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노아에게 비밀이 있단 것 정도는, 그리고 그 비밀이 제국과 관련되었을 거란 것도 레토는 일찍이 눈치채고 있었다.
피에타 가문의 부부검에 집착하던 모습, 결혼식 이틀 전에 제게 해 줬던 말, 클라레가 알버스에게 유괴당할 뻔했다고 오해했을 때 보였던 찰나의 흐트러짐.
“큰 거 하나, 작은 거 하나 있어.”
“말하기 전에 예고할게.”
노아는 참 성실하고 진지했다.
그러니 비밀을 말하기 전에 이토록 자잘한 단서들을 흘려 주며 진실을 알았을 때 최대한 충격을 덜 받도록 배려해 주었겠지.
그리고 오늘은.
“이번 작전 때, 마스를 가져갈 거야.”
“그건 너무 낡았….”
“오러를 보여 줄게.”
“…….”
정말로 비밀을 밝히기 전에 예고까지 했다.
문제는 저 예고도 너무 충격적이어서 작전 중에 한눈을 파는 실수까지 할 뻔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막상 두 눈으로 직접 본 오러는, 역사서에 기록된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레토가 직접 본 오러는 마치 신의 진노 같았다.
존재만으로 숲과 대지를 흔들고, 달려오는 차를 반으로 가볍게 베었으며,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숨을 헐떡이게 했다.
그래서 쉬이 입을 떼지 못했다.
조금 전, 자신이 보았던 그 경이로운 광경에 어찌 반응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서.
“…….”
잠시 말이 없던 레토는 제 손으로 입과 턱 언저리를 하염없이 쓸었다.
노아를 바라보지 않는 시선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중이었다.
“…….”
그리고 노아는 그런 레토를 묵묵히 기다렸다.
“…일단.”
다행히 그렇게 오랜 기다림은 필요하지 않았다.
“으음, 그러니까 말이지.”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은 레토의 목소리는 노아를 안심시켜 줬다. 긴장한다고 제대로 내뱉지도 못한 숨결이 파르르 떨렸다.
레토는 솔직하게 말했다.
“안 놀랐다면 거짓말이고.”
“화는 안 나?”
“화날 짓을 한 건 아니잖아.”
분명한 건, 레토는 노아의 비밀을 알았다고 화가 나거나 배신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저 놀랐을 뿐이다.
그리고 조금 웃겼다.
그 대상은 당연히 노아가 아니라, 여태 노아에게 별짓 다 한 저 자신이었다.
“지금이라도 경어를 쓰고 손등에 입을 맞춰야 하는 겁니까?”
레토가 손을 내밀며 상체를 살짝 숙였다.
“그것보단 분위기 파악부터 하시지?”
진지한 순간에 농담이나 해 대다니.
투덜거리는 와중에도 노아는 슬그머니 제 손을 그 위에 올렸다. 레토는 노아의 손등에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그러곤 또 한 번 큭큭거렸다.
“세상에…….”
이젠 놀라움을 넘어, 웃음밖에 안 나왔다.
“난 여태 고귀한 핏줄에게 그토록 무례하게 굴었단 말이야?”
“그게 무슨 상관이야.”
“상관이 당연히 있지.”
“또 나는 양자이니 뭐니, 그딴 소리 하면 진짜 팬다?”
“그런 말을 하려고 한 것도 아닙니다, 영애.”
피에타 가문은 아들라보르 왕국의 역사보다 오래되었다.
시스토 제국의 옆에는 항상 피에타 가문이 있었다.
정의로운 검, 모든 무인의 우상, 타국에서마저 위상이 드높은 명예와 그에 따른 만인의 칭송.
단언컨대, 피에타는 감히 아드벨로와 오케아누스마저 범접할 수 없는 고결한 가문이리라.
그런 피에타 가문의 영애에게, 레토는 정말 목이 잘려도 할 말이 없는 잘못들을 저질렀다.
“…지금이라도 가시는 길마다 붉은 융단을 깔아야 할까?”
“적당히 해라.”
노아가 레토의 이마에 아프지 않은 딱밤을 먹였다.
맞았는데도 뭐가 좋은지, 레토는 그저 실없이 웃었다.
노아는 그런 레토가 진심으로 고마웠다.
겁쟁이인 만큼, 속내가 깊고 배려심도 많았다. 레토가 저를 생각해 일부러 장난을 치고 있단 것쯤이야 처음부터 알았다.
“힘들진 않았어?”
레토가 물었다.
“…….”
노아는 대답 대신 그의 가슴에 제 머리를 툭, 기대었다. 레토는 그런 노아의 등을 가볍게 끌어안았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제국의 천년 역사와 함께한 피에타 가문은 멸문했다.
자세한 내막은 확실하지 않으나, 제국의 참전 명령을 거부한 탓이란 게 정설이었다.
피에타 가문의 마지막 순간은 유구했던 그들의 역사와 달리 너무도 허무했다.
하지만 그 뒤에 감춰진 진실을, 레토는 조금이나마 상상해 볼 수 있었다.
“부모님 시신이 아직 제국에 있어.”
“어떻게든 사람을 많이 구하려고 하셨지. 하지만 그러지 못하고 죽어 버렸으니….”
“…어렸을 땐, 그걸 개죽음이라고 생각했어.”
“클라레는 그때 생후 한 달을 겨우 넘겼던 아기였어.”
“운이 좋아서 둘 다 헤어지지 않고 함께 입양했지만, 그전까지는 고생 좀 했지. 전쟁고아란 게 다 그렇잖아?”
결혼 전, 노아가 바다 너머 제국에 묻힌 부모님께 술을 올리면서 해 줬던 이야기들.
덤덤한 목소리로 읊어 줬던 과거의 일부만 들어도 괴로움이 느껴졌건만.
“…….”
레토는 어떤 위로도 하지 못했다.
바다 건너 제국에서 겪었을 노아의 고통을, 생후 1달밖에 되지 않은 어린 동생을 끌어안고 필사적으로 살아남았던 14살 소녀의 괴로움을.
괜찮다고 쉽게 말할 수 없었다.
“…오늘은.”
그래서 레토는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로, 그저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이야기했다.
“처형이 해 주는 토마토 파스타가 먹고 싶네.”
“…그러게.”
다행히 노아는 대화를 이어 줬다.
“아스가 만든 건 다 맛있으니까.”
“아, 어쩌면 여기서 먹고 갈지도 모르겠는데.”
조금 전에 알버스와 아이트라가 주방장을 찾던 것을 떠올렸다.
간첩들을 잡고 온 두 사람에게 식사를 대접하려는 모양이었다.
“괜찮겠어?”
“안 괜찮을 건 또 뭐야.”
“라디오 부부 사연에서 들었는데, 시댁이 이렇게 예고 없이 식사 약속을 잡는 건 아내한테 큰 실례…….”
“그거랑 이건 상황이 다르잖아.”
그나저나 너도 그거 들어?
평소엔 클라레가 그런 거 들을 때는 질색을 하더니, 어이가 없어진 노아는 이내 실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형님!”
그때, 복도 너머에서 카리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곧 모습을 나타낸 카리나는 레토를 보자마자 기뻐 어쩔 줄 모르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종종걸음으로 달려왔다.
“오, 오셨다는 말씀 듣고요! 그래서 인사 드리려고…….”
“일 때문에 잠깐 들렀어.”
“도련님, 잘 지내셨어요?”
“형수님도 안녕하세요.”
카리나가 꾸벅 인사했다.
“어우…….”
어쩜 저리도 착하고 예의 바를 수 있지?
노아는 저도 모르게 가슴 위를 움켜쥐었다.
레토가 전에 했던 말대로, 카리나는 어른들에게 사랑받을 수밖에 없는 아이였다.
“저, 형님…….”
카리나가 제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조심히 물었다.
“혹시 저녁도 먹고 가시나요?”
“먹고 가도 되겠어?”
“물론이죠! 형수님도 드시고 가실 거죠?”
혹여라도 형님이 마음 바꿀까, 카리나는 노아에게 간절한 눈빛을 담아 물었다.
물론 노아는 저 제안을 거절할 마음이 없었다.
“저까지 초대해 주시는 거예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럼 제가 가서 어머니랑 할아버지께 말씀드리고 올게요!”
“그러지 말고, 같이 가자.”
레토가 손을 내밀었다. 처음에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몰라 물끄러미 바라보던 카리나가 서둘러 제 손도 내밀었다.
“와, 와아……!”
카리나는 마주 잡은 두 손이 믿기지 않았다.
“혀, 형님이랑 손잡는 거, 정말 오랜만인 거 같아요.”
순수한 마음에 기뻐서 뱉은 말이지만, 레토는 식칼토끼 필살기에 당한 것처럼 양심이 아렸다.
노아는 그런 레토를 할 말 많은 눈으로 바라봤다.
그래도 손을 꼭 잡고 걸어가는 두 형제는 참 보기 좋았다.
“노아.”
레토는 돌연 떠오른 의문이 하나 있었다.
당시에는 분위기 때문에 제대로 못 물어봤지만, 아니, 사실은 저도 위화감을 전혀 못 느꼈었던 궁금증.
“처형은 이 계획에 왜 참여한 거야?”
***
“헉, 허억!”
“쿨럭! 컥!”
두 간첩은 숲을 미친 듯이 달렸다. 피비린내 나는 숨결이 목구멍과 입 안을 가득 맴돌았고, 심장은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쾅쾅 뛰었다.
도로에서 떨어진 숲은 달리기에 적합한 장소가 아니었다.
가시처럼 뻗은 가지가 그들의 얼굴에 생채기를 내고, 옷가지를 조금씩 뜯어 갔다.
드러난 살갗은 톱날처럼 매서운 나뭇잎에 베여 피가 흘렀다.
그때마다 간첩들의 피로도 점점 쌓여 갔다.
그러나 멈춰 숨을 고를 여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사냥감을 추적 중입니다.]
[이동 경로를 전송 중입니다.]
[경미한 부상을 허용합니다.]
정체불명의 하얀 토끼 인형이 자신들의 뒤를 빠르게 추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겉보기엔 아이 장난감처럼 보이는 귀여운 외형.
그러나 양손에 쥔 식칼과 이따금 흘러나오는 기계적인 목소리는 간첩들의 공포심을 자극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야……!’
역시 백사자가 남부에 내려왔을 때부터 의심했어야 했나.
이제 와 생각한들, 전부 뒤늦은 판단이었다.
테네브레만 자신들을 쫓은 게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그들은 일부러 자신들을 남부로 유인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백사자가 남부로 가족들과 여행을 왔던 거다.
자신들을 잡으려고.
이곳엔 그의 본진인 해군이 있고, 저 괴상한 토끼 무기를 만들 수 있는 아드벨로가 있으니까.
이제 두 간첩의 손엔 돈이 든 서류 가방은 없었다.
돈을 챙겨 제국으로 넘어갈 여유도 없었다. 일단 무조건 살아야 했다. 그래야 자신들이 겪은 이 빌어먹을 상황을 전달할 수 있었으니까.
‘개인 함선으로도 모자라 저딴 무기를……!’
‘저 괴물 같은 것이 양산되면 큰일이다……!’
간첩들은 반드시 저 토끼 인형 무기에 대한 정보를 본국에 전해야 했다.
그때였다.
[…추적 종료.]
당장이라도 덤벼들 것처럼 쫓아오던 식칼토끼가 멈췄다.
[이동 경로 전송을 종료합니다.]
[공격을 종료합니다.]
양손에 들린 식칼은 인형 안으로 쏙 사라졌다.
[지금부터 대기 상태에 들어갑니다.]
그러곤 털썩, 앉았다.
“허억, 허억…….”
“가, 갑자기, 무슨…….”
추격이 멈추자 당황한 건 오히려 간첩들뿐이었다.
가까스로 숨을 고르면서도, 그들은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슬그머니 뒤로 몇 발자국 걸어 봐도 식칼토끼는 멀뚱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마치 숲속 친구처럼 앙증맞은 모양새였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정신을 못 차리던 찰나.
“……!”
차갑고 서늘한 감각이 그들의 등골과 허리를 스쳤다.
간첩들이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봤지만,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
하나 아스에겐 그 찰나면 충분했다.
그들의 머리 위로, 아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흩날리는 새카만 머리칼 사이로 안광이 섬뜩하게 번뜩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