국내에 있을지도 모르겠어.”
안보국과 육군, 그리고 신성청.
글로리아는 이 세 가지 세력의 공통점을 말했다.
“당시 역공전으로 가장 큰 전쟁특수를 봤던 곳이 어딜까?”
“너잖아, 아드벨로.”
“아버지, 거기엔 오케아누스도 있어요….”?
군수업의 1, 2인자가 아드벨로와 오케아누스였다. 두 가문은 역공전에서 수많은 무기를 팔았고, 그 외에도 다양한 군용품을 판매해 어마어마한 이득을 봤다.
“…내가 질문을 잘못 했군.”
실수를 인정한 글로리아가 다시 물었다.
“전쟁으로 큰 이득을 봤다가, 전쟁이 끝나자마자 나락으로 떨어진 곳이 어딜까?”
그제야 아이트라와 알버스의 얼굴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마치 커다란 둔기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이 찾아왔다.
“그래요….”?
아이트라가 수전증이라도 찾아온 것처럼 떨리는 손을 꼭 쥐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한 척하려고 노력했지만 별 소용 없었다.
“확실히, 근래 일어난 사건들이….”?
조금 전 글로리아가 말했던 세 곳과 관련되었다.
안보국은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활동했었다.
한땐 안보국이 지나가면 날아가는 새도 떨어진다는 농담 아닌 농담이 유행할 정도였다.
하지만 승전과 동시에 그들의 영향력은 크게 감소했다.
그리고 육군은 역공전을 가장 먼저 제안한 곳이었다.
정작 전쟁을 준비하면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건 해군이건만, 전쟁을 진두지휘했던 건 육군 출신의 장교들이었다.
물론 이들의 계획은 함선에 불이 나면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거기다 햇병아리 해군 사관학교 졸업생의 등장으로 영광마저 빼앗겼다.
‘…그럼 신성청도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단 말인가?’
아이트라는 빠르게 예측했다.
신성청 역시 전쟁 특수를 가장 크게 누린 곳 중 하나다.
전쟁 발발로 불안에 떠는 국민들을 위로하면서 엄청난 지지를 받았었다. 그때의 위세는 감히 왕실에 버금갈 정도였다.
“신성청이 무슨 짓을 저질렀나?”
같은 생각을 한 알버스가 물었다.
“저지르는 건 시간문제야.”
“아직 모른단 거군. 그럼 그쪽은 일단 지켜보는 것으로 해 두지.”
“신성청 쪽은 정보를 수집하는 게 어려워요.”
“이쪽에서도 알아볼 테니 공조하자고.”
“알아낸 것이 있으면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렇다면 당장 해야 하는 건….”?
귀여운 장난을 준비해 둔 안보국을 떠올린 글로리아가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
알버스는 그 모습을 바라보곤 고개를 휙 돌렸다.
역시 진짜 못된 건 눈앞에 있는 저 여자였다.
***
태풍은 무려 이틀 동안 남부를 휩쓸었고, 여기에 또 이틀 동안 흐리고 비가 쏟아지는 날씨를 남겨 두고 갔다.
그러고 나서야 실로 오랜만에 화창한 날씨가 찾아왔다.
사람들은 밀린 빨래를 해치우고, 꿉꿉했던 방 안을 환기하기 위해 창문과 문을 활짝 열었다.
해군 본부도 마찬가지였다.
아미와 셀린을 비롯해, 본부에서 기숙하는 군인들은 태풍으로 엉망이 된 영사 내부를 청소 중이었다.
“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구만.”
바닥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줍던 아미가 투덜거렸다.
영사 주위엔 태풍으로 떨어진 온갖 잡다한 쓰레기들로 엉망인 상태였다. 부러진 나뭇가지, 흙먼지, 과자 봉지, 신문 등등.
“어휴, 아침부터 네 못난 얼굴 보면서 청소해야 한다니….”?
“아미 넌 거울 안 보니?”
“아침에 봤더니 내 예쁜 얼굴 보고 거울이 놀라서 깨졌더라.”
“너무 못생긴 얼굴 보고 놀란 거울이 삶을 포기했구나….”?
둘은 사이좋게 덕담을 주고받으며 쓰레기를 치웠다.
그때, 영사 밖에서 어수선한 소음이 들렸다. 그 소란스러움에 아미와 셀린도 떠들던 입을 멈추고 시선을 돌렸다.
눈에 보이는 건 웬 검은 차량에서 내리는 양복 차림의….
“…안보국?”
아미가 중얼거리자 셀린의 표정이 굳어졌다.
“저거 안보국이지? 나 상담했던 놈도 있는데?”
“설마….”?
설마 여기 안으로 들어오려는 건가, 싶었는데 정말로 영사 안으로 발을 디뎠다.
조금 전 있었던 어수선한 소란은 여기에 기거하는 해군들과 안보국의 대치 때문인 듯했다.
“야.”
아미가 한쪽 눈을 찡그렸다.
“저 새끼들, 지금 우리 쪽으로 오는 거 아냐?”
“너 뭐 잘못했냐?”
“그대로 반사해서 너한테 물으마.”
아미와 셀린은 손에 들고 있던 포대 자루와 쓰레기를 바닥에 내려놨다.
“셀린 보르 중위.”
체격이 상당히 굵직한 안보국 직원을 필두로, 정장으로 차려입은 무리가 셀린 앞에 섰다.
아직 빗물에 젖은 흙을 다 치우지 못한 탓에, 저들의 구두는 금방 흙투성이가 되어 더러워졌다.
“셀린 보르 중위, 맞습니까?”
“무슨 일입니까?”
“잠시 저희와 함께하시겠습니까?”
“내가 지금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만?”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기 싸움이 이어졌다.
그 틈에 다른 군인들이 주변을 빙 둘러쌌다. 궁금한 것도 있지만, 감히 전우를 건드리는 안보국의 행보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먼저 시선을 떨군 건 안보국 직원이었다.
“…보르 중위.”
철컥.
철컥.
그는 은빛 수갑을 꺼내 들어 셀린의 손목에 채웠다.
“당신을 간첩 혐의로 체포합니다.”
셀린의 콧구멍이 두 배로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