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6화 (96/245)

96.

“작은 주인님이 차를 모셨어요?”

서둘러 방문을 닫은 아스가 클라레의 등을 살살 쓸며 물었다.

“미쳤어요?”

그리고 노아에게 욕을 했다.

“운전도 못 하시는 분이 왜 운전대를 잡아요!”

저러니 작은 부군이 변기 붙잡고 토하는 거 아니냐며, 아스가 간만에 레토를 동정하고 안쓰럽게 여겼다.

“나 면허증 있어!”

울컥한 노아가 제 지갑에 있던 운전면허증을 꺼내 보였다. 면허증 사진 속 노아는 웃음기 하나 없는 표정이지만, 어째 묘하게 기세등등해 보였다.

“나도 운전 정도는 할 수 있거든?”

“하여튼 이때 면허 시험 간소화된 게 문제였다니까…….”

아스는 노아의 운전을 가장 불신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러는 아스 넌 면허증 자체가 없잖아!”

“그딴 거 없어도 작은 주인님보단 운전 잘하거든요?”

아스가 물었다.

“브레이크가 오른쪽이에요, 왼쪽이에요?”

“내가 그것도 모를까 봐? 그거야 당연히…….”

“당연히?”

“…….”

호기롭게 외치려던 노아의 목소리가 거짓말처럼 뚝 잘렸다.

“방금 운전했잖아요. 뭐 밟고 왔는데요?”

“오른발…….”

“액셀이랑 브레이크 패드가 같이 붙어 있잖아요.”

“아, 그래! 오른쪽! 브레이크는 오른쪽 패드야!”

“왼쪽이거든요?”

“…….”

“난 언니가 운전하는 차에는 절대 안 타야지.”

클라레는 두 주먹 불끈 쥐고 다짐했다.

때마침 속을 다 게워낸 레토가 반주검 상태로 나타났다. 그의 배 속은 당장 위장 내시경을 해도 될 정도로 깨끗했다.

“형부는 생각보다 연약하구나.”

클라레가 레토의 손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식사할 수 있으시겠어요? 옥수수죽이라도 끓일게요.”

“괜찮습니다…….”

“뭘 괜찮아요. 작은 주인님 차 타고 왔다면서요.”

아스는 어느 때보다 친절함을 발휘했다.

“저도 잘 알아요. 작은 주인님이 이상하게 운전만 하면 거칠어지죠?”

“사람이 그런 매력도 하나 있어야…….”

우욱!

노아의 운전을 다시 떠올린 레토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고개를 뒤로 휙 돌렸다. 헛구역질하느라 꿈틀거리는 커다란 등짝이 오늘따라 왜소해 보였다.

“어휴, 아프니까 능글맞은 주둥이도 조용해지네요.”

아스는 빵긋 웃었다.

반면 클라레는 입꼬리를 축 늘어트렸다.

“언니 때문에 형부가 아픈 거야…….”

“아니거든.”

“언니가 형부를 괴롭혔어!”

“아니라고.”

격정적인 감정에 휩싸인 동생을 내버려 둔 채, 노아는 일단 레토를 침대에 눕혔다.

“괜찮아?”

“어…….”

“그래도 한숨 푹 자면 나을 거야.”

자리에 눕자마자 잠드는 레토의 이마에 입술을 쪽 맞춘 노아가 이불을 꼼꼼히 덮어 줬다.

“생각보다 연약하시네요.”

밖으로 나온 노아에게 아스가 말했다.

“지난번에는 큰 주인님 오셨더니 저리 쓰러지고, 오늘은…….”

“오늘은 나랑 훈련했거든.”

페미나 말이야.

노아는 그제야 레토가 저리 쓰러진 이유를 알려 줬다.

“아하.”

어쩐지, 하고 중얼거리며 아스가 뒤를 돌아봤다. 조금 전까지 자신들이 있던 방에 누운 레토에게 또다시 동정심을 느꼈다.

“옛날 생각나네요.”

아스는 저와 노아가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저희 처음 만난 날 기억나세요?”

“글쎄…….”

마찬가지로 같은 날을 떠올린 노아가 말끝을 흐리며 슬그머니 웃었다.

“아스, 근데 오늘 저녁 뭐야? 형부는 먹을 수 있어?”

“오늘은 토마토 해물탕이에요.”

“마지막에 국물에다가 파스타 면 넣고 푹 끓여서 줄 거야? 치즈도 넣고?”

“우리 아가씨는 그걸 정말 좋아하신다니까.”

당연히 준비되었다고 아스가 말했다. 클라레는 빵긋 웃으며 먼저 식당으로 달려갔다. 레토의 저녁 식사 걱정은 그새 잊은 듯했다.

“작은 부군께도 퍼진 파스타를 드리는 게 좋겠네요.”

따뜻한 국물과 푹 퍼진 면이 속을 편안하게 해 줄 거라고 아스가 말했다.

“…하여튼 새삼 신기해.”

노아가 아스를 보며 말했다.

“네가 나랑 클라레를 암살하려고 왔었던 사실을 누가 믿겠어.”

“사춘기 소녀의 방황 같은 거죠.”

“사람 목숨 노리러 왔던 걸 그런 식으로 미화해?”

어이가 없어서.

노아는 아스의 뻔뻔함에 헛웃음만 나왔다. 어째 레토랑 요상하게 죽이 맞는다더니, 비슷한 부류라서 그런 모양이었다.

물론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만약 저 생각을 들었다면, 아스는 전혀 안 닮았다고 발끈할 테니까.

“어쨌건 제가 그때 한번 당해 봤잖아요.”

아스는 노아와 처음 만났던 날에 중상에 버금가는 상처를 입었었다. 바로 노아의 오러로.

“제가 얼마나 누워 있었죠?”

“일주일 동안 사경을 헤맸지. 근데 그것도 나름 조절한 거였어.”

“작은 주인님도 기억 미화가 상당하시네요.”

둘은 소리 죽여 웃었다.

어쨌거나 아스는 노아의 오러에 당해 본 경험이 있기에, 레토가 지금 얼마나 힘들어할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근데…….”

으음, 아스가 노아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히 말했다.

“비단 그것 때문만은 아닌 거 같단 말이죠…….”

***

“내가 너 사랑하는 거 알지?”

사랑하니까 말하는 거야.

레토는 노아가 가지고 온 파스타를 우물거리며 말했다.

그가 먹고 있는 건 해물탕 국물에 치즈를 넣고 푹 끓인 파스타였다. 오래 끓인 덕에 포크질 한 번에도 면이 뚝뚝 끊겼다.

“이거 맛있네.”

잠깐 눈 좀 붙였더니 기운이 제법 나는지, 파스타를 먹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레토는 국물을 크게 떠먹으며 말했다.

“솔직히, 와, 이거 진짜 술안주네. 어쨌든 훈련은 힘들었지만 버틸 만했어.”

오러에 적응하는 첫 훈련은 당연히 어려웠다. 단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힘과 교감하는 건 무장하지 않은 채로 맹수에게 손 달라고 제 손을 척 내미는 것과 다름없었다.

레토가 여태 해 온 훈련 중 가장 고난도에 속했다.

“근데 네 운전이…….”

물론 레토는 노아가 힘든 저를 대신해 운전해 준 것엔 고마운 마음을 품고 있었다.

다만.

“너무…….”

레토는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환청에 목숨이 아찔했다.

“이제 액셀이 어딨는지 알고 있거든?”

“오, 찍었는데 맞았네?”

“네가 피곤해서 헛들은 거야. 한숨 자고 있어.”

“아, 기어 잘못 넣었다.”

“시끄러워 죽겠네. 그냥 믿고 푹 자. 별일 없어.”

“…백미러 펼치는 걸 깜박했네.”

오는 길에 레토는 하늘에 계시는 위대한 신께 제발 살려 달라고 두 손 모아 기도했었다.

그의 생에서 가장 독실한 순간이었으며, 언덕 위 벨로 저택에 무사히 도착했을 땐 온화하게 감긴 그의 눈꺼풀에 투명한 눈물 한 방울이 맺혀 있었다.

“훈련으로 지친 것보다, 네 운…….”

운전이 날 만신창이로 만들었어.

노아, 네 운전 실력만 있으면 복수는 따 놓은 당상이야.

그렇게 운전 못 하는 것도 재능인데.

“…….”

모두를 위해 운전하지 말라고 말하려던 레토는, 안타깝게도 입을 다물어야 했다.

“…….”

제 앞에 의자를 끌고 와 앉은 노아가 입을 꾹 다문 채로 저를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발전의 여지는 있더라.”

빠르게 머리를 굴린 레토는 정답을 선택했다.

바로 아내의 마음이었다.

“적어도 오늘은 액셀이랑 브레이크를 헷갈리지 않고 잘 밟았잖아. 어디 부딪치지도 않아서 차도 무사하고.”

사실 노아의 운전 솜씨에 기겁한 다른 운전자들이 알아서 피한 거지만, 레토는 그 덕에 무사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그러나 노아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이쯤 되자 레토는 정말로 속이 울렁거리고 등줄기가 차갑게 얼어붙는 기분이 들었다.

“노아.”

“…….”

“여보.”

“…….”

“내 신부님.”

“…….”

“어휴, 삐순이…….”

“누가 삐순이야.”

그제야 반응한 노아는 눈꼬리를 새초롬하게 치켜떴다. 퉁명스러운 목소리마저 날이 바짝 서 있었다.

‘딱 봐도 삐쳤으면서.’

그 와중에 삐친 건 인정하기 싫어서 바로 대꾸하는 게 귀엽고 사랑스럽단 말이지.

레토는 조금 더 놀리고 싶었지만, 여기서 더 놀렸다간 노아가 진짜로 화를 낼 것 같으니 꾹 참기로 했다.

“계속 연습하다 보면 늘겠지.”

음, 그럼, 물론이지.

자문자답한 레토는 맛있게 먹던 푹 퍼진 파스타를 침대 옆 협탁에 잠시 치워 뒀다.

“내일도 운전해 줄 거지?”

“몰라.”

“에이, 해 줄 거면서.”

레토가 손가락으로 노아의 허벅지를 콕콕 찔렀다. 노아는 귀찮단 듯이 손을 밀쳤다. 그래도 레토는 불굴의 의지를 발휘했다. 이번에는 아기 간지럼 태우듯 간질간질 긁었다.

“내가 너 아니면 누구한테 내 차를 맡기겠어.”

“…….”

“한동안은 운전 부탁할게.”

“…정말?”

노아가 진심이냐며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그럼 거짓말이겠어?”

한 치의 거짓도 없단 듯이, 레토는 제 붉은 눈동자를 순수하게 반짝이며 눈꺼풀을 미친 듯이 깜빡거렸다.

그 조잡스러운 깜빡임이 유난히 과장스러웠다.

‘까짓 토악질 몇 번 하지, 뭐.’

레토는 자기희생을 각오하며 말했다.

“운전해 줄 거지?”

“생각해 보고.”

“에이, 해 주라아. 네가 운전 안 해 주면 난 집에 어떻게 와? 걸어와? 그 지친 몸으로 먼 거리를?”

“…….”

“대답해 줄 때까지 감금해야겠다.”

순식간에 팔을 벌려 노아를 끌어안은 레토가 침대에 발라당 누웠다. 난데없이 안긴 채 쓰러진 노아는 깜짝 놀라 비명도 채 지르지 못했다.

“삐순이, 삐순이.”

레토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유치한 별명으로 즉흥 노래를 부르며 노아를 꼬옥 껴안았다.

“…흥.”

괜히 부끄러워진 노아가 등을 돌렸다. 그래 봐야 여전히 레토의 팔 안이었지만, 지금은 얼굴 마주하기가 조금 부끄러웠다.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면야.”

난 하기 싫지만, 네가 그리 애원하니까.

“나중에 또 내 운전 이상하다고 뒷말하기만 해 봐.”

“에이, 안 그래.”

“난 진짜 할 마음 없었는데, 네가 부탁해서 운전해 주는 거야.”

“당연하지. 내가 이렇게 울면서 애원하잖아.”

“눈물은 어디 갔는데?”

“너의 눈부신 귀여움에 증발했지?”

“하여튼 능청은.”

할머니가 말한 대로 주둥이만 물에 둥둥 뜨겠네.

퉁명스러운 말투가 무색할 만치, 노아의 목덜미는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레토는 가는 목덜미에 입술을 쪽 맞췄다. 흠칫거리는 움직임이 작은 동물 같아서 웃음이 실실 새어 나왔다.

“…어쨌든, 고생 많았어.”

여전히 등을 돌린 채였지만, 노아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다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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