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5화 (95/245)

95.

마스와 페미나는 시스토 제국의 천년 역사와 함께했다.

“제국이 건국할 당시, 초대 황제를 수호한 기사가 피에타 가문의 시조야. 그리고 시조가 당시에 썼던 두 자루의 검이…….”

“…우리가 나눠 쥐고 있는 부부검이란 소리군.”

레토가 시선을 슬쩍 내렸다.

이제 제 손에 들린 페미나가 단순히 신비롭고 대단한 물건으로만 보이지 않았다.

묵직한 무게는 그간 피에타 가문에서 제국을 지키기 위해 베었을 수많은 적의 수와 비례했고.

피부 너머로 여실히 느껴지는 힘은 피에타 가문이 오랫동안 쌓아 온 천년의 명예와 희생이었다.

“그런데 제국이 곧 망한다는 건 무슨 소리야?”

“검날에 글귀가 적혀 있어.”

마스를 발검한 노아가 검날의 중앙에 새겨진 음각을 보여 줬다.레토는 검에서 느껴지는 강한 힘을 애써 무시하며, 음각으로 새겨진 글자를 찬찬히 읽었다.

“…삿된 것을 베라.”

무엇이 삿된 것이지?

레토는 근본적인 호기심이 먼저 생겼다.

다행히도 그에 대한 대답은 노아가 바로 알려 줬다.

“시조가 직접 새겼다고 하는데, 사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야.”

“이 삿된 것은, 아마 제국을 위협하는 존재를 뜻하는 거겠지?”

“응. 일종의 충성 맹세인데…….”

노아가 말끝을 흐렸다. 

레토는 그녀가 갑자기 말을 멈춘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시스토 제국은 건국 이래 대륙은 물론이고 바다 건너 이곳 아들라보르까지도 영향을 끼칠 정도로 강력한 국력을 지녔다.

태평성대의 동의어가 시스토 제국이었던 적이 있었고, 연이어 즉위하는 황제마다 성군이라 칭송받은 적도 있다.

그야말로 신의 편애를 받는 나라였다.

하지만 그런 나라가 어느 순간부터 점점 곪아 가기 시작했다.

“제국은 기득권의 이득만을 챙기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고통받는 백성들은 점점 늘어났어.”

“그런 시대는 아들라보르에도 있었어.”

“그래, 그런 시대는 제국의 천년 역사에도 몇 번이나 있었어.”

그때마다 마스와 페미나는 위대한 역사를 쌓아 올렸고, 제국은 다시 평화를 되찾았다.다만.

“…100년 전부터는 아니었지.”

연유는 정확히 모른다.

그저 그 시기부터, 마스와 페미나는 오러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제국 황실의 명으로 임무를 수행할 때만 그러했다.

그 탓에 오러는 대외적으로 더 이상 실존하지 않는 힘이 되어 버렸다.

오러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고, 피에타는 오러를 쓰지 않아도 충분히 강한 가문이었다.

그러나 제국에선 이를 아주 불길하게 받아들였다.

“웃기지 않아?”

노아는 그만 웃음이 피식 새어 나왔다.

“아들라보르는 100년 전에 마탑이 폭발하면서 눈부신 도약을 시작했는데. 시스토는 정반대로 명예로운 보검에게 무시당하며 쇠퇴의 길을 걸기 시작했어.”

“그럼 노아 네가 바라는 건…….”

레토가 물었다.

“이유를 찾는 거야? 두 검이 갑자기 변해 버린…….”

“아니.”

마스를 쥔 노아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얼마나 꽉 쥐고 있는지, 검 손잡이에서 으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검날을 시퍼렇게 물들인 오러가 과격하게 요동쳤다.

오러가 바닥에 조금씩 떨어질 때마다 연무대 바닥에 흠집이 났다.

그때마다 오러의 흉포한 기운을 온전히 느끼는 레토의 얼굴엔 식은땀이 한 방울 흘렀다.

“…그건 이제 상관없어.”

가까스로 진정한 노아가 숨을 크게 들이켰다.

푸른 눈동자는 도로 차분해졌다.

“관심조차 없고. 하지만 두 검이 왜 제국을 갑자기 등진 건지 확실하게 알 수 있어.”

“뭔데?”

“이젠 제국이 ‘삿된 것’이 되어버렸다는 걸.”

피에타 가문이 망명을 선택한 건, 역설적이게도 제국을 향한 마지막 배려였다.

“나의 친부모님을 비롯해, 100년의 시대를 살아온 피에타의 선조들께선 모두 같은 결론을 내렸지.”

마스와 페미나는 제국을 위협하는 삿된 것을 베지 못한다.제국 그 자체가 제 존립을 위협하는 삿된 것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럼 망명은…….”

레토가 말했다.

“피에타가 제국을 베지 않기 위해서?”

“그러다 피에타가 먼저 멸문해 버렸지만.”

노아가 서글피 말했다.

무언가를 떠올리는지, 노아는 지그시 눈을 감고 한참을 그렇게 섰다.

“내 목표는.”

그리고 노아가 다시 눈을 떴을 때, 하늘 위에서 새하얀 섬광이 번쩍거렸다.

“선조들의 의지를 이어.”

번개에 반사된 푸른 눈동자는 한순간 새하얗게 변했으나, 빛이 사라지기 무섭게 한없이 어둡고 깊은 심해처럼 아득해졌다.

“피에타의 보검으로 삿된 것을 베는 거야.”

곧이어 천지를 울리는 천둥소리가 들렸다. 

조금 전에 친 번개가 가까운 곳이었는지, 천둥소리가 골을 울릴 만큼 거대했다.

마치 노아의 각오처럼.

***

여태 레토는, 제 인생을 크게 뒤바꾼 순간으로 아이트라와 처음 만났던 날을 뽑았다.

산속에서 쓰러져 있던 어릴 저를, 고통스러운 배고픔에 흙을 퍼먹으려던 절 발견한 그녀 덕에 자신은 팔자에도 없던 호의호식을 누리며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

‘엄청난 사실을 알아 버렸군.’

레토는 또 한 번 자신의 인생이 크게 뒤바뀌었음을 느꼈다.

노아가 들려준 이야기는 자신의 예상을 훌떡 뛰어넘었다.

그리고 여전히 그의 상식으론 쉬이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제 손에 느껴지는 오러, 전설의 광물인 아우라, 의지를 지닌 검까지.

‘꼭 소설 속에 빙의한 것 같군.’

상상 속에나 존재하는 건 줄 알았는데, 그것들이 전부 자신의 눈앞에서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다니.

직시할 때마다 머리가 아찔했다.그나마 다행인 것은.

‘제국을 제 손으로 무너트리겠단 소리였지?’

노아가 제국에 복수하겠단 명백한 사실 하나만큼은, 아주 완벽하고 확실하게 이해했다.

그마저도 복수라기엔 너무나 엄숙한 느낌이었지만.

어쨌건 레토가 참여한 첫 훈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난 뭘 하면 돼?”

“오러에 적응하는 훈련부터 하자.”

“건전지처럼 막 쓸 수 있는 거 아니었어?”

레토는 일부러 페미나를 짓궂게 불렀다. 

조금 전 제게 자신의 비밀을 설명하던 노아가 한없이 슬퍼 보였기 때문이었다.

“또 그렇게 부르네.”

그리고 노아는 남편의 깊은 속내를 알기에, 혼을 내는 대신에 피식 웃을 뿐이었다.

물론 비단 그 때문은 아니었지만.

“넌 이제 그 주둥이를 후회하게 될 거다.”

“응?”그게 무슨 소리야?레토의 물음은 금방 해결되었다.

“…윽!”

순간 손에 들고 있던 페미나가 엄청난 오러를 뿜어냈다.

살을 에는 듯한 통증에 놀란 레토가 검을 놓기 무섭게, 푸른 오러가 채찍처럼 레토의 손등과 뺨을 할퀴려고 했다.

“어이쿠.”

다행히 그 순간에 노아가 마스를 휘둘러 그것들을 막아냈다.

“……!”

오러가 저를 공격했단 사실보다, 노아가 눈으로 따라잡는 것조차 어려운 손놀림을 발휘했다는 것에 레토는 더욱 크게 놀랐다.

“어떻게 한 거야?”

레토가 다급히 물었다.

분명 노아는 검술에 뛰어난 재능을 지녔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레토에게 검으로 이겨 본 적이 없었다.

“설마 실력을 숨기고 있었어?”

“그랬으면 내가 너한테 매번 그렇게 졌겠어?”

노아는 레토의 손등을 살피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다행히 레토의 손등은 크게 다치진 않았다. 

하지만 살갗이 빨갛게 달아오른 건 마음에 걸렸다.

“할머니.”

글로리아가 혀를 차며 한 손에 차가운 냉기를 모아, 레토의 손바닥을 식혀 줬다. 

얼음 마법이었다.

"아까 듣고도 이런 멍청한 실수를 해?”

글로리아가 레토를 가볍게 타박했다.

“저 검들엔 의지가 있단 걸, 네가 조금 전에 확인했잖아.”

“설마 인간과 비슷한 수준이란 말씀이십니까?”

“그만큼은 아니고.”

페미나를 도로 주우며 노아가 말했다.

“설명하긴 애매한데…….”

노아 역시 마스와 페미나를 제대로 다루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동안은 돌아가신 친부모님이 검을 쓰는 모습을 바라보고, 훈련으로 몇 번 만져 본 게 전부였으니까.

하지만 그때마다 느꼈던 것은 분명 있었다.

“이 검들엔 선대 시조의 의지가 깃든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만 하고 있어.”

“점점 현실성이 떨어지는 이야기가 되어가는군.”

레토는 그만 웃어 버렸다.하지만 곧 웃음을 지운 그는 다시 손을 내밀었다. 

노아는 다시 페미나를 건넸다. 

이번에는 놓치지 않겠단 듯이, 레토는 검을 쥔 손에 힘을 가득 실었다.

“순수한 검술 실력만 따지면, 난 레토 널 못 이겨.”

노아가 말했다.

“하지만 오러를 몸에 운용하며 싸우면, 이 왕국에서 날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어.”

확신에 찬 노아의 말은 허세도, 오만도 아니었다.

세상에는 공기가 있고, 태양은 동쪽에서 올라와 서쪽으로 진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말하는 것처럼 당연한 투였다.

“그러니 넌 나만큼 강해질 거야.”

어쩌면 그 이상으로.뒷말은 자존심 때문에 굳이 하지 않았지만, 레토는 이미 충분히 그 뜻을 이해하고 있었다.

“이런 표현은 실례겠지만…….”

레토가 한쪽 입꼬리를 비틀 듯이 슬쩍 올렸다.

“엄청 두근거리는데?”

무인 특유의 호기로움이 오랜만에 들끓기 시작했다.

“…미친놈.”지켜보던 글로리아가 몰래 성호를 그었다.

“저거 오늘 죽겠구만.”

***

“형부!”

세상에나!학교에서 만든 종이 왕관을 쓰고 기다리고 있던 클라레가 화들짝 놀라 제자리에서 폴짝 튀어 올랐다.

그 와중에도 왕관은 머리에서 벗겨지지 않는 견고함을 자랑했다.

“으으…….”

현관문을 들어서자마자 쓰러진 레토의 입에서 괴기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형부 괜찮아? 왜 그래?”

걱정이 된 클라레는 레토의 얼굴 가까이 다가갔다.

“…….”

“응? 뭐라고?”

“으으, 토할 거…….”

그 말에 클라레가 후다닥 뒤로 물러났다.

“으이구, 엄살은.

”뒤이어 집으로 들어온 노아가 쓰러진 레토를 번쩍 안아 일으켰다.

아내의 두 팔에 번쩍 안긴 레토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로 흐느적거렸다.

“오오, 공주님처럼 안겼다!”

클라레는 재미난 걸 본 것처럼 꺄르르 웃었다.

“두 분 다 오셨, 어이구야.”

젖은 손을 앞치마에 닦고 나오던 아스가 그대로 앞치마를 올려 제 시야를 보호했다.

하지만 곧 레토의 상태가 범상찮다는 걸 깨달은 아스가 서둘러 곁으로 다가갔다.

“무슨 일이에요? 작은 부군 괜찮으세요?”

“으, 으으……!”

침대에 누운 레토가 힘겹게 말을 이었다.

“차, 차아….”

“차?”

“노아가….”

“작은 주인님이요?”

“노아가, 차를 몰았….”

우욱.

올라오는 구역질을 참지 못한 레토는 서둘러 건너 화장실로 향했다.

채 닫지 못한 문틈 너머로 거하게 뱉어내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토할 거 같아.”

클라레도 덩달아 속이 안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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