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요 며칠 보았던 카리나를 떠올리는 아이트라는 무척 기뻐 보였다.
“학교가 재미있나 봐요.”
다녀오면 꼭 친구들이랑 뭘 배웠는지, 뭘 하고 놀았는지 자랑했다.
등교할 땐 깨끗했던 교복은 늘 하교할 땐 흙투성이, 땀투성이였다.그 탓인지 몰라도, 레토를 동경하고 그리워하는 모습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친구랑 노는 게 즐거운 거지. 수도에선 가정교사에게 배우니까, 또래 아이들하고 어울리는 일이 별로 없거든요.”
“그래도 교류는 있지 않나요?”
“아이들이라도 귀족은 귀족이니까.”
세상은 변한다고 해도, 귀족이란 사회는 마냥 순수한 동심만으로 버티기 어려웠다.
“거기다 레토도 전과 다르게 카리나에게 다정하게 구니까…….”
아이의 불안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덕분에 카리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아이가 되었다.
알버스가 선물해 준 액자에 레토와 단둘이 찍은 사진을 넣어 두고 어른들에게 자랑하느라 발에 불이 나도록 저택을 돌아다녔다고.
“노아 양은, 그 이유를 아나요?”
아이트라가 물었다.
“레토가 우리와 거리를 두는 이유를 말이에요.”
“아직 듣진 못했습니다. 하지만 언젠가 말해 줄 거라 믿고 있습니다.”
“그럼 나도 함부로 말하긴 그렇군요.”
아이트라는 잠시만 기다리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벽에 있는 어떤 버튼을 눌렀다.잠시 후 고용인 한 명이 나타났다.
“주인님. 부르셨습니까.”
아이트라는 그녀에게 무언가를 명했다.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어딘가로 가 버린 고용인은 금방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 샤프 영지에 놀러 왔을 때마다 찍은 사진들이에요.”
다시 나타난 고용인이 가지고 온 건 앨범이었다.
앨범에는 어린 시절의 레토가 찍힌 사진들이 가득 있었다.
“…몇 장 가져가도 됩니까?”
노아는 사진 속 은발 소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작은 몸집에 수줍음 타는 모습의 어린아이가, 어쩌다가 그리 덩치 크고 능글맞은 남편이 되어 버린 걸까.
아이트라는 흔쾌히 가져가라고 허락했다.
노아는 바로 몇 장을 쏙쏙 뽑아냈다.
“…아까 하던 이야기 말인데.”
아이트라가 말했다.
“레토는 자존감이 의외로 낮죠.”
“아…….”
사진을 고르던 노아가 멈칫했다.
“노아 양도, 알고 있죠?”
“네. 종종 그런 순간을 느낍니다.”
“그 이유는 나 때문이랍니다.”
노아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아이트라를 바라봤다.
하지만 아이트라는 이어진 말을 끝으로, 더는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입에 담지 않았다.
“그저 부탁하고 싶어요. 무엇을 알게 되든, 그냥 그 아이를 안아 주고 사랑해 달라고.”
내 아들은 아무런 죄가 없으니까.
***
오케아누스 저택에서 보낸 주말은 클라레와 카리나에게 무척 행복한 추억이 되었다.
“사돈 할아버지 장난 아니야! 막 날았어!”
“아스 누님도 엄청났어요! 엄청 빠르고 강했어요.”
“그치만 우리가 필살기로 무찔렀어, 그치?”
“응! 합체 필살기로 무찔렀어!”
“축산물 위생관리법 제3장 제7조 1항! 합법 도축장!”
“…식칼토끼 만든 새끼를 죽여야만 내 속이 편할 거 같아.”
비록 레토에겐 아이들 정서교육이 걱정되는 날이었지만, 그것 빼고는 모두에게 즐거운 주말이었다.
그리고 아이트라에게 받아 온 레토의 어린 시절 사진은 벨로 가문의 앨범에 정리해 넣었다.
“형부는 남자인데 왜 머리에 리본을 달고 있어?”
“원래 멋진 남자는 리본 달고 그러는 겁니다. 그게 멋이죠.”
“어머나, 작은 부군도 이런 시절이 있었군요.”
“그런데 지금은 왜 저렇게 되었을까…….”
노아가 안타까운 듯이 말끝을 흐렸다.
“어머, 여보? 난 지금도 예쁘고 아름답습니다만?”
레토가 옆에서 치근덕거렸지만, 노아는 귓등으로도 듣는 척하지 않았다.
“처제, 처제의 언니가 너무 매정해요.”
섭섭해진 레토는 클라레에게 고자질했다.
클라레는 레토의 어깨에 손을 척, 올렸다.
“그런 여자와 결혼한 것 역시, 형부의 운명입니다.”
그러니 참고 견디십시오.냉정한 조언에 레토는 흑흑 우는 척을 하다, 냅다 클라레를 번쩍 들었다.
깜짝 놀란 클라레는 이내 꺄르르 소리 내 웃었다.
보는 사람마저 행복해지는 화목한 광경이었다.
“…….”
하지만 노아는 제 머리에 달린 리본을 어쩔 줄 몰라 얼굴을 붉히는 어린 레토가 찍힌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정확히는, 이 사진을 고를 때 아이트라가 했던 말 때문이었다.
“노아 양도, 알고 있죠?”
“그 이유는 나 때문이랍니다.”
“그저 부탁하고 싶어요. 무엇을 알게 되든, 그냥 그 아이를 안아 주고 사랑해 달라고.”
“내 아들은 아무런 죄가 없으니까.”
‘무슨 뜻이지?’
아이트라가 저 말을 했을 때, 언젠가 레토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흙, 먹어 본 적 있어?”
“…….”
그리고 노아는 레토의 등을 발로 확 찼다.
“…왜?”
영문도 모르는 채 얻어맞은 레토가 억울한 표정으로 노아를 바라봤다.
“아니, 좋으면 좋다고 말해야지. 왜 때려?”
“내가 널 왜 때렸을 거 같아?”
“…내가 너무 예뻐서, 질투?”
노아는 대답하는 대신, 웃는 얼굴로 소파 등받이 쿠션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만큼 때렸다.
“아야! 악! 진짜 아파!”
“언니가 형부 때린다! 이유도 없이 때린다!”
노아의 울분은 레토를 정확히 15대 때린 뒤에야 멈췄다.
정말로 억울해진 레토는 얼얼한 등을 만지작거리며 노아를 바라봤다.
하지만 노아는 이미 다른 생각에 푹 빠진 뒤였다.
“처제, 봤죠?”
“응?”
“아까 노아가 절 이유 없이 때린 거요.”
“형부가 뭐 잘못한 거 아니야? 평소에도 매를 벌잖아.”
클라레가 배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짧은 잠옷 상의 아래로 나온 하얀 올챙이 배가 볼록했다.
“세상에, 어떻게 그런 말을!”
레토가 손가락으로 허공에다 전화기 다이얼을 빙그르르 돌리는 척했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는 수화기 모양을 해 귀에 댔다.
“경찰에 신고하겠어요. 이건 폭력이에요!”
“에잇, 넌 너무 많은 걸 알아 버렸다.”
여기서 처리해야겠군.클라레는 레토의 입을 제 작은 손으로 틀어막았다.
읍읍!
막힌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진 레토가 축 늘어졌다.
“…휴, 이걸로 언니는 잡혀가지 않을 거야.”
만족한 클라레는 노아가 앉은 소파로 향했다.
“언니, 뭐 해? 내가 언니를 지켰는데?”
“어, 잘했어.”
대충 대답한 노아는 제 품에 안기려고 치근거리는 클라레의 등을 반사적으로 토닥였다.
노아는 여전히 아이트라가 했던 말을 곱씹고 있었다.
‘죽을 뻔한 어린 레토를 구해 준 건 후작님이고, 레토는 그곳에서 풍족한 시절을 보냈어. 사랑도 받은 거 같고.’
그런데 어째서 둘 다 서로가 죄인인 것처럼 구는 걸까.
“나랑 놀자고오오!”
“…아우, 진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노아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놀아 줘? 정말 놀아 줘?”
그러곤 냅다 클라레를 들어 올려, 소파에 올린 한쪽 다리에 엎드려 눕히고는 아이의 팔을 잡았다.
오른팔은 아래로, 왼팔을 앞으로.
노아는 아래로 늘어진 왼팔을 잡아당기는 척했다.
“철컥. 지금부터 특수작전을 수행하겠습니다.”
“나는 기관단총이다! 두두두두!”
클라레가 총알 대신 침방울을 튀기며 거실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사이.
‘그런데…….’
노아의 머릿속에 돌연 의아한 점이 떠올랐다.
‘…생모가 죽고 고아가 된 레토를 수색해서 찾은 건 후작님이라고 했어.’왜?‘어째서 후작님은 레토를 찾았던 거지?’
***
다음 날.새로운 한 주, 월요일의 시작을 알리는 뉴스가 라디오를 통해 전역으로 방송되었다.
[지난 주말, 아들라보르 안보국이 7년 전 전쟁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확인되는 다섯 명의 용의자를 체포했다는 소식입니다.]
죄명도, 죄인들의 이름도 밝히지 않은 소식이었다.
[안보국에서 발표한 바에 의하면, 보다 자세한 정보는 원활한 전범 재판 진행을 위해 일시적 공개 보류를…….]
왕국민들이 오랜만에 나타난 전범 이야기로 떠들썩한 동안.
안보국은 각 군부대에 공문을 내렸다.
군 내부에 불온한 사상을 품은 자는 없는지 확인하기 위한 조사가 시작된다고.
“…참 재밌다, 그치?”
공문을 확인한 아드벨로 대장이 피식거렸다.
“아주 그냥 큰 건 하나 잡았다고오, 우리 안보국이이이, 기세가 등등하다네에에.”
주정뱅이의 의미 모를 콧노래처럼, 아드벨로 대장이 손가락을 흔들며 노래했다.
“X발.”
쾅!테이블을 손으로 치며 일어나는 아드벨로 대장의 앞에는, 해군 내 요직에 자리한 제독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아드벨로 대장이 일어서자마자 마찬가지로 기립했다.
그녀의 왼편에는 레토 오케아누스 중장이 있었다.
“우리가 왜 해군일까?”
아드벨로 대장이 도로 자리에 앉았지만, 다른 제독들은 여전히 부동자세로 서 있었다.
대부분이 나이를 지긋하게 먹은 중장년이나, 여전히 군기가 바짝 든 모습에선 표현하기 어려운 중압감이 느껴졌다.
“그건 우리가 가장 뛰어난 군인이니까, 해군인 거다.”
장난기를 싹 지운 목소리가 한 번 더 물었다.
“그렇지 않냐?”
“예! 그렇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기합이 바짝 든 제독들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아드벨로 대장이 흡족하게 웃어 보였다.
“어쨌거나 간만에 수도에서 오시는 손님들이니, 정중히 모시자고. 심심풀이 정도는 되어 줄 테니까.”
그렇다고 너무 괴롭히진 마라.
아드벨로 대장의 명에 제독들은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
며칠 뒤.
검은 마동력차 십여 대가 샤프 영지 광장을 지나갔다.
일렬종대를 지켜 가며 시내를 달리는 차들의 창문은 안이 보이지 않도록 특수 처리해 까만 상태였다.
그 탓에 사람들의 시선은 자연히 차들을 향했다.
검은 마동력차 십여 대는 곧 시내를 벗어나, 바다를 옆에 낀 해안도로를 달렸다.
“저는 남부에 처음 와 보지 말입니다?”
“수도 촌놈이구만?”
운전대를 잡은 굵직한 체격의 남자가 껄껄 웃었다.
덩달아 그의 깨끗한 머리도 반들반들거렸다.
“저희는 소풍 나온 게 아닙니다.”
뒷좌석에 앉아 있던 젊은 사내가 쓰고 있던 안경을 벗었다.
붉은 머리칼 아래에 자리한 이목구비가 상당히 준수했다.
“앞을 보십시오.”
그곳엔 입구를 지키는 경비병들이 매서운 눈빛으로 입구에 들어서려는 차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환영받지 못하는 방문입니다.”
“그거야 당연하지.”
운전석에 앉은 민머리 근육이 히죽거렸다.
“해적, 아이고 실수. 해군들 입장에선 우리가 얼마나 아니꼽고 싫겠어. 자기들 구역을 우리가 휘젓고 다니는 건데.”
“하지만 저희는 좋은 일을 하는 겁니다.”
바다에 푹 빠졌던 신입이 서둘러 자신들의 입장을 변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