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9화 (89/245)

89.

“…하하.”

선량한 아이스크림 아저씨가 곤란하단 듯이 웃었다.

“꼬마 아가씨, 이렇게 사람 많은 데서 그런 소리를 하면 곤란하잖습니까.”

“우리 오빠가 가르쳐줬어! 이런 문신은 제국에서만 한다고!”

“…….”

클라레가 아저씨와 대치하는 사이, 센샤와 리리가 근처에 있던 어른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때마침 이상함을 느낀 어른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세레니와 보르는 클라레의 옆에 딱 붙어 수상한 아저씨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가씨, 오해야.”

가판대 옆에 만들어진 조그마한 차 문이 열렸다.

“이건 그냥 아저씨가 멋 부리려고 낸 문신이야. 잘 보면…….”

많이 다르지?

그렇게 뒷말을 흘리면서, 아저씨는 클라레를 향해 팔을 뻗었다. 손목시계 아래 문신을 감춘 쪽이었다.

“…야.”

그때.

“지능을 냉동실에 얼려 두고 왔나?”

“윽!”

갑자기 튀어나온 손에 팔이 꺾인 아이스크림 아저씨, 아니, 제국 간첩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토했다.

“와, 놀래라!”

클라레는 어느새 제 뒤에 선 아티를 보며 소리쳤다.

아티는 무심한 척하며 여유로운 다른 한 손으로 클라레와 세레니, 보르를 자신의 등 뒤로 보냈다.

“건드려도 될 게 있고, 건드려선 안 될 게 있는 법이거늘.”

“으, 으윽…!”

“감히 아이를 건드려?”

그것도 내 동생을?

뒷말은 숨겼지만, 아티는 지금 어느 때보다 분노한 상태였다.

간첩은 당황했다.

‘무, 무슨 힘이 이렇게…!’

고작 한 손으로 제 팔을 꺾은 거로도 모자라, 뼈가 부러질 정도로 꼼짝없이 제압하고 있었다.

거기다 저를 노려보는 저 심드렁한 눈빛 속에 감춰진 조롱이 뜻하는 바는 하나였다.

너흰 이제 끝이라고.

“…으아아아!”

그 뜻을 알아챈 간첩이 소리를 지르며 아티를 뿌리쳤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팔을 풀었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아티가 일부러 놓아준 것이었다.

“밟아!”

가까스로 차에 올라탄 간첩이 운전석 쪽 차체를 두드렸다.

그러자 아이스크림 차는 바퀴 헛도는 소리와 함께 재빨리 시내를 벗어났다.

“…이잉.”

뒤에서 들리는 풀 죽은 소리에 아티가 뒤를 돌아봤다.

“왜, 다쳤어?”

“오빠는 왜 아직도 머리를 그리하고 다녀? 좀 잘라.”

“무사한 거 같아 다행이네.”

아티가 클라레와 아이들을 살피는 사이.

부아아앙-!

부아아아앙-!

그들의 등 뒤로 두 대의 이륜차가 굉음을 자랑하며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방향은 아이스크림 차가 도망친 곳과 정 반대.

아드벨로 영지로 향하는 길목이었다.

***

간첩들의 계획은 이랬다.

“조를 나눈다.”

“두 명은 아이를 유괴해 어느 으슥한 곳에 숨겨 둬. 죽일 필요는 없어. 그냥 샤프의 감시를 잠깐 흐트러트리는 게 목표니까.”

“그리고 우리 셋은 호텔 뒤로 빠져나와 차를 훔치고, 영지를 벗어난다. 너희 역시 마찬가지다.”

“샤프 영지에서 계속 버티는 건 무리야. 테네브레가 우릴 쫓아 이곳에 왔을 테니까.”

“거기다 오케아누스 후작까지 왔어. 샤프는 이제 위험해.”

“그러니 유괴로 어수선한 틈에 이곳을 벗어난다.”

분명 호텔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이 계획은 완벽했다.

어쩌면 그 망할 테네브레의 추적에 혼선을 줘 뿌리치고 조금 더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상황을 반전시킬 수도 있었다.

그런데 도대체 이게 뭐란 말인가.

“으윽…!”

아티에게 팔을 잡혔던 간첩이 차량 내 간이 냉동실에 있던 얼음으로 부어오른 팔을 문질렀다.

“그 새끼! 분명 테네브레였어!”

흥분한 간첩은 거친 숨을 토하며 겨우 침착하려고 노력했다.

바닥에 굴러다니던 아이스크림 막대로 골절 부위를 지지하고 포장 종이로 단단히 묶어 응급조치를 끝냈다.

“후우…….”

운전석에 있던 또 다른 간첩은 제 동료가 진정한 걸 확인한 뒤에야 입을 열었다.

“계획 변경이다.”

“다리를 안 다친 게 다행이군.”

그는 조수석 쪽 차량 서랍에서 권총을 꺼냈다. 안전장치를 푼 권총에서 철컥, 소리가 들렸다.

톡. 톡.

톡, 톡.

동시에, 차량 바닥을 굴러다니던 클라레의 머리 방울에서 무언가가 조그맣게 튀어나왔다.

아이스크림 차는 곧 항구에서 가장 큰 창고 구역으로 들어갔다.

앙증맞은 외관의 아이스크림 차와 큼지막한 물류들을 보관하는 복잡한 창고들은 전혀 어울리지 않았지만, 간첩들이 노리는 건 바로 그 혼잡스러운 길목이었다.

안으로 들어선 간첩들은 곧 날카로운 사이렌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추적이 붙었군.”

“조금 더 서두르도록 하지.”

“젠장, 팔만 안 다쳤어도…….”

간첩들은 미리 파악해 둔 창고 구역 지도를 떠올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들의 목표는 저 구역 너머에 있는 숲이었다.

그곳은 샤프 영지 바깥이었다.

밖으로만 나가면 당장 경찰과 경비대의 눈을 피할 수 있었다.

일단은 거기서 숨을 죽이며 동료들과 합류하는 걸 기다리기로 했다.

도도도도.

그래서 두 사람은 알지 못했다.

도도도도.

자신들의 뒤에 따라붙는 하얀 털 뭉치를.

조그만 흰색 털 뭉치 아래에 달린 손톱만 한 네 개의 다리는 믿을 수 없는 속도로 간첩들의 뒤를 쫓았다.

***

“오케아누스에서 온 전언입니다.”

비서실장이 아드벨로 대장에게 소식을 전했다.

“조금 전에 돌고래 두 마리가 출발했다고 합니다.”

“사냥감 몰이는 성공했고?”

“그렇습니다.”

계획한 대로, 간첩들을 끌어냈다.

아드벨로 가문이 공문을 보내 샤프 영지의 경계를 강화한 건 간첩들의 불안함을 자극하기 위해서였다.

아이트라는 간첩들이 쉽게 드러나지 않을 거라고 했다. 몸을 감추고 상황을 정비할 거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럴 여유를 빼앗으면 된다.

바닷길은 막혔다.

올봄에 특함을 비롯한 해군들이 해적들을 소탕했고, 초여름엔 악명높은 손가락 해적단을 완전히 박살 냈다.

간첩들을 도와줄 수 있는 불법적인 수단들도 함부로 써먹지 못할 정도로, 바다는 해군의 살벌한 감시를 받고 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오케아누스 장군이 남부에 내려왔다.

간첩들에게는 백사자의 존재 자체가 충분한 위협이었다.

여기에 아드벨로 대장까지 버티는 샤프는, 이제 간첩들이 은신하기엔 위험 요소가 너무 많았다.

그러니 샤프를 떠나 다른 곳으로 도망칠 가능성이 컸다.

이 역시 아이트라의 자료에 적혀 있었다.

오케아누스 후작은 고작 며칠 만에 간첩들의 모든 수를 읽고 작전을 계획한 것이다.

저들이 얼마 전 유괴 미수 사건을 이용하여 경찰력을 분산시키려는 것까지도.

그래서 일부러 훔치기 쉽도록 주인 없는 아이스크림 차를 호텔 가까이에 비치했다.

“아티가 여기 있었으니 가능한 작전이었지…….”

아드벨로 대장은 아직도 아찔했다.

클라레가 간첩들과 엮일 뻔했다는 보고를 들었을 때, 아드벨로 대장은 목덜미에 손을 올리고 한참을 진정해야 했다.

당장 시내로 나가 제 손으로 간첩들을 잡으려 할 뻔한 것을 겨우 억눌러 냈다.

“그래도 아티가 제 역할을 제대로 했습니다.”

비서실장은 아티가 클라레를 비롯해 아이들을 지켜냈단 사실에 안도했다.

“흥, 그것도 못 해내면 그 새낀 나한테 죽었어.”

***

시간을 아주 살짝만 거슬러 올라가면.

그러니까, 아직 정체를 들키지 않은 아이스크림 차 앞에 줄이 길게 늘어서 있던 때로.

때마침 사업 박람회가 열리는 호텔에서 검은색 고급 마동력차 한 대가 부드럽게 빠져나왔다.

시내로 들어선 검은 차량은 아이스크림 차 바로 뒤를 지나쳤다.

그 순간, 각 차량 운전석에 앉아 있던 남자들의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알은 척은 없었다.

그렇게 검은 차가 지나가고 얼마 안 있어.

“제국 간첩의 문신이야!”

클라레가 간첩을 알아보고, 숨어서 지켜보던 아티가 나타나면서 소란이 일어난 사이.

두 대의 이륜차는 폭탄 터지는 소리 같은 굉음을 내며 빠르게 지나갔다.

마동력차로 유명한 체티 사에서 가장 유명한 고급형 이륜차로, ‘길 위의 원’이란 뜻의 사이크비아, 혹은 바이크라고 불렸다.

바이크를 모는 운전자들은 헬멧을 쓴 탓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달리는 바람에 펄럭이는 품이 큰 가죽 재킷, 짙은 청바지와 때가 탄 운동화.

그 별거 아닌 옷차림으로 바이크를 빠르게 모는 두 사람의 모습은, 시대에 저항하는 반항아의 거친 매력을 자아냈다.

그 덕에, 그들의 모습에 홀린 사람들은 제대로 보지 못했다.

커다란 체구의 사내가 입은 재킷 아래 숨겨진 총을.

그리고 작은 체구의 여인이 등에 멘 기다란 막대기를.

“…추적이 붙었군.”

물론, 앞서 달리던 검은 차는 뒤따라오는 두 바이크가 자신들을 쫓아온다는 것을 눈치챈 상태였다.

“공격은 샤프를 벗어난 뒤다.”

권총을 손에 든 두목 격의 간첩이 말했다. 괜히 여기서 총격전을 벌였다간 영지 내 경찰은 물론이고, 자칫 해군까지 끌어들일 수 있었다.

다행히 검은 차는 빠르게 관문을 벗어나 숲속 도로로 빠져나왔다.

그 순간.

탕! 탕탕!

차량 창문 너머로 두 개의 권총이 튀어나와 바이크를 조준했다.

아슬아슬하게 스치는 총알이 무섭지도 않은지, 바이크들은 오히려 속도를 올리며 검은 차 양쪽으로 따라붙었다.

“저 자식들이…!”

간첩 중 누군가가 얼굴을 붉히며 육두문자를 토했다.

헬멧 때문에 상대의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분명 저자들이 자신들을 비웃고 있단 생각이 들었다.

아니, 거의 확신이었다.

“테네브레냐!”

간첩이 소리쳤다.

그 말에 왼쪽을 추적하던 바이크 운전자가 등 뒤에서 리볼버를 꺼냈다. 그리고 쐈다.

탕!

고작 한 발이었지만.

끼이이익!

바퀴가 헛도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검은 차가 균형을 잃었다.

리볼버가 명중한 곳은 바로 바퀴와 차체의 이음부였다.

가만히 서서 봐도 잘 안 보이는 그 비좁은 사이를, 헬멧을 쓴 사내는 바이크를 탄 채 단숨에 명중시킨 거다.

탕!

이어서 또 한 발을 쐈다.

“아아악!”

이번에는 사람의 비명이 터졌다. 운전하던 간첩이 서둘러 창문을 올렸지만, 총을 맞은 간첩은 허벅지에 큰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젠장! 도대체 뭐야!”

동료의 허벅지를 지혈하면서, 두목 격인 간첩이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테네브레는 아니다!’

국왕의 개는 이런 식으로 흔적을 남기며 싸우지 않는다.

요란스럽기 짝이 없는 이들의 공격은 마치 자신들이 들켜도 상관없단 듯이 행동하고 있었다.

‘…들켜?’

너무 늦었지만.

“…….”

그제야 간첩은 두 가지 사실을 깨우쳤다.

하나는, 아드벨로와 샤프 영지를 잇는 숲속 도로에 자신들 말고 어떤 차량도 지나가지 않는다는 것.

이미 도로는 처음부터 통제되고 있었다.

자신들을 잡기 위해.

그리고 두 번째는.

바이크 두 대 중 한 대는, 이미 자신들을 앞질러 갔단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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