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국왕 시해를 예고하며 돌아서는 글로리아의 뒷모습은 과연 믿음직스럽고 위엄이 흘러넘쳤다.
“대장님이 정말로 죽여 줬으면 좋겠다….”
글로리아의 등을 보며 중얼거리던 레토가 다시 노아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었다.
“왜? 아파?”
“…사슴 같네.”
“응?”
“사슴 닮았다고. 너 귀여워.”
“그거야 당연히 알고 있었지. 그런데 내 어디가 사슴처럼 귀엽고 보드랍고 사랑스러운데?”
“뒤에 두 개는 어디서 나타난 형용사냐?”
하여튼 또 기어오르지.
노아는 레토가 식혀 준 팔을 살펴봤다. 열감이 사라지니 파란색 낙뢰 무늬도 눈에 띄게 흐릿해졌다.
“무늬는 언제 사라져?”
레토가 물었다.
“금방 사라질 거야.”
폭주했던 오러는 아주 적은 양이었고, 아마 오늘 찬물로 씻으면 금방 사라질 흔적이었다.
“다친 건 걱정인데, 다친 부위가 너무 예쁘다. 나랑 전혀 다르구나.”
레토가 제 손바닥을 펼치며 말했다. 노아와 달리 빨갛게 흉이 진 상태였다.
“난 내 몸에 있던 오러가 폭주해서 그래.”
몸속에 흐르는 오러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면 이런 식으로 폭주하게 된다. 그때 피부 위로 오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게 된다.
노아의 설명에 레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걱정되는 마음이 더 크니까, 다음부터는 조심해 줘.”
“알았어.”
“훈련은? 더 할 수 있겠어?”
노아에게 의견을 물었지만, 이미 레토의 마음은 한쪽으로 기울어진 상태였다. 노아의 상처 입은 팔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래.”
다행히 노아는 괜찮다고 고집부리지 않았다. 레토의 얼굴에 안도가 스쳤다.
연무대에서 내려온 둘은 수건으로 땀을 가볍게 닦았다. 노아는 훈련복 소매를 당겨 코에 대고 킁킁거렸다. 날이 더우니 조금만 움직여도 금방 땀범벅이 되었다.
“냄새 날까 봐 그래?”
지켜보던 레토가 엷은 미소를 지었다.
“노아 넌 땀 냄새도 달콤하니까 걱정 마.”
“너 방금 진짜 변태 같았어.”
“변태가 아니라, 애처가라고 하는 거야.”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지.”
“코에 걸면 코뚜레인데?”
“…….”
대꾸하기도 귀찮아진 노아는 수통에 든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런 노아를 보며 소리 죽여 웃던 레토도 따라서 물을 마셨다.
그리고 노아에게 물었다.
“나 요즘 어때?”
“여전히 말 안 듣고 얄밉지. 귀여우니까 봐주는 줄 알아.”
“어….”
레토가 머뭇거렸다.
“훈련 성과를 물어본 건데…?”
“…….”
노아는 두 손에 얼굴을 감췄다.
창피해진 탓에 얼굴로 열이 화끈 달아올랐다. 다시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는 기분이었다.
“푸하하하!”
웃음이 터진 레토는 그대로 노아를 번쩍 안아, 그늘진 곳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손부채질까지 해 줬다.
“…훈련은.”
한결 진정한 노아가 슬그머니 말했다.
“정말 잘하고 있어.”
아무 일도 없었단 듯이 태연스럽게 말했지만, 노아의 귀와 목은 빨갛게 물든 채였다. 레토는 놀리는 대신에 손부채질을 계속해 줬다.
“레토 너, 오늘은 검 안 떨어트렸잖아.”
“응.”
칭찬받아 들뜬 아이처럼, 레토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생각해도, 오늘은 좀 잘한 거 같아.”
페미나에 담긴 노아의 오러를 느끼고 적응할 때마다, 레토는 몇 번이나 검을 떨어트렸었다. 그리고 오러에 노출된 몸은 극심한 피로를 호소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훈련이 중간에 멈추긴 했지만, 처음으로 검을 손에서 떨어트리지 않았다. 그리고 몸에 쌓인 피로 역시 눈에 띄게 감소했다.
처음과 비교하면 오러에게서 느껴지던 흉포함도 분명 줄어들고 있었다.
“네 오러랑 친해진 기분이야. 페미나도 손에 점점 익어 가는 것 같고.”
“전부터 생각했지만….”
노아가 레토를 밉지 않게 노려보며 말했다.
“넌 정말 뭐든 능숙하게 해내네. 도대체 못 하는 게 뭐야?”
“음….”
레토는 제법 진지하게 고민했다.
“나도 내가 뭘 못 하는지 잘 모르겠어. 아마 못 하는 걸 못하지 않을까?”
“방금 건 진짜 재수 없었어.”
얄미워진 노아가 레토의 옆구리를 살짝 꼬집었다. 애정만 느껴지는 아릿한 통증에 레토는 또 웃음을 터트렸다.
잠깐 숨을 돌리고 나온 둘은 훈련장에 있던 군용차에 올라탔다. 레토는 먼저 운전석에 앉았다.
“넌 팔 다쳤으니까, 내가 운전할게.”
다행히 노아는 순순히 양보했다. 레토는 몰래 속으로 안도했다. 곧 시동이 걸린 군용차가 앞으로 나아갔다.
“와, 차 안도 후덥지근하네.”
레토가 냉풍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시원한 바람이 조금씩 들어왔다.
“그런데 노아.”
시원한 바람에 숨을 돌린 레토가 물었다.
“국왕이 너보고 뭐라고 했어?”
“오빠 이야기로 내 허파를 뒤집었지.”
다시 생각해도 애국심이 뚝 떨어지는 상판대기였다.
‘일부러 날 만나러 온 건가?’
그러나 국왕에 대한 비호감과 별개로, 노아는 그 미친놈이 저를 찾아온 이유가 궁금했다. 단순히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고 왔을 리가 없었다.
만약 그런 거면 진짜 미친놈이었고.
‘거기다 그 새끼….’
노아가 훈련에 집중하지 못했던 이유.
“디모네 닉스 소장의 체포 말이야.”
디모네 닉스 소장.
그 이름을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피가 거꾸로 솟구치려 했다. 노아에게 저 이름의 주인은 찢어 죽여도 시원찮은 놈이었다.
문제는 국왕이 왜 그 이름을 저에게 말했는가, 였다.
‘나에 대해 아나?’
하지만 분명 글로리아가 말했다. 저와 클라레의 신분은 아드벨로의 모든 권력을 사용하여 감쪽같이 감춰졌다고. 이 나라의 어떤 누구도 자신들의 정체를 모른다고 말했다.
글로리아는 이 사실에 아드벨로를 걸고 맹세까지 했다.
‘아니면 우연인가?’
확실히 국왕은 노아의 정체를 떠보는 시늉 따윈 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할머니가….’
노아는 얼마 전, 글로리아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자의 흔적을 찾았다.”
아직 레토에게 자신의 비밀을 밝히지 않았고, 간첩들을 체포하기 전. 글로리아는 노아에게 저렇게 말했다.
‘할머니는 내가 그자에게 접근하기 쉽도록 일부러 작전에 포함시켰고, 그 여파로 국왕이 날 찾아온 거야.’
즉, 국왕은 아직 노아의 정체를 모른다.
퍼즐 조각 하나를 제자리에 끼워 넣자, 다른 조각들도 연이어 자기 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럼 그자만 잡으면…!’
조용히 가슴 속에 품어 둔 증오에 불을 지피던 찰나.
“노아.”
레토가 노아를 불렀다.
“오빠 이야기는 뭔데?”
그의 목소리에 노아가 겨우 상념에서 벗어났다. 노아는 호흡을 고르며 흥분한 마음을 빠르게 진정시켰다.
그리고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단 듯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오빠가 테네브레가 된 거, 아스 때문이었어.”
“나와 같은 실수를 하시려는 건가….”
레토가 안타까이 중얼거렸다. 그는 노아를 위해서랍시고 이기적으로 굴었던 얼마 전의 자신을 떠올리며 반성했다.
“너랑은 사정이 다르지.”
노아가 곧장 반박했다.
“적어도 넌 ‘널 위해 헤어질게.’라는 멍청한 소리는 안 했잖아. 오빠는 아예 대놓고 아스에게 그렇게 말하고 헤어졌다고.”
“처형이 형님을 죽이지 않은 게 용하네.”
“어쩜 언니랑 동생이 똑같이 연애운이 없나 몰라.”
노아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랑에 빠질 거면 멀쩡한 남자에게 빠졌어야지, 하필 상대가 뻔뻔하고 능글거리고 이기적인 놈이었는지.
“그런 건 둘 다 안 닮아도 되는데.”
“만약에 나도 그딴 말을 했으면….”
“궁금하거든 한번 말해 봐.”
어떻게 될지 직접 보여 주겠다며 노아가 싱긋 웃었다.
레토는 위험을 감수하고 궁금증을 해결하는 대신, 다른 것을 질문했다.
“…처형은, 형님을 용서하실까?”
이에 노아가 대놓고 비웃었다.
“차라리 클라레가 조신해지는 게 더 가능성 있지.”
노아는 확신했다.
“둘은 완벽하게 끝났어.”
그리고 그걸 아티가 모를 리가 없다. 아스에 대해 누구보다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바로 아티였으니까.
잠시 후, 군용차가 본부 건물 주차장에 들어섰다.
레토는 시동을 끄며 안전띠를 풀었다.
“하지만 그때 뵈었던 형님은, 처형과 다시 사랑하게 될 거란 자신감으로 가득하던데?”
“아스는 성격상 절대 오빠를 용서하지 못해.”
마찬가지로 안전띠를 푼 노아는 차에서 내리기 전에 말했다.
“아스와 오빠의 결말은 딱 두 가지야.”
오빠가 살해당하거나.
“아니면 오빠가….”
그러나 노아의 마지막 말은 끝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레토는 ‘아스가 아이는 갖고 싶어 했으니까, 아마 오빠는….’ 라고 중얼거리는 노아의 섬뜩한 혼잣말을 들어 버리고 말았다.
레토는 곧장 안보국에 상담을 예약하기로 결심했다.
***
그날 저녁.
“형부, 씨만 받는 게 뭐야?”
클라레는 퇴근하고 돌아온 레토에게 물었다.
“…응?”
질문의 뜻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레토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클라레가 한 번 더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물었다.
“씨만 받는 게 뭐야?”
“씨앗을 받는다는 거 아닐까요?”
꽃씨나 채소 씨앗 같은 거.
레토가 예까지 들어 가며 질문에 대한 제 나름의 답을 말해 줬다.
하지만 클라레는 그게 아니라면서, 제 품에 있던 책을 보여 줬다.
“여기에 적혀 있어.”
“이게 뭔데요?”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책!”
책을 건네받은 레토가 책 제목을 읽었다.
“‘남주의 수양딸이 되었습니다’라….”
제목을 읽자마자, 레토는 이게 정상적인 내용의 책은 아닐 거라 직감했다.
“여기에, 씨만 받는단 내용이 나와요?”
“응. 근데 난 잘 모르겠어.”
“몰라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질문을 대충 넘겨 버린 레토는 노아가 말하다 만 아티의 끔찍한 결말 중 하나를 알아 버린 기분이었다.
“…이 책, 재미있나요?”
레토가 물었다.
“이거 엄청 재미있다?”
그러자 클라레가 들뜬 목소리로 줄거리를 설명해 줬다.
“어느 날 북부 대공의 딸이 된 말괄량이 네오의 깜찍하고 즐거운 일상 이야기야. 네오는 근육을 좋아하지만, 마음씨 곱고 똑똑한 아이야.”
클라레는 저도 나중에 이렇게 되고 싶다고 말했다.
“…처제.”
레토는 두통이 도지려는 기분이었다.
“우리, 조금 더 아름답고 천진난만한 동화책을 읽으면 안 될까요?”
“그딴 거 재미없어! 난 이런 게 더 좋은걸! 이거 엄청 인기 많아서, 리리랑 센샤도 읽는단 말이야.”
“세상에, 클라레!”
그때, 옷을 갈아입고 나온 노아가 레토의 손에 들린 책을 발견했다.
“너 내가 이런 거 읽지 말랬지?”
“이씨, 이거 재밌거든!”
“내용이 정상이 아니잖아! 이딴 거 읽으면 너도 머릿속에 근육밖에 없는 변태가 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