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야, 너흰 이제 큰일 났다.”
글로리아가 간첩들을 향해 혀를 끌끌 차며 옆으로 슬쩍 몸을 돌렸다.
비스는 아내가 비켜 준 길로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안경을 벗은 그는 평소 감췄던 기척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어떻게 저런 존재감을 인지하지 못했던 건지, 알버스조차 가까이 다가온 비스를 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비스는 클라레가 가지고 있던 그의 젊은 시절 사진처럼 아름답고 눈이 부신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변한 것이라곤 세월이 그의 미모를 시기하여 깎아 만든 주름뿐이었다.
하나 그 흔적들이 오히려 눈부신 존재감을 더욱 뚜렷하게 했다.
동시에 걷잡을 수 없는 살기까지도 점점 짙어졌다.
반성하지 않는 간첩들의 태도가 비스의 인내심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사실, 그의 한계는 일찌감치 정점을 찍고 있었다.
최근 남부에서 연이어 일어난 사건들 탓에 심기가 불편해진 상태였다.
그 속내를 굳이 드러내지 않았던 건, 글로리아가 매번 저 대신 속 시원하게 욕해 주고 화를 내 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은 설령 글로리아가 그렇게 해 준다고 해도.
“…숙녀분들.”
참기 어려울 것 같았다.
비스는 글로리아와 아이트라를 향해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인내였다.
사실상 그의 안경이 부러지면서 난 소리는, 그의 인내가 터졌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저 같잖은 것들 때문에 클라레가 위험해질 뻔했고, 앞으로 펼쳐질 일들 때문에 노아가 힘들어질 거다.
어쩌면 아스 또한.
“잠시 자리를 비켜 주시겠습니까?”
비스의 정중한 제안에 글로리아와 아이트라는 순순히 밖으로 나갔다.
“너랑 손을 맞춰야 하나…….”
닫히는 문 너머로, 소매를 걷어 올리는 알버스가 보였다. 굵직한 근육으로 덮인 그의 팔뚝이 불끈거렸다.
“부탁인데, 적당히 하자.”
“노력은 해 보겠습니다.”
문이 완전히 닫힐 때 즈음, 두 남자는 어디선가 챙겨 온 검은 가죽 장갑을 끼고 있었다.
지하실에서 올라온 글로리아와 아이트라는 응접실에서 잠시 대화를 나눴다.
“후작님은 왜 저 두 사람이 검은 가죽 장갑을 끼는지 아나?”
“글쎄요…….”
굳이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아이트라는 해군의 딸이었고, 해군의 어머니였다. 그러니 자연스레 해군의 상식과 역사를 파악해 두고 있었다.
“일종의 미신이라 알고 있습니다.”
“맞아. 미신 같은 행위지.”
고문이 합법적으로 행해지던 시절.
해군은 용의자 혹은 가해자를 건드리기 전에 검은색 가죽 장갑을 손에 꼈다.
그래야 손에 피 따위의 오물이 묻지 않고, 묻은 것도 쉽게 닦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고문이 법적으로 금지된 지금에는 일종의 겁주기, 기선제압으로 변했다.
“한번 상상해 봐.”
글로리아가 친히 상상의 나래를 펼쳐 봤다.
“자유를 박탈당한 상태에서, 좁은 취조실에 인상 험한 해군이 들어왔어.”
그리고 대뜸 검은색 가죽 장갑을 보란 듯이 낀다?
시커먼 가죽은 윤이 자르르 흐르는데, 크기는 또 손에 너무 딱 맞아서 짱짱하게 들어가는 장갑.
“그걸 끼며 눈앞에 있는 용의자를 바라본다면?”
“공포감을 조성하기엔 충분하군요.”
아이트라의 대답에 글로리아가 바로 그거라며 씩 웃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야.”
지금 지하실에서 비스와 알버스가 검은 장갑을 손에 낀 건, 단순한 위협 따위가 아니었다.
애초에 간첩들은 눈을 가린 상태고, 입에도 재갈을 물렸으니.
그럼 왜 장갑을 챙겼을까?
“…목욕물 준비나 해 둬야겠네.”
나올 때 더럽겠어.
글로리아는 별일 아니란 듯이 심드렁히 말했다.
“대장님.”
그때, 아이트라가 물었다.
“당신께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으음…….”
아이트라는 많은 것을 생략한 채 질문했다. 그러나 글로리아는 그녀가 무엇을 궁금해하는지 알고 있었다.
저 역시 의아하긴 했다.
‘그 쓰레기는 뭘 하려는 거지?’
디모네 닉스.
플랜시 전 소장 이적 사건부터 시작해, 오늘 있었던 간첩 침투 사건. 그리고 더 나아가 피니치 구역 폭발 사건까지.
모든 사건이 가리키는 끝에는 닉스 소장이 있었다.
아직까진 제국과 내통한 것으로 ‘추정’되는 용의자일 뿐이다.
물론 그의 죄가 완전히 드러나게 되는 건 이제 시간문제일 테지만.
그러나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닉스 소장은 도대체 무슨 이유로 다 망해 가는 패전국과 손을 잡은 것인가.
“정반대라면 이해라도 하겠는데…….”
7년 전 전쟁에서 아들라보르는 대승을 거두고, 먼저 침략했던 시스토 제국을 비롯한 연합국들은 참패했다.
그 뒤로 연합국들은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그중 가장 상황이 좋지 않은 곳이 바로 시스토 제국이었다.
아들라보르로 건너오는 해적들 대부분이 삶의 터를 잃은 제국민들이었다.
무리한 전쟁과 그로 인한 경제적 피해로 위대한 천년 역사를 지닌 대국이 한순간에 망해 버린 탓이었다.
즉, 얻을 게 전혀 없었다.
“원래 또라이 생각은 범인의 상식으론 짐작할 수 없어.”
괴짜 중 괴짜로 유명한 글로리아 역시 쉬이 추측하지 못했다.
“후작 넌 짐작 가는 게 없느냐?”
“저도 마찬가지죠.”
아이트라가 세상에서 가장 증오하는 사람은 닉스 소장이었다.
자신은 누구보다 그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도통 속내를 읽을 수가 없었다.
그저 딱 한 가지 감상.
피눈물을 삼키며 복수를 다짐했던 그 날.
“너는 정상이 아니야.”
그날의 감상만이, 아이트라가 알고 있는 닉스에 대한 유일한 사실이었다.
***
그날 새벽.
오케아누스 저택에 감금되었던 간첩 세 사람은 테네브레에게 넘겨졌다.
“…건드렸습니까?”
상태가 영 성치 않은 간첩들을 살핀 아티가 물었다.
그의 앞에는 개운한 표정의 비스가 있었다.
안경을 벗은 할아버지는 세월에도 변치 않는 아름다움을 한껏 자랑하고 있었다.
“체포 과정에서 사고가 있었단다.”
비스는 별일 아니란 듯이 말했다.
그러나 아티를 비롯한 어떤 테네브레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뭐.”
하지만 거기에 대해 눈치 없이 되묻는 사람은 없었다.
“과정에 문제가 있었나 봅니다.”
어쨌건 테네브레가 간첩들을 넘겨받는 이 순간도 어떤 의미론 ‘체포 과정’이었으니까.
새벽 사이에 간첩들이 사라졌지만, 오케아누스 저택은 애초에 간첩 따윈 모른단 듯이 아침을 맞이했다.
화창했던 어제와 반대로 흐린 날이었다.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은 언제 비가 와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였다.
“어, 할아버지 안경 벗었네?”
아스가 오케아누스 저택으로 올 때 챙겨 온 교복을 입은 클라레는 안경을 끼지 않은 비스를 보며 깜짝 놀랐다.
“안경 안 껴서 이상해?”
비스가 입술을 쭉 늘어트리며 물었다.
“으으응! 엄청 멋져! 그래서 할머니가 괴롭힐까 봐 걱정이야.”
“하하, 그러면 오늘은 안경 끼지 말까?”
“헛소리 말고 이거나 써.”
때마침 차에서 예비 안경을 챙겨 온 글로리아가 직접 비스에게 안경을 씌웠다. 비스는 무릎을 살짝 굽혀 키를 맞췄다.
그 모습을 빤히 구경하던 클라레는 저와 똑같은 교복을 입고 나온 카리나를 발견했다.
“사돈총각도 교복 입었네?”
“휴가 동안 마레이 학교에서 공부할 거야.”
카리나는 제가 입은 교복을 손으로 살살 문지르며 말했다.
학교에 다니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 조금 두근거렸다.
“그러면 내 친구들 소개해 줄게! 다들 좋은 동료들이야!”
“자, 그럼 이만 가자꾸나.”
“사돈어른, 하룻밤 묵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사돈아가씨.”
“형님, 주말에 꼭 놀러 오세요.”
“꼭 갈게. 너도 학교 잘 다녀오고.”
이제 모두 하루를 시작했다.
해군 본부에 들어선 붉은 애마는 지정된 주차 구역에 부드럽게 들어섰다.
차에서 내린 레토는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황금 같은 연차를 그깟 나부랭이들 잡느라 써야 한다니…….”
레토는 간첩들을 잡기 위해 노아와 함께 오후 반차를 냈다는 게 너무 짜증 났다.
그 짜증을 지금에서야 드러내는 건, 어제 노아가 피에타 가문의 후계자란 사실에 놀라서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 탓이었다.
“기운 내십시오.”
노아가 레토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레토는 우는 척하며 노아의 어깨에 몸을 슬그머니 기댔다. 다행히 밀어내는 손짓은 없었다.
“그래서 꼽냐?”
뒤따라 들어온 검은 차에서 내린 아드벨로 대장이 손가락으로 귓구멍 근처를 후비적거리며 물었다.
“내가 반차 쓰라고 명한 게 그리 꼬우냐, 오케아누스 중장.”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대장님.”
투덜거리던 울상은 언제 그랬냔 듯이 화사한 미소로 바뀌었다.
“중장님…….”
남편의 눈물겨운 사회생활을 지켜보는 노아의 마음은 착잡했다.
“대장님의 하해와 같은 너그러움에 탄복할 뿐이었습니다. 대장님이 저희 둘에게 반차를 명령하지 않으셨다면, 이번 계획은 성사되지…….”
“이 자식은 바다에 빠지면 주둥이만 둥둥 떠다니겠어.”
“어떤 구명조끼보다 완벽하게 떠오를 겁니다. 그래야 죽지 않고 아내 곁으로 돌아가지 않겠습니까?”
“…넌 진짜 얘랑 왜 결혼한 거냐?”
아드벨로 대장이 노아에게 물었다.
“내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얼굴과 몸밖에 답이 안 나오는데?”
“대위, 들었어? 대장님도 인정한 나의 외모를…….”
“넌 좀 빠져 있어 봐!”
노아는 아침부터 속 시끄러운 상관들을 내버려 두고 혼자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후줄근한 함상복으로 갈아입고 나오니, 레토가 풀이 팍 죽은 표정으로 절 기다리고 있었다.
“섭섭하게 혼자 가 버려?”
“기다리다가 지각할 거 같아서 그랬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매정하긴. 뽀뽀해도 돼?”
“공사 구분 안 하십니까, 진짜.”
잔소리를 퍼부으면서도 노아는 팔을 뻗어 레토의 머리를 제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그리고 능글거리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아야.”
레토가 깨물린 입술을 혀로 느리게 핥았다. 마치 일부러 보란 듯이.
다행히 노아는 그의 의도대로 귀를 빨갛게 물들인 채였다.
“왜 깨물어.”
“얄미워서 말입니다.”
인제 그만 떨어지라며 노아가 레토의 얼굴을 손으로 슬쩍 밀었다.
순순히 물러난 레토는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말한 뒤, 탈의실로 들어가 재빨리 함상복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아까 대장님이 말했는데, 오늘부터 나도 참가하래.”
“아, 맞다.”
노아도 깜빡했던 것을 떠올렸다.
때마침 페미나를 레토에게 건넬 준비를 마쳤다.
그러니 이제 남은 건 레토가 이 검을 제대로 다룰 수 있도록 훈련에 매진하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정말 괜찮겠습니까?”
막상 준비를 다 해 뒀는데, 노아는 새삼 망설여졌다.
“어쩌면 중장님은 부당하게 휘말리는 걸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