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아들라보르 왕국의 하나뿐인 공주는 정체를 숨기고 해군에서 근무 중이었다.
그 이유에 대해선 밝혀진 바가 없지만, 애초에 그녀가 해군에서 일한다는 사실 자체가 극비사항이었다.
기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왕국에 단 다섯 명뿐이었다.
레토가 물었다.
“지금 보르 중위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국왕 내외, 너, 나, 비서실장.”
아드벨로 대장이 비밀을 아는 다섯 명을 읊었다.
“저는 알고 싶지 않았는데….”
“내가 억지로 알려 줬지.”
그때를 떠올린 아드벨로 대장이 사악하게 킥킥거렸다.
눈에 선했다. 셀린이 국왕의 여동생이란 사실을 알게 된 레토의 표정은 여태 본 것 중 가장 우스꽝스러웠다.
“국왕은, 뭐라고 합니까…?”
다시 졸음이 몰려드는지, 질문하는 레토의 목소리가 느리고 굼떠졌다.
“몰라.”
아드벨로 대장이 제 손톱을 이리저리 살피며 말했다. 돌아가거든 손톱 좀 다듬어야 할 것 같았다.
“노아한테 국왕이 숨었단 소리를 듣자마자 찾으러 다녔는데, 어디에 숨었는지 머리카락 한 올 안 보이더라!”
“…….”
그거야 잡히면 반죽임을 당할 것을 알고 숨은 걸 테지.
레토는 며칠 전 아콘에서 카일리코 국왕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아드벨로 할망구, 진짜 무섭더라.”
“아들놈이 썼던 기저귀 챙겨 올걸. 나 찾는다기에 한번 훔쳐봤는데, 지릴 뻔했잖아.”
“사람이 어쩜 그렇게 악독할 수 있지?”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하지만 레토는 굳이 저 말들을, 그리고 제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가까스로 깼던 정신이 점점 흐려졌다. 밀려오는 졸음을 더는 버텨 낼 재간이 없었다.
“…아픈 놈 붙잡고 너무 떠들었네.”
“다 떠들어 놓곤….”
“바닷물에 절여져 보고 싶으냐?”
기어오르지 말고 자라.
아드벨로 대장은 레토의 눈 위로 손을 덮듯이 올렸다. 그리고 몇 초 뒤에 슬쩍 뗐다. 레토는 곧장 잠이 들었다.
사실 레토는 아주 피곤한 상태였다. 그런데도 아드벨로 대장의 기척을 알아챘고, 근성으로 졸음을 물리치고 버티던 중이었다.
휙휙.
“잠들었나?”
레토가 잠들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아드벨로 대장은 그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위협적인 주먹은 레토의 오똑한 코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멈췄다.
완벽하게 잠든 것을 확인한 뒤에야.
“비서실장.”
아드벨로 대장이 비서실장을 불렀다.
여태 눈치껏 소리를 죽이고 물러서 있던 비서실장이 안경알 너머로 눈을 둥글게 휘었다.
“여기입니다.”
그는 아미가 누워 있는 침대 옆에 서 있었다.
그곳으로 간 아드벨로 대장은 침대에 얌전히 누워 있는 아미를 내려다봤다.
“…너 일어났지?”
아미의 꾹 닫힌 눈꺼풀이 미세하게 흔들거렸다.
“어디까지 들었냐?”
“셀린 고 계집애, 어쩐지 잘난 척이 오지더라니….”
“다 들었구먼.”
아드벨로 대장은 아미를 침대에서 번쩍 들어서는, 의무실 밖으로 데려갔다.
뒤따라 나온 비서실장은 잠든 대원들의 이불을 고쳐 주고 불을 끈 뒤 문단속까지 하고 나왔다.
“아야!”
어두컴컴한 복도에 내동댕이쳐진 아미가 소리쳤다.
“대장님! 아파요!”
“아파요? 요?”
“아픕니다….”
재빨리 말투를 고친 아미가 입술을 삐죽이며 투덜거렸다. 만만한 게 나고, 부려먹는 게 나라며, 저는 미운 오리들 속 백조라며 꿍얼거렸다.
“백조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설마 제 피부색 가지고 문제 삼는 겁니까?”
“처음 만났을 때는 백조 비슷한 뭐긴 했는데….”
여전히 바닥에 주저앉은 아미를, 아드벨로 대장이 빤히 내려보더니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햇볕에 탄 피부,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표정, 투박한 말투까지.
“지금은 그냥 좀 노는 여자 같아.”
“진짜 노는 여자가 되고 싶다….”
고개를 푹 떨군 아미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왜 따로 부르셨습니까?”
“네가 마력 폭주 전조 증상이 나타났다고 해서.”
“예? 아니, 대장님이 절 걱정해서 왔을 리는 없고….”
“이해가 안 가서 말이야.”
아미가 지닌 마력량은, 방대한 마력을 타고난 특함 내에서도 손꼽히는 정도였다. 거기다 순도까지 따진다면 불세출의 천재라 불리는 레토마저 뛰어넘었다.
그런 아미가 마력 폭주 전조 증상을 보였다고 하니, 아드벨로 대장은 쉬이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아파서 누워 있는 부관을….”
이런 식으로 바닥에 내동댕이친다고?
아미는 기가 막혔지만, 순순히 대장님께서 궁금해하실 이유를 말했다. 몸에 밴 상명하복 정신이 원망스러웠다.
“신성청에 들키지 않으려고 그랬습니다.”
“일단은 그것도 고려해서 시험을 준비했는데?”
“신성청이 급해진 모양입니다.”
시종 뚱한 표정이었던 아미의 눈빛이 한없이 가라앉았다. 몇 년이 지나도 희석되지 않는 증오가 드러났다.
늙은 변태들.
고결하고 성스러운 척은 다 하는 역겨운 쓰레기들.
“…절 찾기 위한 탐지마법을 펼쳤습니다.”
현재 신성청이 직면한 문제는 많다. 하지만 그 많은 것들을 다 제쳐 두고 우선시하는 것이 가출한 성녀의 행방 찾기였다.
어릴 적부터 신성청을 위해 살아왔던 성녀는 전쟁으로 어수선했던 7년 전에 사라진 뒤, 여태껏 머리카락 한 올조차 발견되지 않았다.
본래라면 납치나 범죄를 의심해볼 일이다. 몇십 년 만에 나타난 성녀였다. 그렇기에 성녀를 노리는 적도 많았다.
하지만 성녀가 사라진 날.
[X발, X망해라!]
신성청 벽에 큼지막하게 쓰인 상스러운 저주의 글씨체가 성녀의 것임이 밝혀지면서, 그녀의 자발적인 가출이란 사실이 공공연하게 알려졌다.
신성청은 승전으로 환호하던 아들라보르 왕국에서, 유일하게 패배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시험 중에 마력 방출을 높이려다, 제 마력을 탐지하려는 신성청 특유의 파동을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마력을 억누르다가….”
“폭주 전조 증상을 겪은 겁니다.”
이번에는 정말로 죽는 줄 알았다며 아미가 아찔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샤프와 신성청은 거리가 제법 있잖아.”
아드벨로 대장이 비서실장을 힐끔거렸다. 비서실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신성청이 위치한 서부 상투아 영지에서 이곳 샤프까지, 가장 빠른 급행열차를 타도 꼬박 하루가 걸립니다.”
“그만큼 먼 거리에서 발동한 탐지마법을 감지했다고?”
“제가 괜히 성녀인 줄 아십니까?”
툴툴거리는 아미의 목소리는 은근히 뽐내는 듯도 했다. 본인이 성녀인 건 싫지만, 제 실력에 관해선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신성청의 기운은 잊으려야 잊을 수 없었다.
“미약하지만 분명 느꼈습니다. 섬뜩하고 소름 돋는, 고귀한 척해도 역겹고 더러운 속내가 훤히 담긴 그 마력을….”
“발등에 불이 떨어졌나 보다.”
슬그머니 말을 자르고 끼어든 아드벨로 대장이 아미의 머리를 벅벅 쓸었다.
제대로 닦지 못해 소금기가 흥건한 머리칼 감촉이 거칠었지만, 아드벨로 대장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나저나 탐지마법이라….”
아드벨로 대장이 마음에 걸리는 건 따로 있었다.
“…지금 성왕이 몇 살이더라?”
성왕은 이 나라 국교의 수장이자, 신성청의 군주였다. 무척 아름답고 젊은 미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의 나이는 한 세기를 훌쩍 뛰어넘었다.
아미가 언짢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변태 밀랍 새끼, 제가 가출했을 때 124살이었습니다.”
“그럼 올해로 131살이군.”
“하지만 상태는 위태로운 모양입니다.”
비서실장이 비밀리에 마탑으로 왔던 신성청의 주문을 떠올렸다. 그는 제니우스와 아메타가 전했던 서류에 적혀 있던 내용을 기억하고 있었다.
“활력을 강화하는 약을 주문했습니다.”
신성청에서 주문한 활력 증진 물약은 성적인 용도로 쓰이는 게 아니었다.
죽음을 문턱에 앞둔 사람이 마시면 3분 정도 버티는 힘을, 몸이 약한 사람이 마시면 30일을 건강하게 해 주는 명약이었다.
“7년 전부터 꾸준히 주문하곤 있었는데, 최근 들어 주문량이 늘어났습니다. 마탑에서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말입니다.”
“…….”
끔찍한 기억이 떠올랐는지, 아미가 올라오는 토기를 억지로 삼키며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리고 이번 달에는….”
비서실장이 이어 말했다.
“…가사 상태에 빠지는 약도 주문했습니다.”
쾅!
끝내 폭발한 아미가 복도에 설치된 쓰레기통을 발로 찼다. 죄 없는 은색 쓰레기통은 맥없이 찌그러졌다.
“X발.”
단 한 마디.
고요하고 음산한 욕설 한 마디만으로, 신성청을 향한 아미의 분노를 짐작할 수 있었다.
“제발 좀 죽어라, 제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아미는 벽에 몸을 기댄 채 스르륵 주저앉았다. 분에 겨워 바득 깨문 잇새 사이로 거친 숨결이 흘러나왔다.
그런 아미를 바라보던 아드벨로 대장이 말했다.
“당분간 치티아 중위는 훈련에서 제외해야겠어.”
“만일을 대비하는 겁니까?”
비서실장의 물음에 아드벨로 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라 돌아가는 꼴 좀 봐라.”
이건 비아냥이 아니었다.
실제로 아들라보르 왕국에는 기이한 상황이 끊임없이 쏟아지는 중이었다.
해군 내부에서 기밀을 유출하려는 이적자가 나오고, 왕실 기사단은 오랫동안 마약을 재배해 유통했다.
심지어 여기엔 해적까지 얽혔으며, 숨어든 제국 간첩들과 밀접한 관계였다.
간첩들은 왕국 내 고위급 장교와 내통 중이었으며, 이젠 안보국이 난리 칠 준비까지 마쳤다.
해군은 지금 불붙기 직전의 화약고 상태였다.
“한데 여기에 신성청까지 얽힌다?”
아드벨로 대장이 진절머리를 쳤다.
“그건 아드벨로라도 꽤 버거워.”
현재 아드벨로의 비호 아래, 절대 정체를 들켜선 안 될 4명의 고귀한 존재가 숨어 있었다.
피에타 가문의 마지막 핏줄들.
행방불명된 신성청의 성녀.
아들라보르 왕국의 공주.
네 사람의 정체를 숨기고 보살피는 것만으로도 아드벨로는 이미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신성청이 해군에 성녀가 있단 걸 알고 접근한다면, 그건 천하의 아드벨로에게도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한 나라의 국교를 상대하는 건 힘들거든. 자칫하다간 그놈들의 여론전에 휘말릴 수 있어.”
“아드벨로가 진다는 말씀입니까?”
상상이 잘 안 된다며 아미가 농담처럼 말했지만, 그녀 역시 걱정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진다기보단, 더러운 소모전이 될 가능성이 크지.”
“…….”
말이 없어진 아미가 아드벨로 대장을 올려다봤다.
“…아드벨로 공작.”
아미의 입에서 싸늘해진 목소리가 조용히 흘러나왔다.
“그대는 날 반드시 지켜야 해.”
우린 거래를 했으니까.
군대에선 상상도 못 할, 해군의 수장에게 감히 하대하는 아미의 태도는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