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화 (99/245)

99.

“저희 안보국은 아들라보르 왕국의 평화를 위해 자국 내 침투한 간첩을 검거하고, 불온사상을 품은 반역자를 속출하는 중대한 사명을 지녔습니다!”

열의에 찬 신입의 투지에 민머리도, 붉은 머리의 사내도 입꼬리를 슬그머니 올렸다.

“젊어서 좋네.”

민머리가 차창을 내렸다.

“안녕하십니까.”

서글서글한 웃음과 함께, 민머리가 주머니 안에서 제 신분증을 꺼냈다.

“안보국 소속 데카르 보입니다.”

“무슨 일로 방문하셨습니까?”

“기밀 사항입니다. 아마 위에서 연락이 왔을….”

“기다리십시오.”

경비병은 그대로 입구 옆 초소로 향했다.

“으음….”

그 모습을 지켜보던 민머리, 데카르 보는 신분증을 도로 집어넣으며 좌석에 몸을 편히 기댔다.

“시간 좀 걸릴 것 같으니, 다들 이 틈에 쉬라고.”

“어째서 말입니까?”

옆에 있던 후배가 이해가 안 된단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저희가 한시라도 빨리 안으로 들어가야, 저기 안에 숨어 있을 간첩이나 내부 반역자를 찾을 수…!”

“나비.”

나비 칼로스.

후배의 이름을 찬찬히 부른 데카르가 사람 좋은 미소를 어정쩡하게 지었다. 이름이 불린 나비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경험상, 데카르가 저런 표정을 지은 채로 이름을 부른다는 건 좋은 의미가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데카르는 잔소리를 퍼부었다.

“조사도 하기 전에 그런 편견을 가지면 어쩌자는 거냐, 어?”

“하지만 선배님도 아시잖습니까….”

눈치는 볼지언정, 나비의 생각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그는 저번 주말에 잡혀 온 간첩들을 언급했다.

“그것들이 마지막에 숨어 있던 곳도 샤프 영지고, 올봄에 있었던 해군 이적 사건 역시도 샤프 영지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다른 간첩들이 몸을 숨기고 있을지 모릅니다. 혹시 그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는 게 해군들이면 어떡합니까.”

“…….”

데카르는 이제 웃지도 않았다. 가만히 듣고 있자니, 의욕만 넘치는 후배님이 선을 지나치게 넘고 있었다.

“너 그거 진심이냐?”

설마, 하는 마음에 되물어 봤지만.

“그러니 들어가서 서둘러 조사해야지 않습니까. 이렇게 저희를 밖에 세워 두고 시간 끄는 동안에 안에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아이고야….”

눈앞이 캄캄해진 데카르가 냄비 뚜껑만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연거푸 반복했다. 매끄러운 두피 위로 핏줄이 불끈거렸다.

“…….”

잠자코 듣던 뒷좌석의 붉은 머리 사내가 입을 열려던 찰나.

“실례합니다.”

오래 걸릴 거라 예상했던 경비병은 금방 돌아왔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주차는 외부 방문용 주차장을 이용하시면 됩니다.”

“아휴, 감사합니다.”

데카르가 진심으로 인사했다. 나비 때문에 골머리 아플 뻔할 때 딱 맞춰 와 준 경비병에게 고마웠다.

그래서 제 딴엔 기분이 좋아, 가볍게 농담을 던졌다.

“혹시 주차 비용이 있습니까?”

“해군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하지만 경비병은 농담을 받아치는 대신, 제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무더운 땡볕 아래서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으면서도 흔들림 없는 군인의 모습은 감탄이 절로 나왔다.

“대단하네.”

데카르는 열어 둔 창문에 팔을 걸친 채 차를 천천히 몰았다.

일렬로 선 검은 마동력차 십여 대가 천천히 본부 안으로 들어갔다.

“저런 거 보면, 확실히 해군에 인재들이 모이긴 모이나 봐.”

“그래봐야 아드벨로와 오케아누스의 후광 때문입니다.”

“너 진짜 그만해라.”

외부 방문용 주차장에 들어선 검은 마동력차들이 척척 멈췄다.

“나비 칼로스. 이게 마지막이다.”

차 시동을 멈추고 안전띠를 풀면서, 데카르는 진심을 담아 후배에게 경고나 다름없는 당부를 건넸다.

“우리는 해군과 싸우러 온 게 아니야. 해군 내부에 불온한 인물은 없는지 그걸 확인하러 온 것에 불과하다고.”

“그러니까 숨어 있을 가능성이….”

“아직 조사도 안 했는데, 그런 식으로 억측하지 말란 거다.”

데카르가 웃음기를 싹 지운 채로 진지하게 충고했다. 사람 좋아 보이던 그의 미소는 어디에도 없었다.

“의심은 할 수 있어도, 편견에 사로잡히진 마.”

“하지만….”

“지금 네 생각이 그렇게 떳떳하면, 아드벨로 대장에게 나한테 했던 말을 똑같이 할 수 있겠어?”

“…….”

그제야 나비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리 야생 망아지처럼 의욕만 앞서도, 아드벨로가 얼마나 대단하고 무서운지 정돈 알고 있었다.

그런 후배를 바라보는 데카르의 속도 마냥 편치는 않았다.

의욕 넘치는 건 칭찬할 만하나, 그 때문에 다른 기관과 부딪히는 일도 잦아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런 식이면 큰일인데….’ 

안보국은 겉으로 드러나선 안 되는 기관이다.

있어도 없는 듯, 없어도 더 없는 듯, 뒤에서 조용히 움직여야 하는 게 안보국의 행동 지침이었다.

그러나 방첩, 극비정보 등 국가 안보와 관련된 기밀 사항을 다루다 보니, 직원들이 지닌 자부심은 상당히 강했다.

그 탓에 타 기관을 업신여기거나, 자신들보다 한 수 아래로 보는 무례한 착각을 저지르기 일쑤였다.

바로 나비처럼 말이다.

‘생각은 자유라지만, 티는 내지 말아야지.’

자기가 일하는 곳에 소속감을 지니는 건 좋다. 그렇다곤 해도 저렇게 삐뚤어진 착각을 신념처럼 믿어 버리는 건 옳지 않았다.

‘벌써 피곤하다….’ 

차에서 내린 데카르는 벌써 막막했다.

그는 안보국이 이번 해군 방문을 기회라도 잡은 것처럼 구는 모양새가 영 불안했다.

안보국은 남부에서 간첩 체포가 비밀리에 진행된 것을 나중에 보고 받았다. 명색이 방첩이 주 업무인 안보국이 뒷전으로 밀려났단 점은 그들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혔다.

그래서 안보국은 올봄 해군 소장 이적 사건을 빌미로, 전군을 대상으로 사상검증을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화풀이나 다름없지….’ 

그런데 뭐가 이리 당당하게 구는 걸까.

뭐 잘났다고 이리 비싼 마동력차를 십여 대나 빌려와 일렬로 쭉 서 가며 달려야 했던 걸까.

‘자칫 실수했다간 우리가 물갈이될지 모르겠군.’

해군 방문은 마냥 안보국에게 득이 되는 상황이 아니었다. 데카르를 비롯해 어느 정도 경력이 있는 안보국 직원들은 그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선배님.”

잠자코 있던 붉은 머리의 젊은 사내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괜찮을 겁니다.”

“…….”

“무슨 일이야 있겠습니까?”

“…그래.”

툭, 하고 커다란 손이 젊은 후배의 등을 가볍게 두들겼다.

“뭔 일이 있겠어.”

“저희는 그냥 저희 일만 하면 됩니다.”

“아르카 네 말대로야.”

데카르의 근심 어린 얼굴에 그제야 미소가 번졌다. 희미한 웃음이었으나, 그만큼 기운을 차린 듯했다.

“아무 일 없이 무사히 끝나야 할 텐데….”

그는 푸르른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

안보국의 방문은 해군에게 있어 마냥 달가운 것이 아니었다.

타 군사 집단보다 자유롭대도, 해군 역시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집단이다. 타 집단이 자신들의 영역에 들어와 멋대로 영향력을 발휘하는 걸 달갑게 여길 리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안보국은 해군에게 예의를 지키며 정중한 태도를 고수했다. 올봄에 왔던 왕실 기사단과 비교하면 무척 수준이 상향된 손님들이었다.

덕분에 해군 역시 내부의 불만은 있을지언정, 적당한 예의를 차리는 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사실, 별 관심이 없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특히 특함이 그러한 상황이었다.

심지어 안보국을 이용할 못된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X발.”

X 같은 군대 같으니.

앉는 사람의 허리와 골반을 생각하다 만 것 같은 의자에 앉은 아미는 등받이에 기댄 몸을 흔들거렸다.

“드디어 그날이 왔군.”

아미는 삶의 의욕을 잃은 표정으로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그녀뿐만이 아니라, 사령부실에 있는 대원 전원이 다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

“…….”

마치 죽음의 끝자락에 선 것처럼.

고요한 사령부실에서 들리는 소리라곤 나약한 숨소리, 그리고 간혹 들리는 저주 섞인 욕설뿐이었다.

그들의 책상 위에는 조금 전, 아드벨로 대장이 보낸 공문이 놓여 있었다.

[첫 번째 태풍이 올라오는 날에 자격 시험할 거다.]

아드벨로 대장은 올여름 첫 번째 태풍이 찾아오는 날에 특함 대원들의 운항 자격 시험을 치르겠다고 공지했다.

“이런 것도 재주라면 재주라는 겁니다….”

로간 미타스 상사가 시든 잡초 같은 표정으로 웅얼거렸다.

“종이 아깝게 딱 한 줄만 적는 것도, 그리고 그 한 줄로 저희를 지옥으로 몰아넣는 것도 말입니다….”

“태풍이 오지 않으면 시험도 없는 겁니까?”

“남부만큼 날씨 정확한 곳도 없지.”

셀린이 달력을 빤히 노려봤다.

“어디 보자….”

남부는 타 지역과 비교하면 상당히 규칙적인 기후를 자랑했다. 덕분에 장마나 태풍 같은 특정 계절의 기상현상을 어림짐작으로 파악해도 얼추 들어맞았다.

“…예정대로라면 일주일 뒤네.”

셀린의 말에 여기저기서 앓는 소리를 냈다.

“그래도 시험 한 번 치면 이틀 휴가를 주지 않습니까. 마냥 부당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호네스 메라 일병이 선배님들 눈치를 살피며 슬쩍 물었다.

유일하게 작년에 특함에 들어온 호네스는 아직 저 ‘시험’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

“…….”

“…….”

그리고 대원들은 막내의 희망을 굳이 깨부수려 하지 않았다.

“근데, 노아.”

시험에 대한 충격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는지, 아미가 오늘 본부에 방문한다는 손님들을 뒤늦게 떠올렸다.

“오늘 안보국에서 사람들이 온다고 했지?”

“어어.”

노아가 기지개를 쭉 켜며 대답했다. 덕분에 말끄트머리가 이상하게 늘어졌다.

그러곤 들어 올린 팔을 축 늘어트리며 못다 한 말을 이어 했다.

“오늘부터 사상검증 시작한대.”

“사상검증이라는 섬뜩한 표현은 말고.”

아이스 중령이 타이르는 목소리로 점잖게 제안했다. 그는 탕비실로 가려는 건지, 다 마신 잔을 들고 있었다.

“군 복무에 적합한 인재인지 판단하는 비정기적인 적성 검사라고 표현하는 게 어떨까?”

“그게 결국 사상검증 아닙니까.”

아미가 투덜거렸다.

“뭡니까, 이게! 마치 우리를 간첩 취급하는 것 같잖습니까.”

“생각하기 나름인 거야.”

“중령님은 왜 갑자기 안보국 편을 드는 겁니까?”

“나는 평화주의자거든.”

그는 올해 봄부터 여름, 이 두 계절 사이에 해군 안에서 일어난 사건들 때문에 진절머리가 난 상태였다.

“그냥 대충 장단이나 맞춰 줘.”

어차피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하다는 말을 끝으로, 아이스 중령은 탕비실로 가 버렸다.

“…중령님 말씀이 맞아.”

노아도 같은 의견이었다.

“자기들 자존심 세우는 일에 불과해. 무시하면 그만이야.”

“그치만 재수 없잖아.”

아미가 이토록 예민하게 반응하는 건, 단순히 안보국이 해군 내부에서 설치는 것 때문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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