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8화 (88/245)

88.

“…확실히.”

당황하는 것도 잠시, 노아는 레토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것들, 현금다발을 직접 들고 다닌다고 했었지?”

간첩들이 내려오는 동선을 따라 발생했던 범죄 중 차량 절도가 의미하는 건, 저들이 거액의 현금을 운반하고 있단 뜻이었다.

“하지만 계속 그렇게 차를 훔쳐 이동할 순 없으니까…….”

공작금으로 쓸 돈이니 분명 상당한 액수일 거다. 그리고 그들이 돈을 들고 넘어가야 하는 곳은 망망대해였다.

왕국에서 가장 빠른 여객선을 타도 제국까진 1주일이 걸렸다.

그렇다면 돈을 감춰야 하는데,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들고 다니는 방법은 몇 개 없었다.

은행 차명 계좌로 넣거나.

직접 운반하거나.

은행은 들킬 위험이 너무 컸다. 계좌 추적도 가능하고, 동결시키면 그만이니까.

거기다 자칫하다간 은행원에게 들켜 그 자리에서 바로 체포되고 돈도 빼앗길 가능성이 컸다.

그러니 직접 들고 다닐 테지.

그렇다고 머저리처럼 돈을 대놓고 두 팔에 안고 다니지는 않을 테니, 어딘가에 담고 다닐 거다.

“…그게 서류 가방이구나.”

멀쩡한 정장 차림에 서류 가방을 들고 다니는 모습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차림이었다.

“때마침 호텔에서 사업 박람회를 개최한다더군.”

서류 가방을 감추려면 서류 가방이 몰려드는 곳에 숨어야 했다.

“때마침 후작님도 나와 비슷한 의견을 내 주셨지.”

아이트라가 보낸 자료엔 간첩들의 동선 예측도 적혀 있었다.

[…최근 해적단 ‘손가락’의 선장 체포를 비롯해, 해군의 활동이 두드러지는 현 상황에선 몸을 감추고 상황을 정비할 가능성이 크다.]

언제까지 샤프 영지에 숨어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분명 상황을 살피고 제국으로 넘어갈 준비를 하려 할 테다.

그러니 존재를 감추는 것보다, 민간인으로 위장하여 일상생활 속에 스며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야 정보를 모으고 차후를 대비할 수 있으니까.

“레토.”

노아가 물었다.

“이 새끼들, 돈을 얼마나 가진 걸까?”

“100피나를 기준으로 서류 가방 하나를 가득 채우면, 얼추 30만 피나는 나와.”

레토가 빠르게 계산했다.

참고로 남부 샤프 영지 회사원의 평균 월급이 3천 피나고, 4인 가족 평균 생활비가 2천 피나를 조금 넘었다.

즉, 서류 가방 하나만 있어도 무려 회사원 100명분의 월급이 나오고, 400명의 가족이 한 달을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테네브레가 설칠 만하네.”

노아는 빌어먹을 테네브레의 남부 침입을 인정해야 했다.

서류 가방 하나만 해도 저만큼의 거액인데, 만약 다섯 명이 나눠서 운반할 정도면 이건 정말 큰 문제였다.

‘돈의 출처까지 알아내야 하는군.’

피곤에 겨운 노아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가면 갈수록 일이 커졌다.

“그럼 조사는 어떻게 하는 거지?”

당장 호텔에 가서 모든 사업가를 조사할 순 없었다.

국왕의 명령도 명령이다만, 이곳 샤프 영지의 관광호텔에서 열리는 사업 박람회라면 노아도 익히 아는 행사였다.

국가 규모로 열리는 만큼 왕국에서 내로라하는 대기업이나 유명한 사업 관련자들이 참석한다. 여러 우방국에서도 사람을 보낼 정도다.

그런 사람들을 증거도 없이 함부로 조사할 순 없었다.

노아는 마냥 걱정이었다.

하지만 레토는 태연히 웃을 뿐이었다. 어딘가 능글거리면서도 자신감이 넘치는 저 모습.

노아는 익숙했다.

“계획 있어?”

“응.”

“그럼 뜸 들이지 말고 후딱 말해.”

심술이 난 노아가 괜히 레토의 허벅지를 발로 툭툭 찼다.

아야야, 아프지도 않은 발길질에 레토가 괜한 엄살을 피웠다.

“노아 너.”

레토가 노아에게 물었다.

“이륜차 타 볼래?”

***

며칠 뒤.

여름의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오후였다.

그러나 그깟 더위도 샤프 영지의 어린이들을 이기지는 못했다.

“으하하하! 너흰 내가 여기서 도축해서 사장에 판매하마!”

“나쁜 불법 도축자! 법대로 도축하지 않는 살육자!”

널 심판해 주마!

클라레는 비장한 표정으로 등에 멘 쌍칼 중 하나를 뽑았다. 식칼토끼 58화에 등장하는 식칼토끼 식칼의 첫 번째 진화 형태, ‘법의 심판’이었다.

“아니, 그건!”

악덕 불법 도축업자 역을 맡은 보르가 뒷걸음질 쳤다.

“도와줘요, 식칼토끼!”

“우리를 탈출시켜 주세요!”

“식칼토끼 파이팅.”

인질로 잡힌 센샤와 리리, 세레니가 각각 외쳤다.

클라레가 두 손으로 식칼 장난감을 높이 들었다. 그리고 엄지손가락으로 장난감에 달린 장식을 꾹 눌렀다.

뾰롱, 뾰로롱.

그러자 식칼에서 불빛이 번쩍거리면서 요란한 효과음이 울렸다.

“간다! 식칼토끼 필살기!”

클라레가 기합을 외치며 식칼을 보르의 가슴 앞에서 휘둘렀다.

“축산물 위생관리법 제22조 1항!”

영업 허가!

“끄아아아!”

필살기에 당한 보르가 휘청거리며 쓰러졌다.

그 틈에 클라레가 인질들을 구출했다. 다들 클라레를 끌어안으며 고맙다고 인사했다.

“별일 아니었네.”

클라레가 식칼을 다시 등 뒤로 메며 무게를 잡았다. 한껏 내려앉은 목소리와 눈빛이 제법 멋들어졌다.

“그대들을 괴롭힌 불법 도축업자가 그저 내 부모의 원수이지 않을까 해서 사냥했을 뿐.”

그럼 이만.

엄지와 중지, 두 손가락을 이마 위에서 살짝 튕기며 한쪽 눈을 찡긋한 클라레가 돌아서 홀로 떠났다.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바닥에 있는 흙먼지가 흩날렸다.

그렇게 가 버리는 듯했던 클라레는 다시 후다닥 친구들 곁으로 돌아왔다. 가슴에 달린 호루라기 목걸이가 따라 흔들렸다.

“어때? 나 멋있었지?”

클라레는 식칼토끼 역할을 완벽하게 연기했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클라레를 칭찬하는 대신, 그 등에 있는 식칼 장난감에 더 관심을 가졌다.

무려 장난감 가게에서 가장 눈에 잘 띄는 진열장에 놓인 최신 장난감이었다.

모두 부러워하는 장난감을 클라레가 전부 들고 나타났으니, 아이들의 관심이 쏠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나도 그 장난감으로 식칼토끼 해 볼래!”

“그러면 다음엔 내 차례! 내가 할 땐 클라레 네가 불법 도축업자 역할 하기다?”

“보르 다음에 내 차례야!”

“좋아!”

연기를 칭찬받진 못해도, 장난감을 부러워하는 친구들에게 클라레는 기꺼이 제 장난감을 건네었다.

“클라레.”

하지만 세레니는 장난감 대신에 클라레 옆에 있었다.

“아까, 식칼토끼 멋졌어.”

“고마워!”

클라레가 빵긋 웃자, 세레니도 입꼬리를 희미하게 올렸다.

그러고는 제 물통을 건넸다.

“자.”

“와, 마침 목말랐는데.”

클라레는 물을 한 모금 크게 마셨다.

“더 마셔도 돼.”

“안 돼. 그러면 네가 마실 게 없잖아.”

그리고 사실, 물보다 더 먹고 싶은 게 있었다.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

달고, 차갑고, 부드러운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었다.

“얘들아. 우리 아이스크림 사러 갈래?”

클라레의 제안에 아이들이 그러자며 공원 밖으로 나갔다.

아스가 늘 주의한 대로 언덕길을 내려갈 때는 장난치지 않고 조심조심 내려왔다.

하지만 평지에 도착하자마자 아이들은 우다다다 뛰어다녔다.

“근데 진짜 우리 유괴하려고 했던 할아버지, 나쁜 사람 아니야?”

리리가 얼굴 위로 흐르는 땀을 손으로 대충 닦으며 물었다.

“그 할아버지, 사돈어르신이었어. 진짜 내 손님이었어.”

“그러면 우리가 큰 실수한 거야?”

“할머니가 그랬는데, 우리를 놀라게 한 할아버지가 잘못한 거랬어.”

이제 아이들에게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있었던 일은 별일이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정말로 나쁜 사람도 아니었고, 그 일로 학교에서 표창장도 줬기 때문이다.

“야!”

그때, 보르가 도로를 가리켰다.

“아이스크림 차다!”

잡음이 살짝 섞인 오르골 소리와 함께 흰색 아이스크림 차가 나타났다.

가게에서 파는 것보다는 싼 아이스크림 차는 매주 정기적으로 샤프 영지를 찾아왔다.

“어라?”

리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은 아이스크림 차가 오는 날이 아닌데?”

아이스크림 차는 매주 목요일과 주말에 샤프 영지를 방문했다. 그리고 오늘은 수요일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이내 우르르 몰려가 아이스크림을 주문했다.

리리가 망설이는 사이에, 클라레와 아이들은 가장 마지막에 줄을 서게 되었다.

“우리 먹을 아이스크림도 있겠지?”

보르가 다 나은 발목을 높이 세우며 아이스크림 차를 바라봤다.

다행히 줄은 빠르게 줄어들었고, 곧 다섯 아이의 차례가 되었다.

“어서 오세요!”

아이스크림 아저씨가 환한 미소로 맞이했다.

“…….”

클라레는 그 모습을 멀뚱히 바라봤다.

“저는 이거 주세요.”

“나는 빙글빙글 생긴 거요!”

“오렌지 맛 있어요?”

친구들이 아이스크림을 주문했지만, 클라레는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오히려 뒷걸음질까지 치며 물러났다.

“클라레?”

세레니가 부르자, 클라레가 제 양 갈래 머리 중 한쪽을 잡아당겼다. 묶인 자국이 남은 결 좋은 금발이 아래로 풀어졌다.

하얀 털 뭉치 방울을 든 손이 파르르 떨렸다.

“어라, 우리 꼬마 아가씨는 뭐…….”

“아저씨 누구야?”

클라레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이스크림 아저씨 아니지? 나쁜 아저씨들이지!”

“꼬마 아가씨, 우리는 그냥 아이스크림 파는 착한…….”

“거짓말! 나 다 알아!”

클라레가 손에 들고 있던 방울을 아이스크림 차 가판대 안으로 집어 던졌다.

“야, 너 왜 그래…….”

오렌지 아이스크림을 손에 든 보르가 클라레를 말렸지만, 클라레는 더욱 으르렁거렸다.

이 소란 때문에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술렁거리며 하나둘 시선을 보냈다.

“저거 봐!”

클라레가 가리킨 건 아이스크림을 건네는 아저씨의 팔목에 있는 시계, 그 아래에 있는 문신이었다.

“오빠가 사진으로 보여 준 거야!”

아무래도 집안이 집안인 만큼, 가족들은 어린 클라레에게 다양한 활동을 체험하게 해 줬다.

어지간한 귀족 아이들이라면 교양으로 배우는 것부터 시작해서, 썩 적합하지 않은 지식 교육까지.

그중에서도 아티는 후자 담당이었다.

“오빠, 이게 뭔데?”

“제국에서 보낸 간첩을 상징하는 문신이야.”

“문신? 간첩?”

“문신은 몸에 새기는 그림이야. 절대 지워지지 않지. 그리고 간첩은 나라를 위험에 빠트리기 위한 반란분…….”

“애한테 뭘 가르치는 거야!”

그때마다 노아에게 발로 걷어차이며 혼이 났지만, 아티는 꿋꿋하게 클라레에게 자기 나름의 안전 교육을 시켰다.

“아드벨로는 언제 어디서 위험이 도사릴지 모르는 곳이니까.”

그리고 그의 교육은 오늘, 드디어 빛을 보게 되었다.

“제국 간첩의 문신이야!”

자그마한 네모에 그보다 큰 가위표가 겹친 문신.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모든 것을 조용히 끝마친다는 제국 간첩들의 의지를 담은 문신이, 아이스크림 차 아저씨의 손목에 새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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