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4화 (104/245)

104.

취향을 무시당한 클라레는 심통 난 표정을 지었다.

“아니거든? 아니거든?”

클라레가 거친 콧숨을 내뱉으며 씩씩거렸다.

그러면서도 언니에게 아끼는 이야기책을 빼앗길까, 레토에게 다시 책을 받아 허겁지겁 제 옷 안에 넣었다. 

그러고도 불안해서, 클라레는 바지 안까지 책을 반쯤 밀어 넣었다. 얇은 여름옷 위로 네모난 책이 삐죽 튀어나왔다.

“네오는 용감하고 지혜로운 변태, 아니, 소녀야!”

“차라리 언니가 읽는 ‘두 줄짜리 아가씨였을 터’를 읽어. 거기에도 귀엽고 사랑스러운 소녀가 주인공으로 나오잖아.”

“에이, 그건 좀 유치한데….” 

클라레가 투덜거렸다.

“그리고 언니 취향은 좀 고리타분해서, 난 좀 별로….” 

느닷없이 제 취향을 부정당한 노아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이때, 레토는 직감했다. 잘못했다간 저 자매들의 싸움에서 튄 불똥이 저에게 닥칠지도 모른다고.

“나 씻고 옷 갈아입고 올게.”

레토는 자연스럽게 자리를 벗어났다.

그의 판단은 정확했다.

벨로 자매는 레토가 씻고 나올 때까지도 자신들의 취향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티격태격 싸우고 있었다.

“언니는 유치하고 오글거리는 것만 좋아해! 만날 귀족 영애 꼬마가 주인공인 같은 것만 읽고!”

“클라레 네가 읽는 변태 주인공도 귀족 영애잖아.”

몇 걸음 물러서서 지켜보던 레토는 홀로 생각했다.

어린 여동생에게 이기려고 기를 쓰는 노아나, 그런 언니한테 안 지려고 바득바득 소리치는 클라레나.

‘둘 다 귀엽네.’

어쩜 우리 집 여자들은 저리도 귀엽고 사랑스러울까.

그래도 두 사람에게 붙잡혀 누가 더 나은지 대답하게 되는 건 사양이었기에, 레토는 먼저 식당으로 향했다. 때마침 부엌과 연결된 문에서 아스가 나왔다.

“처형.”

레토가 평소보다 과하게 밝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하필 노아에게 들었던 아티의 미래가 떠오른 탓이었다.

“술 드셨어요?”

다행히 아스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레토는 아스의 저런 상냥한 무심함을 좋아했다.

“오늘 저녁은 뭔가요?”

“염장한 대구를 채소들과 같이 구웠어요. 그리고 대구 뼈로 우린 육수를 넣은 파스타도 있답니다.”

그리고 백포도주도 준비되었다고.

군침 도는 저녁 식사 메뉴에 레토가 입맛을 다셨다.

“할머님이랑 할아버님이 어서 오셔야 할 텐데.”

“그 전에 작은 주인님이랑 아가씨 싸움이 먼저 끝나야 할 텐데 말이죠.”

아스가 식당 밖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노아와 클라레는 아직도 독서 취향으로 으르렁대는 중이었다.

“전 두 사람이 말하는 책은 안 읽어 봐서 모르겠는데….” 

레토가 아스에게 물었다.

“처형은 둘 다 읽어 봤습니까?”

“읽어 봤고, 제 취향은 아니었습니다. 전 ‘원작을 비틀면 일어나는 일’이 더 좋아요.”

그런데 작가가 연재를 갑자기 중단해서 뒤가 없는 게 흠이라며, 아스가 아쉬움에 입맛을 다졌다.

“저도 그렇게 단호하게 말할 수 있으면 좋겠군요.”

“말하면 되죠?”

“전 두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 싫습니다. 두 여자를 향한 제 사랑은 누가 뭐라 해도 진심이니까요.”

“말하는 본새가 참 재수 없네요.”

누가 들으면 바람피우는 줄 알겠다며 아스가 웃는 얼굴로 빈정거렸다.

그때였다.

따르르릉-!

“내가 받을래! 내가 받을래!”

벨이 울리자 언니와 싸우던 것도 잊은 채, 클라레가 시끄럽게 울리는 전화기를 향해 달려갔다.

“여보세요, 벨로입니다!”

씩씩하게 전화를 받은 클라레는 ‘네, 네.’라는 대답을 몇 번 정도 반복했다. 그러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 형부는 친구 없는데요?”

“처제, 그리 말하면 내 마음이 아파요.”

어느새 클라레의 뒤에 나타난 레토가 슬픈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클라레는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치만 형부는 친구 없잖아요!”

“결혼식 때 내 들러리 서 준 사람은 내 친구였어요.”

“좀 어중간하게 생긴 아저씨?”

이내 수화기 너머로 쫑알쫑알 소리가 들렸다. 레토는 웃음을 참으며 클라레에게 전화를 건네받았다.

“전화했냐, 어중간하게 생긴 아저씨?”

[야! 방금 그 꼬맹이가 네 처제지? 그 유명한 해군의 전설이지?]

“처제. 이 어중간한 아저씨가 처제에게 사인해 달라고 하는데요? 전설을 만나서 영광이라고 합니다.”

“이잉, 그건 좀 곤란한 거얼?”

클라레가 한 손으로 제 볼을 감싸며 몸을 살살 흔들었다.

“사인 같은 거 함부로 해 주면, 나중에 우락부락하게 생긴 깡패 아저씨들이 나도 모르는 빚 문서를 들고 찾아온다고 했어.”

“우리 처제는 어쩜 이리 똑똑하고 야무질까!”

전화 중인 것도 잊은 채, 레토가 클라레를 향해 박수갈채를 쏟아냈다. 클라레는 손바닥 뽀뽀를 날리며 감사하다고 호응해 줬다.

[…저기, 나 있거든?]

수화기 너머로 전부 듣고 있던 락소가 허망한 목소리로 제 존재를 알렸다.

“아직도 있었어? 어중간하게 생긴….” 

레토가 또 놀리려던 찰나.

[아르카가 왔어.]

락소가 먼저 용건을 말했다.

“…아, 왔다고 했었지.”

이름을 듣자마자 레토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 모습을 아래서 전부 보고 있던 클라레가 냉큼 노아에게 달려갔다.

“형부가 사람 하나 땅에 묻고 온 것 같은 표정 하고 있어.”

“그런 표현은 또 어디서 배워 온 거야.”

“오빠!”

“진짜 그 새, 아니….” 

서둘러 말을 멈춘 노아가 속으로만 욕했다. 하여튼 망할 오빠 새끼, 다음에 잡히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응, 알았어. 잠깐이면 나갈게.”

노아가 레토에게 다가갔을 때, 그는 이미 전화를 끝마치고 수화기를 내린 상태였다.

“어중간하게 생긴 아저씨가 뭐래요?”

클라레가 물었다.

“음….” 

잠시 머뭇거리던 레토는 곧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잠깐 나갔다가 올게요.”

“어? 이제 저녁 먹어야 하는데?”

“친구가 잠깐 보자고 하네요.”

“가족보다 친구가 더 중요해요? 자기 너무해!”

“요게 진짜.”

노아가 클라레의 입을 막으며 레토에게 물었다.

“락소 씨 전화야?”

“응. 잠깐 좀 보자고 해서.”

“급한 일이야?”

“아마도.”

애매모호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노아는 굳이 레토에게 나가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

“이잉, 나랑 같이 저녁 먹어어!”

왜냐하면 클라레가 대신 칭얼거렸기 때문이다.

“가지 마! 가지 마!”

“누가 보면 네가 내 남편이랑 결혼한 줄 알겠다.”

노아가 바닥에 드러누워 칭얼거리는 클라레를 일으켰다.

“…넌 또 왜 드러눕고 있어?”

황망한 시선이 닿은 곳엔, 클라레의 찡얼거림에 감동한 레토가 가슴을 부여잡고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덩치도 큰 게 복도에 웅크리고 누워 있으니 야생동물이 치명상을 입고 쓰러진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도 레토는 클라레의 귀여움에 커다란 타격을 입긴 했다.

“형부!”

클라레가 물었다.

“내가 중요해, 아니면 그 어중간하게 생긴 아저씨가 중요해?”

“아내가 더 중요합니다.”

“형부 너무해! 도대체 어떤 여자야!”

“그 여자는 나야. 네 언니.”

“…아.”

언니랑 결혼했었지.

혼자만의 놀이에 푹 빠졌던 클라레가 그제야 정신 차렸다.

어쨌거나 노아는 레토의 외출을 허락했다. 락소는 연애 중에 몇 번쯤 만난 적 있었다. 그렇기에 그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알았다.

결혼한 이후에 한 번도 없던 전화가 처음 걸려 왔다. 그리고 이 저녁에 잠깐 나와 달라고 부탁까지 할 정도면, 아마 중요한 일인 게 틀림없었다.

“어머, 저녁 안 드시고 나가세요?”

식당에서 나온 아스가 물었다.

“저녁은 어떻게 할까요? 오시면 드실래요?”

“죄송합니다. 괜찮다면 남겨 주시겠습니까?”

“형부 변했어. 결혼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기강이 해이해져서 집 밖으로 나다니는 거 봐. 라디오 부부 상담 방송에 사연 보내는 일도 곧이야.”

“처제, 제발 그런 말 하지 마요….” 

레토는 철렁이는 가슴을 억누른 채로 붉은 애마에 올라탔다. 

“올 때 맛있는 거!”

클라레의 씩씩한 배웅을 받으며, 붉은 애마가 어스름한 여름 저녁을 가로질러 달렸다.

도착한 곳은 번화가에서 살짝 떨어진 골목에 있는 술집이었다.

입구 앞에는 ‘아콘’이라 적힌 조그만 간판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들어선 가게 내부는 손님들로 북적거렸다. 좋은 술과 거기에 잘 어울리는 안주 요리가 유명한 덕에 늘 장사는 성황이었다.

“어머, 오빠 왔네?”

덥수룩한 수염의 건장한 사내가 레토를 보며 반갑게 인사했다.

“결혼한 뒤로 처음 오네! 그간 안 와서 섭섭했다고.”

“결혼식 때 참석해 줘서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이젠 결혼했으니 자주 오면 안 되죠.”

“그건 또 그렇네! 하하!”

시원스럽게 웃어 젖히는 사내의 몸을 따라 하얀색 앞치마도 살랑살랑 흔들렸다.

“사장님은 늘 계시는 방에 있어.”

“알려 줘서 고마워요.”

레토는 1층 구석에 있는 조그만 개인실 문을 열었다.

“와아! 이게 누구…!”

문을 열자마자 기분 나쁜 붉은 머리가 보였고, 레토는 다시 문을 닫았다.

그러나 닫히려던 문은 튀어나온 팔에 의해 붙잡혔다. 

“섭섭하게, 진짜.”

붉은 머리의 남자가 서운하단 듯이 레토에게 투정했다.

“오랜만에 본 친구잖아. 좀 더 살갑게 대해 주라?”

“내가 너랑 언제부터 친구였지?”

레토가 싸늘한 시선으로 눈앞에 있는 남자를 노려봤다.

그는 오늘 노아를 상담했던 안보국의 직원이었으며, 아르카란 가명을 쓴 카일리코 국왕이었다.

“청첩장을 안 받았는데도 결혼 선물을 가져왔으니, 아주 친한 친구지.”

“널 보면 안 보낸 게 정답이었지.”

“바쁜 날 배려해서 안 보낸 거잖아.”

“일부러 안 보낸 거야.”

달라붙는 카일리코를 밀어내며 들어온 레토가 자리에 앉았다.

“차 몰고 왔냐?”

락소가 살짝 홍조 띤 얼굴로 물었다. 이미 한 잔 마시고 취기가 조금 오른 상태였다.

“물 줘. 너도 물 마시고.”

“하여튼 저거 술 약한 건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구만.”

자리로 돌아온 카일리코가 락소를 보며 큭큭거렸다.

“나도 물 줘. 오늘은 취할 생각 없거든.”

내일도 해군 놈들 괴롭힘을 견뎌야 했기 때문에, 카일리코 역시 술을 그만 마시기로 했다.

결국, 술집에 모인 세 사람의 손에는 맹물만 들렸다. 대신 레토는 돌아갈 때 술 한 병을 사서 가기로 했다.

“셋이 모인 건 오랜만이네.”

카일리코가 즐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삼총사다, 삼총사!”

“삼 등신이었겠지.”

“머리, 가슴, 배?”

“그러면 내가 머리하련다!”

맹물도 술처럼 부어 마시는 카일리코에게, 레토가 물었다.

“너, 내 아내는 왜 찾아온 거야?”

“그거야 당연히….” 

카일리코가 입을 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