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6화 (106/245)

106.

“어, 형부 왔다!”

레토의 어둑한 다짐은 클라레의 쾌활한 목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어린 처제는 양손에 식칼토끼와 괴수 인형을 쥐고 있었다.

레토가 표정을 갈무리하고 환하게 웃었다.

“처제. 나 기다렸어요?”

“으으응.”

잠옷 차림의 클라레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근데 내 선물은요? 맛있는 거 사 오라고 했는데!”

“아….”?

뒤늦게 클라레의 부탁을 떠올린 레토가 제 손에 들린 포장지를 내려다봤다. 아콘에서 산 고급 사과주뿐이었다.

“…뽀뽀는 안 될까요?”

레토가 눈꺼풀을 빠른 속도로 깜빡이며 물었다. 선물은 까먹고 잊어버렸단 말은 덤이었다.

“나 좀, 형부 싫어지려고 해.”

클라레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후다닥 계단을 올라가 방으로 가 버렸다. 그러면서 ‘형부 저녁은 내가 다 먹었다!’라며 장난기 짙은 거짓말을 외쳐 댔다.

다행히 부엌에는 아스가 따로 챙겨 둔 레토의 저녁 식사가 남아 있었다.

“일찍 왔네?”

방에서 나온 노아는 식은 음식을 데우려는 레토를 발견했다.

“도와줄까?”

“괜찮아.”

레토는 익숙하게 접시들을 오븐에 넣었다. 음식들이 훈훈한 온기를 머금는 동안, 레토는 가지고 온 술을 노아에게 건넸다.

“이건 웬 술이야?”

“친구 가게에서 맨손으로 나오긴 그렇잖아.”

“웬일로 그런 기특한 생각을 해?”

술에 붙은 상표명을 살피던 노아가 문득 레토의 목 언저리에 얼굴을 가까이 했다. 그리고 코를 킁킁거렸다.

“술 냄새가 안 나네?”

“나 차 몰고 갔잖아. 운전해야 하니 안 마셨지.”

레토는 가까이 다가온 노아에게 훔치듯이 쪽 입맞췄다. 예고 없는 도둑 뽀뽀였지만, 노아는 싫은 기색은커녕 오히려 기쁘단 듯이 싱긋 웃었다.

“락소 씨는 잘 지내?”

레토가 늦은 저녁을 먹는 동안, 노아는 그 앞에 앉아 말 상대가 되어 줬다.

“술도 못하는 게 술장사한다고 고생이지.”

“다음에 나도 한번 가 볼까. 결혼식 때 와 줘서 감사하다고 인사드리고 싶은데.”

“처제랑 처형도 데려갈까?”

“어? 술집인데? 클라레가 가도 돼?”

“어린이용 식사도 있거든.”

“락소 씨는 무슨 장사를 하고 싶은 걸까….”?

시답잖은 주제의 대화가 잠시 끊겼다.

“노아.”

레토는 그 틈에 물었다.

“모병 홍보물 사진 말인데. 찍어도 되는 거야?”

“갑자기?”

갑작스러운 물음에 노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곧 질문의 의도를 파악했는지, 입꼬리를 느슨하게 올리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도 처음에는 찍어도 되나, 싶었지.”

“알아보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큰일 아니야?”

“그럴수록 오히려 당당해야 한다고 할머니가 그랬어.”

사진 촬영을 권유한 건 바로 글로리아였다.

“등잔 밑이 어둡다나 뭐라나. 괜히 숨어 지내는 것보다 당당하게 나서는 게 의심도 덜 사고 좋대.”

“난 좀 걱정인데….”?

레토는 슬그머니 의견을 내비치면서 노아의 눈치를 살폈다.

“사실 나도 마찬가지야.”

노아가 말했다.

아직까진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은 없어서 태평스레 잊고 지냈지만, 근래 일어났던 간첩 사건이나 이번 안보국 방문으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이제 그만 찍을까 봐.”

제국에서 저를 알아보는 건 무섭지 않았다. 하지만 저에게는 클라레가 있었다.

가뜩이나 지난번에 제압했던 간첩들이 아이스크림 차로 아이들을 유괴하려던 정황이 확인됐다. 그리고 그때 클라레가 위험에 빠질 뻔했었고.

“내가 위험해지는 건 괜찮은데, 클라레는 안 돼.”

“넌 처제가 아무것도 모르길 바라?”

레토가 물었다.

“응.”

노아의 대답엔 망설임이 없었다.

“피에타 가문은 제국과 함께 사라져야 해.”

“가문을 다시 부흥시킬 생각은 없어?”

“뭐 하러?”

레토의 질문에 노아가 비웃었다. 그러나 비웃음의 대상은 레토가 아니라, 바로 저 자신이었다.

“오러밖에 자랑할 게 없는 가문이잖아.”

“그게 대단하단 거잖아.”

“대단한 게 아니야.”

구시대의 산물이지.

노아는 오러야말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하는 유물이라고 생각했다.

“오러를 대신할 수 있는 무기는 널렸어.”

“그건 그렇지….”?

긍정하긴 했지만, 오러의 위력을 직접 겪어 본 레토는 여전히 안타까웠다. 

노아가 더욱 찬란하게 빛날 수 있는 재능인데, 정작 당사자는 그 힘에 미련조차 없었다.

‘그래서 내가 사랑에 빠진 거지만.’

욕심 없는 그녀는 지혜롭고 현명했다.

노아의 말대로였다. 오러를 대신할 무기는 이제 많다. 구태여 피 토하는 수련으로 오러를 깨달을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괜시리 오러의 존재를 드러냈다간 또 다른 사건에 휘말릴 수 있었다.

노아가 간절히 바라는 평화로운 일상, 특히 클라레의 천진난만한 생활이 부서질 거다.

더군다나 오러가 그렇게 강하고 완벽한 힘이었다면.

‘…피에타 가문도 그렇게 망하지 않았을 테지.’

레토는 굳이 저 감상을 말로 끄집어내지 않았다.

노아 역시 그 점을 알고 있으니까 저런 결정을 내린 걸 테니.

“그런데 레토.”

이야기의 화제를 돌릴 겸, 노아가 물었다.

“그건 뭐야?”

노아는 식탁 한쪽에 올려진 쭈글쭈글한 편지 봉투를 가리켰다.

“아, 내 친구 아들이 네 팬이래. 이제 곧 4살이래.”

“어머, 귀여워라.”

“참고로 그 친구는 국왕이고.”

“어머, 끔찍해라….”?

어린 팬이 줬다는 편지에 기뻐하던 노아의 얼굴은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그 붉은 머리 안보국 직원? 아르카?”

“어. 참 할 일 없는 국왕이지?”

“나라 꼴이 이 모양인 이유를 알겠네.”

“그건 선왕이 좀 문제였던 거라.”

레토가 드물게 친구 편을 들어줬다.

카일리코가 재수 없는 건 둘째 치더라도, 그놈이 왕국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까진 무시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너 발 엄청 넓구나.”

노아는 새삼 레토의 엄청난 인맥에 감탄했다. 세상에, 아들라보르 국왕과 친구 사이라니.

‘어쩐지 그 국왕이란 놈도 능글맞더라니.’

‘끼리끼리’라는 표현은 역시 과학이었네.

다시 생각해 보니 무척 잘 어울리는 두 사람이었다. 오히려 그사이에 끼인 락소가 어색해 보였다.

레토가 접시의 반을 비웠을 즈음.

“만나서 무슨 이야기했어?”

노아가 물었다.

“안보국이 사고 한번 칠 거 같다는 이야기?”

“무슨 사고?”

“간첩 사건을 조작할 거 같대.”

“뭐?”

깜짝 놀란 노아가 뒤늦게 큰소리를 낸 입술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하지만 동그랗게 커진 두 눈은 하릴없이 흔들거렸다.

“아마 주말에 수작질을 할 거 같아.”

“주말에? 아.”

노아는 주말에 잡힌 특함의 운항 자격시험을 떠올렸다. 태풍은 예정대로 북상하는 중이었고, 그날 해군은 최소 인력을 제외하고 전부 자리를 비울 거다.

눈엣가시인 아드벨로 대장과 오케아누스 중장은 자격시험을 위해 태풍이 닥친 바다에 머물고 있을 테니.

그때가 안보국에겐 절호의 기회였다.

때마침, 식당 창문이 바람에 덜컹거렸다. 대화를 멈춘 노아와 레토는 자연스럽게 창문을 바라봤다.

시커먼 창문 틈 사이로 날카로운 휘파람 같은 소리도 들렸다. 바람 부는 소리였다.

“…태풍이 거세겠군.”

레토가 중얼거렸다.

***

태풍이 북상했다.

[이번 여름 첫 번째 태풍은 중형 크기로 추정되며, 거센 돌풍으로 기물이 파손될 가능성이 큽니다.]

라디오에선 상당히 강한 바람을 동반한 비바람이 예상된다며, 해안 지역에는 해일 경보까지 전했다.

샤프 영지 주민들은 며칠 전부터 태풍을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어선들은 지정된 포구지역으로 피항하고, 시설물들을 꼼꼼하게 살폈다.

특히 이번에는 해일이 시내 안으로까지 들어올 가능성이 컸기 때문에, 사람들은 지정된 대피소로 피난을 갔다.

“와아! 피난이다!”

“아가씨, 이건 소풍이 아니에요.”

대피소로 갈 준비를 마친 아스가 클라레를 불렀다.

“짐은 다 챙기셨어요?”

“응!”

클라레는 아까부터 등에 메고 있던 가방을 풀어 보여 줬다.

“가서 친구들이랑 나눠 먹을 간식이랑, 가지고 놀 장난감이랑, 잘 때 안고 잘 식칼인형이랑….”?

클라레의 가방은 정말로 소풍에 어울리는 내용물로 가득했다.

“이것들만 있으면 태풍이 무섭지 않아요?”

“응! 사실 난 태풍 좋아해. 바람이 엄청 불어서 날아갈 거 같아. 날아가도 돼?”

“아가씨가 날아가면 제가 슬플 거예요.”

“그럼 아스를 위해서 땅에 붙어 있을게.”

“고맙습니다.”

비옷을 챙겨 입은 두 사람은 대피처로 지정된 마레이 학교로 향했다.

“우와! 내 한평생 이런 날은 처음이야!”

클라레는 아침인데도 어두컴컴하고 사람이 없는 시내가 낯설고 신기했다. 거센 바람도 무섭다기보다는 마냥 재미있었다.

“…아스, 손 잡아도 돼?”

그래도 조금 무서웠기 때문에, 클라레는 아스의 손을 꼭 쥐었다.

“아스.”

“네?”

“언니랑 형부랑, 할머니랑 할아버지는 괜찮아?”

아이는 태풍이 부는 일요일에도 일하러 간 가족들을 걱정했다.

“원래 군인은 어떤 상황에서도 나라를 지키는 거랍니다. 그래서 대단하고 존경스러운 직업인 거예요.”

아스의 말에 클라레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조금 걱정돼.”

“위험한 일은 없을 거예요.”

“우웅, 어른이란 참 고되고 힘들구나.”

고개를 끄덕인 클라레가 물었다.

“그러면 어른이 되어서 좋은 점은 뭐야?”

“…….”?

아스는 대답하지 못했다.

“…없어?”

“제가 생각하기엔 없네요.”

“어른이란 뭘까?”

“태풍이 불어도 일하러 가는 불쌍한 존재죠.”

“노예구나.”

***

어린 클라레가 동정한 노예들은 태풍이 몰아치는 바다 한가운데 있었다.

그들이 탑승한 거대한 함선이 파도가 몰아치는 위험천만한 바다 위에 떠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곤 있지만, 사방에서 몰아치는 집채만 한 파도에 매 순간이 위기였다.

그런 배 안에서.

“월급을 받는 한, 너희는 자본의 노예고 나라의 노예병이지.”

아드벨로 대장은 홀로 여유롭게 핫초코를 홀짝이는 중이었다.

술을 부은 핫초코 위에는 불에 살짝 그을린 마시멜로와 바삭한 비스킷이 올려져 있었다. 그리고 생크림까지 가득했다.

배는 당장이라도 뒤집힐 것처럼 흔들거렸지만, 아드벨로 대장의 손에 들린 핫초코는 흔들림 없이 편안했다.

그러나 반대편 손에 들린 13장의 각서는 이 보란 듯이 흔들거렸다.

“그러니 지금 자신의 처지를 비관할 시간이 있으면, 해군을 직업으로 삼은 네놈들의 과거를 원망해라.”

아드벨로 대장의 손에 들린 각서엔, 지금부터 행해질 자격시험은 결코 군내 가혹행위가 아니며, 자의로 참여한다는 서약문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거기엔 특함 소속 13명의 서명이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