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넌 정말 잘한 거야.”
“그런 것치곤 검을 너무 많이 놓쳤어.”
오늘 레토가 한 훈련은 검을 잡는 것뿐이었다.
검에 담긴 노아의 오러를 느끼고, 익숙해지는 것.
하지만 조금이라도 집중할 성싶으면 오러는 레토를 공격했다.
폭력이나 다름없는 난폭한 기운이 검을 쥔 레토의 손바닥을 칼로 베듯 찔렀고, 그때마다 검을 떨어트리기 일쑤였다.
“하지만 넌 정말로 잘하고 있는 거야.”
노아가 아예 몸을 돌려 레토에게 눈을 맞췄다.
“내 어머니는 시집와서 처음 마스를 쥐었을 때, 한 달 동안 검을 쥘 때마다 뭘 해 보지도 못하고 계속 떨어트렸다고 하셨어.”
위로하려고 지어낸 거짓말이 아니었다.
레토는 노아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잘 해냈다.
“넌 원래 얄미울 정도로 익히는 솜씨가 좋아.”
그래서 몇 번이나 질투했지만, 그렇기에 노아는 레토가 금방 해낼 거라고 믿고 있었다.
칭찬받아 들뜬 레토는 강아지처럼 노아의 머리에 제 얼굴을 마구 비볐다.
실없는 웃음이 자꾸 새어 나왔다.
“언젠가…….”
레토가 물었다.
“제국에 갈 거지?”
“응.”
노아는 레토에게 못다 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물론 당장 간다는 건 아니야. 언제 갈 수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고, 이쪽도 나름 준비해야 하니까.”
“그러면 난 그때까지 열심히 오러에 적응해야겠네.”
“부당하다고 생각 안 해?”
“왜 이게 부당한 거지?”
“말려든 거잖아.”
노아는 여전히 레토가 저와 결혼했단 이유로 이렇게 고생하는 게 미안했다.
하지만 레토는 아니었다.
“난 진짜 부당한 게 뭔지 알아.”
“뭔데?”
“눈앞에 간절히 원하던 목표가 있었는데, 하필 저밖에 모르는 성격 뒤틀린 쓰레기 상관 때문에 놓쳐 버린 거.”
“…….”
누워 있던 노아가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레토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시선은 노아를 줄곧 응시했다.
노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난 너에게 늘 미안해.”
“응.”
알고 있어.노아는 레토의 헝클어진 머리를 살살 쓸었다.
“그런데 죄책감 때문에 이러는 거면…….”
“아니지. 오히려 그 반대지.”
레토가 씩 웃었다.
죄책감 어린 표정이 무색할 만치 한껏 올라간 입꼬리는 어딘가 기뻐 보였다.
“그런 못된 나랑 결혼까지 한 것만으로도 대단한데, 넌 날 믿고 네 비밀을 말해 주고,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거잖아.”
레토는 그 사실이 너무 기뻤다.
만약 저였으면 노아처럼 할 수 있었을까?
솔직히, 겪어 보지 않았기 때문에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충분히 알고 있다.
“…호구가 아니라 성녀네.”
레토는 눈앞에 흘러내린 노아의 머리칼을 손가락에 빙그르르 말아 감았다.
“성녀라니.”
느닷없는 성녀 소리에 노아가 잘게 웃었다.
“7년 전에 행방불명된 성녀 말이야?”
“그러고 보니 시기도 비슷하네. 너도 7년 전에 왕국으로 넘어왔다며. 사실 성녀 아냐?”
“말도 안 되는 소리.”
노아는 실없는 소리라고 일축했다.
“나 같은 성녀가 어디 있어.”
“이미 성녀의 반열에 오르셨습니다.”
“너 이제 아픈 거 다 나았지?”
까부는 거 보니 다 나았네.
노아는 협탁 위에 있던 파스타를 힐끔거렸다.
잠깐 대화를 나눈 사이에 파스타 면은 국물을 다 흡수해 퉁퉁 불어 있었다.
“근데 진짜 모를 일이잖아.”
도로 일어난 레토는 퉁퉁 분 파스타를 마저 먹었다.
오히려 이쪽이 취향이었는지, 아까보다 먹는 속도가 더 빨랐다.
“의외로 성녀가…….”
“입에 있는 거 다 삼키고 말해.”
꿀꺽.
분부대로 입 안 음식을 전부 삼킨 뒤, 레토가 말했다.
“성녀가 모든 직책을 벗어던지고 자유롭게 살고 있을지도.”
“예를 들면?”
“병나발 불거나, 도박 좋아해서 허구한 날 내기하거나, 밝힘증이 있거나.”
“그건 쓰레기잖아.”
노아가 질색했다.
***
간첩이 체포된 지 벌써 사흘이 지났다.여전히 남부는 그날의 소동을 알지 못한다.
신문에 알려진 그날의 소식이라곤 사업 박람회가 성황리에 개최되었으며, 수상한 인물이 아이스크림 차를 절도해 유괴를 시도하려 했단 내용이 전부였다.
“지금쯤이면 수도에 도착했겠군.”
다 읽은 신문을 접으며, 글로리아가 말했다.
“할머니, 뭐가 수도에 도착해?”
“이 할미가 수도에 있는 아는 사람한테 택배를 보냈거든.”
“아는 사람이 누구인데?”
“권력가.”
“권력가는 나쁜 사람들이야. 남을 위한다고 하지만, 전부 다 자기 뒷주머니 챙기느라 민생은 뒷전이지.”
“난 처제가 저렇게 말할 때마다 가슴이 미어져…….”
벨로 가문의 주말 아침도 그날의 소동과 상관없이 평화로웠다.
아침을 가득 먹은 클라레는 활동성 좋은 옷을 입고, 좋아하는 식칼토끼 가방을 어깨에 둘러멨다.
“언니, 식칼 가져가도 돼?”
“장난감이라고 붙여 말해. 네 형부 놀라서 휘청거리잖아.”
“처제, 제발 우리 아름다운 말을…….”
“그럼 저희 다녀오겠습니다.”
노아와 레토, 클라레와 아스는 오케아누스 저택으로 향했다.
“내 안부는 전하지 말고.”
“재밌게 놀다 오렴.”
집에 남은 글로리아와 비스가 그들을 배웅했다.
“형님! 어서 오세요!”
일찌감치 대문 밖에 나와 기다리고 있던 카리나가 다가오는 붉은 애마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 옆에는 아이트라와 알버스도 함께였다.
“카리나! 안녕!”
“클라레도 안녕.”
차에서 내린 클라레는 카리나와 먼저 인사한 뒤, 사돈어른들께 인사했다.
“안녕하셔요. 가내 두루 평안하셨나이까.”
“클라레 양도 평안하셨나요?”
“우리 사돈아가씨는 인사도 잘하는구먼!”
아이트라와 알버스는 클라레가 마냥 귀여웠지만.
“어우 창피해…….”
노아는 그런 여동생이 창피해 화끈 달아오른 얼굴을 두 손으로 감췄다.
“카리나. 이거 빌려줄 테니까 식칼토끼 놀이하자!”
“어제 학교에서 한 것처럼?”
클라레가 가져온 식칼 장난감을 만지며 물었다.
“우리 둘이 식칼토끼야. 알았지?”
“그러면 불법 도축업자는 누가 해?”
“저도 같이 놀아도 될까요? 불법 도축업자 역할 할게요.”
“잉, 아스는 너무 강한 적이잖아.”
“적당히 봐주면서 할게요.”
“그건 그것대로 싫어. 애들이라고 봐주지 마!”
아스가 두 아이를 데리고 정원으로 나간 사이.
남은 어른들은 응접실에서 담소를 나눴다.
“곧 뉴스가 나올 거다.”
알버스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홍차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말했다.
“간첩들에게 공작금을 전달한 놈들, 도주에 도움을 준 놈들…….”
“군 관계자들인가요, 전부?”
노아가 조심스레 물었다.
“전부는 아니지만, 대부분은 그러하다네.”
“너희들도 조심하렴.”
아이트라가 청포도가 올려진 조그만 케이크를 노아의 접시에 옮겨 주며 말했다.
노아는 감사하다고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간첩과 내통했다는 내용은 나오지 않을 거야.”
국왕은 이번 사건으로 반드시 잡아야 하는 목표물이 있었다.
그걸 완벽하게 해낼 때까지, 이 모든 것을 비밀에 부칠 것이다.
어쩌면 평생 드러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범죄자는 분명히 존재하고, 간첩들의 증언으로 속속들이 검거될 예정이다.
그리고 이렇게 소개될 것이다.
“…전쟁범.”
노아가 정답을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네요.”
간첩들은 시스토 제국 출신이다.
아들라보르 왕국과 7년 전에 전쟁을 치른 적국에서 보낸 간첩들.
그러니 큰 틀에서 보자면, 그들과 내통한 범죄자들은 전쟁범이라 불려도 이상하지 않았다.
‘조금 억지이긴 해도…….’
지금으로서는 그 죄명 말고는 사건을 감출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 때문에 군부대에 감사가 있을 거야.”
“해군도 예외는 아니군요.”
“이적행위를 한 전직 해군 소장이 있잖니.”
빌어먹을 플랜시 새끼.노아는 싱긋 웃는 얼굴 뒤로 망할 놈을 떠올렸다.
욕을 한 바가지 쏟아붓지 못한 게 조금 안타까웠다.
“국왕이 조심한다는 느낌은 있군요.”
레토가 적당히 식은 홍차에 각설탕을 두 개쯤 넣으며 말했다.
“그것도 이상할 정도로 말입니다…….”
“아무래도 예민한 사항이잖니.”
아이트라가 레토의 홍차에 설탕 하나를 더 넣으며 말했다.
그 틈에 각설탕 다섯 개를 후다닥 넣던 알버스가 노아와 눈이 마주쳤다.
알버스는 막 넣으려던 여섯 개째 각설탕을 슬그머니 치웠다.
노아는 느슨해지려는 입꼬리를 찻잔으로 가렸다.
“으흠.”
무안해진 알버스가 목청을 가다듬었다.
“뭐, 국왕 입장에선 최악의 경우를 상정해야 하니까.”
“전쟁 말씀이십니까?”
레토가 묻자, 알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꼬맹아, 전쟁이 끝난 지 고작 7년밖에 되지 않았다.”
제아무리 아들라보르 왕국이 대승을 거뒀다고 한들, 또다시 전쟁을 겪는다는 건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아직도 전쟁의 여파로 피해를 호소하는 사람들이 있다.
전쟁은 다시는 반복되지 말아야 할 비극이었다.
“어려운 일이군요.”
레토가 들고 있던 찻잔을 테이블에 놓았다.
찻잔 속 주홍빛 찻물은 반쯤 줄어 있었다.
“확실히 전쟁은 안 일어나는 게 좋죠.”
“음, 바로 그거지!”
알버스가 껄껄 웃으며 홍차를 쭉 들이켰다.
“꼬맹아, 넌 나랑 같이 정원 가서 애들하고 좀 놀까?”
“아, 그러면 노아도…….”
레토가 같이 가겠느냐고 제안했다.
“미안하지만.”
아이트라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가로막았다.
“노아 양은 나랑 할 이야기가 있단다.”
눈을 휘둥그레 뜬 레토가 노아를 바라봤다.
저 말이 진짜냐고 눈짓으로 물어봤다.
그리고 노아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사실은, 너 어릴 적 사진을 보여 주신다고 했거든.”
“…뭐?”
놀란 레토가 아이트라를 바라봤다.
아이트라는 눈을 피하며 괜히 노아를 탓했다.
“노아 양. 그건 아들 녀석이 사라질 때까지 비밀로 했어야죠.”
“에이, 레토가 그렇게 속 좁은 사람도 아니고. 설마 사진 보지 말라고 드러눕고 울겠어요?”“
평소엔 드러눕고 우나요?”
“꽤 많이 울었죠. 청혼할 때도, 제 할머니가 아드벨로 대장님인 걸 알았을 때도…….”
“저는 장군님과 정원에 가 보겠습니다.”
레토는 아이트라에게 꾸벅 인사하고 자리를 떠났다.
“으하하! 아주 즐겁게 사는구나!”
뒤따르는 알버스가 지붕이 떠나가라 웃었다.
덩달아 퍽퍽, 둔탁한 타격음이 들렸다.
깜짝 놀란 노아가 뒤를 돌아보니, 문 너머로 알버스가 레토의 등을 두드리는 모습이 보였다.
“…원래.”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노아가 아이트라를 바라봤다.
“레토는 카리나에게 저렇게까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어요.”
“싫어했다는, 소리인가요?”
“오히려 그 반대예요.”
아이트라의 미소엔 힘이 없었다.
죄책감이 느껴지는 모습에 노아는 뭐라고 함부로 물어볼 수 없었다.
다행히 아이트라는 다음 말을 이어 갔다.
“레토는 카리나를 위해서 거리를 둔 거예요. 하지만 그 때문에 카리나는 자기가 미움받는다고 생각했지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나요?”
“천만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