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5화 (105/245)

105.

“내가 벨로 대위 팬이니까!”

카일리코 국왕은 헤벌쭉 웃으며 품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벨로 대위는 수도에서도 유명하거든! 해군 모병 홍보 포스터에 찍힌 사진은 매번 도난될 정도인데…!”

국왕이 즐겁게 떠드는 사이.

“…야.”

레토가 락소에게 물었다.

“저 새끼 죽여도 되겠냐?”

“술집을 중심으로 반경 5km 떨어진 곳에서 죽여. 그러면 알리바이 증명해 줄게.”

“이것들이 국왕 앞에서 못 할 말이 없군.”

국왕 시해 모의를 눈앞에서 직접 들었음에도 카일리코는 태평했다. 그는 아까 꺼냈던 것을 레토에게 건넸다.

주름이 살짝 접힌 편지 봉투였다.

“…….”

레토는 역겨운 시선으로 편지를 노려봤다.

저 망할 국왕 새끼가 건넨 편지 봉투는 알록달록한 분홍색이었고, 편지를 봉한 스티커는 하트 무늬였다.

“으악….”

옆에서 힐끔거리던 락소가 기겁했다. 그는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이거 네가 썼냐?”

“우리 아들이 썼는데?”

국왕이 말했다.

“어쩐지 정성스럽더라.”

편지를 건네받은 레토가 그것을 주머니에 나름 조심해서 넣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왕자님이 올해 몇 살이더라.’

제 기억이 맞는다면, 아들라보르 왕국의 하나뿐인 왕자님은 올해 나이가 4살일 거다.

“왕자님이 지금 몇 살이셨지? 4살?”

때마침 락소가 물었다.

“올가을에 4살이 돼. 엄청 귀엽다? 이젠 혼자서 글도 쓴다고.”

아들을 자랑하는 국왕의 얼굴엔, 조금 전에 노아의 팬이라고 말했을 때보다 훨씬 즐겁고 행복한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사진 한번 볼래?”

그는 지갑에서 아들 사진을 꺼내 보여 줬다. 조그만 사진 속에는 똘망똘망한 인상의 남자아이가 씩 웃고 있었다.

아이 뒤에는 갈색 머리를 풀어 헤친 인자한 인상의 여인도 함께였다. 왕후였다.

“귀엽지? 얼마 전 주말에 같이 놀 때 찍은 거야.”

“다행히도 왕후 전하를 닮았네.”

“다행이다. 왕후 전하를 닮아서.”

레토와 락소는 진심으로 안도했다. 물론 아직 어리기 때문에 조금 더 지켜봐야 했지만, 지금은 왕후를 닮은 것 같았다.

“그런데, 노아는 어떻게 아는 건데?”

레토가 다시 물었다.

“군사 박물관에서 해군 모병 홍보물 사진을 봤나 봐. 그때 한 번 보고는 완전히 푹 빠졌거든.”

“그런 것도 전시해?”

“홍보물도 역사의 증거니까.”

그렇게라도 해야 분실이 안 되지.

국왕이 가볍게 말하곤 있지만, 실제로 노아가 모델인 모병 포스터는 분실 사고가 비일비재했다.

어지간한 연예인보다 아름다운 외모에 군 제복이라는 근사한 차림으로 포스터를 바라보는 사람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니.

포스터를 붙여 놓으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니, 몇 장을 예비용으로 준비해도 항상 분실되었다. 심지어 국방부 내에서 도난당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한때는 이 문제로 노아의 홍보물 촬영을 금지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며 국방부에서 심각하게 논의된 적도 있었다.

물론 모병 지원율이 늘어났기 때문에 흐지부지되었지만.

“벨로 대위도 고생 많아.”

국왕이 안타깝단 듯이 중얼거렸다.

“쫓아다니는 미친놈은 없냐?”

“아직은.”

적어도 아직, 레토가 아는 바로는 없었다.

그는 새삼 노아가 저에게 얼마나 과분한 사람인지 또 한 번 깨달았다. 세상에, 사진 한 장 찍은 거로 수도에까지 그리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니.

‘나 진짜 운 좋은 남자였네.’

그렇게나 대단한 사람이 고작 저 한 사람을 좋아해서 그런 마음고생을 했다고 생각하면, 정말 면목이 없고 미안했다.

‘그런데….’

사진을 남겨도 되나?

레토는 문득 걱정이었다.

노아는 행방불명이라는 피에타 가문의 후계자다. 그리고 목표하는 바가 있었다. 친부모님의 시신을 찾고, 제국을 무너트리는 것.

그런데 이렇게 당당하게 얼굴을 공개해도 되는 걸까.

만약 사진 속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큰일일 텐데.

“야.”

부르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리니, 사진을 도로 지갑에 넣는 카일리코가 눈에 들어왔다.

그가 드디어 본론을 꺼내려는 듯했다.

한 나라의 국왕이 정체를 숨기고 남부까지 내려온 이유.

“요전에 너랑 네 아내가 체포한 간첩들….”

아, 잠깐만.

잠시 말을 끊은 그가 락소에게 미리 경고했다.

“잘 들어 둬. 나중에 네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르니까.”

“그 전에 간첩 체포 작전이 있었단 걸 먼저 알려 주면 안 될까?”

락소가 안주를 깨작거리며 투덜거렸다.

“무능력한 소리 마라. 어차피 알고 있었잖아.”

“나랑 직원들 목숨 걸 일은 없지?”

“기껏 해 봐야 지난번에 네가 육군 정보 건드렸을 때보다 심각하고 위험한 정도야.”

“너 나 죽일 거냐?”

해외 도피를 준비해 둬야겠네.

친구를 잘못 사귄 자신의 죄라며, 락소는 제 처지를 비관하고는 가슴 위로 성호를 그었다.

“어쨌든, 호송된 간첩들을 다시 심문했는데….”

국왕이 레토를 바라봤다.

“유의미한 증언이 나왔어.”

“증거는?”

물어보는 레토는 굳은 얼굴이었다. 손에 쥐고 있던 잔도 놓은 채, 깍지를 낀 제 손가락을 연신 만지작거렸다.

“증언만으론 안 돼. 완벽한 증거가 필요해.”

“그래서 지금 테네브레가 현재 수색 중이야.”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건데?”

락소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물었다.

그가 물어본 질문의 의도는 ‘왜 이렇게까지 일을 열심히 하느냐’가 아니라, ‘왜 그렇게까지 비밀스럽게 조사하느냐’였다.

국왕이 방첩 기관인 안보국을 이렇게까지 배제하고 일을 진행하는 것이 의아했다. 이건 안보국의 존재 의미가 무색해지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사실, 락소는 이미 대답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도 카일리코에게 직접 듣는 게 더 정확할 테지만.

“그럼 어쩌겠냐.”

카일리코가 손가락으로 미간을 문질렀다. 힘없는 목소리가 그간의 피곤과 고뇌를 짐작하게 했다.

“안보국도 얽혔는데.”

간첩들을 심문해서 얻은 정보에 따르면, 그들이 국내에서 접촉한 배반자 중에는 방첩과 관련된 정보를 준 사람도 있었다.

“이 새끼들이 단순히 운이 좋아서 여태 안 들켰던 게 아니야.”

쯧, 하고 혀를 짧게 찬 국왕이 이어 말했다.

“행동 동선과 이동 시간대, 전부 그 지역 경찰들의 순찰을 아슬아슬하게 피하고 있어.”

“그게 안보국과 얽혔다는 증거는? 방첩과는 전혀 연관이….”

“이 자식들이 긁어모은 도난 신분증과 절도했던 차량들.”

확인해 본 바, 전부 안보국과 관련된 사람들의 것이었다.

“안보국에 사무용품 납품하는 업체 직원, 안보국에서 청소하는 직원의 사위가 몰았던 차. 이런 식으로 얽혀 있더군.”

아무리 사람이 몇 다리를 건너면 아는 사람이 나온다고 해도, 이번 사건은 그런 우스갯소리로 치부할 수 있는 우연이 아니었다.

더욱이 안보국과 관련되었기에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국방부 장관한테 도움을 좀 받았지.”

“장군님께서….”

레토가 떨리는 목소리로 백사자를 불렀다.

알버스는 이곳 남부로 내려오기 전까지, 수도에서 안보국 국장과 친밀하게 지냈다.

대낮에도 술을 곁들일 만큼, 그리고 안보국의 체포 현장을 구경하러 갈 만큼.

백사자는 마음에도 없는 술친구까지 해 가며 안보국 국장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그의 정보와 동선을 파악했다.

“그럼 네가 안보국으로 위장해서 온 건….”

의중을 짐작한 레토가 카일리코를 바라봤다.

카일리코는 바로 그거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보국 국장은 내가 자신을 의심한단 것을 짐작할 거야.”

그러니 국왕을 비롯하여 나라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해군을 이용할 것이다.

“설마…!”

떠오르는 가능성 하나에 락소가 경악했다.

하지만 누구도 그의 생각을 부정하지 않았다.

아마 그것이 정답일 테니까.

“간첩 사건을 조작할 테지.”

“내 해군에서….”

레토가 웃으며 물었으나, 어둑하게 가라앉은 붉은 눈동자는 그 가소로운 계획을 비웃다 못해 경멸하고 있었다.

“그딴 조작질을 하겠다고?”

“와, 안보국 진짜 갈 데까지 갔네….”

락소 역시 충격에 머리가 아찔했다.

“비단 시선 돌리기 탓으로 그러는 건 아니지만.”

카일리코가 물을 홀짝이며 중얼거렸다. 그는 지금이라도 독한 술을 한 병 시킬까, 고민이었다. 정말 속이 타들어 가는 대화 주제라 맨정신으로 버티기엔 조금 힘들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이 또렷한 정신으로 대화를 이어 가야 했다.

“사실, 내가 요즘 안보국을 개편할 생각이거든.”

전쟁이 끝난 뒤, 안보국은 이전처럼 제대로 된 성과를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부패된 문제점도 속속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선왕 때부터 썩기 시작했던 곳이야. 그 망할 놈, 안보국을 통해서 불법 자금도 세탁하고, 정치공작까지 시켰더라고.”

그 탓에 현 안보국은 모든 방면에서 역량이 떨어졌다. 현재 해외로 파견 나가는 공작 활동이 줄어든 것도 이 때문이었다.

만약 그들의 능력이 월등했다면, 북부 피니치 국경 사건의 전말을 일찌감치 파악했을 거다.

하지만 그 역시도 사건이 일어난 뒤에야 파악했다. 심지어 그 사건으로 간첩이 넘어왔단 사실 역시 알아내지 못했다.

“지금도 봐.”

카일리코가 조소했다.

“해군 한번 기 잡으려고, 안보국의 직원 대다수를 남부로 보내는 이 대범함을.”

모든 행동이 안보국에게 자충수가 되었다.

그렇기에 카일리코 국왕은 이번 기회를 빌미로 안보국을 휘어잡고 개편할 생각이었다.

“너도 참 아버지 복 없네.”

레토가 씁쓸하게 웃었다. 카일리코는 동의한단 듯이 말없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비슷하게 웃었다.

“그래도 너만 할까.”

잔을 들어 머금던 카일리코의 시선이 레토를 향했다.

“이번에는 반드시 잡을 수 있을 거다.”

디모네 닉스 소장.

절친한 벗의 다짐에, 레토는 그저 조용히 눈을 감았다.

***

자리는 일찍 파했고, 레토는 붉은 애마를 몰고 다시 언덕 위 벨로 저택으로 향했다.

“오케아누스 후작과 장군은 어떻게든 너한테 비밀로 하려고 했던 모양이야.”

“그래도 넌 아비 복 없는 대신에 좋은 어머니와 할아버지를 뒀네.”

“우리가 이 나이에 어린아이 취급받는 게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 일이냐.”

“넌 그냥 이대로 모르는 척하는 게 좋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그의 머릿속은 카일리코 국왕의 목소리로 어지러웠다.

‘틀린 말은 아니지.’

저택에 들어선 붉은 애마는 차고 안에 주차되었다. 차에서 내린 레토는 괜한 마음에 목덜미를 벅벅 쓸었다.

모르는 척했을 뿐이다.

아이트라와 알버스가 절 위해 그 모든 것을 비밀로 했다는 걸. 그래서 레토 역시 굳이 아는 척하거나 직접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인간은 내 손으로 죽여야 해.’

그가 노아의 복수와 다짐을 거리낌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이유는 별거 아니었다.

저도 비슷한 각오를 오랫동안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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