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잠에서 깨어난 클라레의 환호성이 들렸다.
“식칼토끼 식칼이다!”
기쁨에 환호하는 소리와 함께, 방 안을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발재간 소리가 희미하게 울렸다.
“그것도 식칼토끼 58화에 나온 첫 번째 진화 형태인 ‘법의 심판’ 식칼이랑, 87화에 나온 두 번째 진화 형태인 ‘정의로운 복지도축’ 식칼이야!”
“우리 강아지가 일어난 모양이구나.”
비스가 천장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는 클라레가 일어나도 곧장 내려오지 않게 미리 방에다 선물로 덫을 쳐 둔 상태였다.
장난감이 클라레를 붙잡는 사이, 모두 분주하게 식탁 위를 치웠다.
“닷새다.”
마지막으로 글로리아가 말했다.
“그 안에 사냥을 끝내는 거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
클라레는 깜짝 선물을 들고 나타났다.
“고맙습니다!”
클라레가 허리까지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누가 선물해 준 건지는 모르겠지만, 가족들이 선물해 준 건 분명했다.
“할아버지, 이거 봐!”
비스에게 다가간 클라레가 등에 쌍칼을 멘 제 모습을 자랑했다.
제 딴엔 위엄 있는 표정을 짓는다며 입술까지 꾹 다물고 눈을 가늘게 떴다.
“멋있지? 응?”
“식칼 무기가 생겼으니, 우리 똥강아지가 더 강해졌나?”
“헤헤, 이걸로 난 무적이야!”
선물이 정말로 마음에 들었는지, 클라레는 식탁에 앉아서 아침을 먹을 때도 쌍칼을 놓지 않았다.
“그거 알아? 식칼토끼 114화에서, 식칼토끼가 불법 도축업자 조합을 물리칠 때 이 두 개를 합체했어.”
바싹 익은 달걀프라이를 포크로 잘라 먹을 때도, 클라레의 식칼토끼 지식은 빛을 잃지 않았다.
“…저거 진짜 전연령 작품 맞아?”
그리고 레토는 여전히 식칼토끼가 달갑지 않았다.
“편견일 수도 있겠지만, 난 처제가 소꿉놀이하는 게 더 좋아.”
“편견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난 차라리 저렇게 씩씩하게 노는 게 좋아.”
그래야 밤에 일찍 곯아떨어지지.
노아는 기운 넘치는 클라레가 잔뜩 진이 빠질 수 있는 놀이라면 뭐든 두 팔 벌려 환영이었다.
물론 범죄에 휘말리거나, 사고 위험이 높은 놀이 등은 제외였다.
“형부 받아랏!”
가족들은 아침부터 쏟아지는 클라레의 필살기에 한 번씩 맞아 쓰러져야 했다.
“축산물 위생관리법의 철퇴! 제3장 7호 1항!”
“크윽!”
그 와중에 레토는 입에 몰래 담아둔 베리 주스를 토하면서 열연했다.
“…내가 형부를 죽였어!”
클라레가 자신이 범죄를 저질렀다는 충격에 굳어 버린 사이, 레토는 노아에게 옆구리를 세게 꼬집히는 벌을 받았다.
“주말에는 오케아누스 저택에 가 볼래요?”
출근하기 전, 레토가 욱신거리는 옆구리를 만지작거리며 클라레에게 물었다.
“장군님이 초대해 주셨습니다. 친구들도 같이 데려오면 좋겠다고 하시더군요.”
“진짜로? 갈래!”
사돈총각한테 장난감 자랑해야지!
클라레는 식칼토끼 주제가를 콧노래로 부르며, 기쁜 마음으로 등교했다.
오케아누스 저택에 방문하는 날은 딱 닷새 뒤였다.
“그럼 우리도 출근하자.”
붉은 애마에 먼저 탔던 노아가 말했다.
곧 붉은 애마와 검은색 고급형 마동력차가 언덕에서 내려왔다.
글로리아와 비스가 탄 검은 차 짐칸에는 노아가 쓰는 마스의 짝인 페미나가 실려 있었다.
오늘부터 노아는 글로리아와의 개인 훈련이 끝나면 페미나에도 자신의 오러를 집어넣을 예정이었다.
***
“오셨습니까, 중장님.”
부지런한 피스트 준위는 레토가 처리해야 할 서류들을 들고 나타났다.
“좋은 아침이 될 뻔했는데…….”
일거리를 보자마자 레토는 벌써 퇴근이 간절했다.
그러나 몸은 이미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오늘 일정은?”
“크게 변동된 사항은 없으나, 대장님께서 오후 회의를 한 시간 일찍 당겼으면 하신다고…….”
오늘도 크게 주의해야 할 사항은 없었다. 즉, 남부가 평화롭단 소리였다.
“피스트 준위.”
그사이에 서류 하나를 처리한 레토가 명했다.
“혹시 군용차 중에 이륜차가 있던가?”
“있습니다. 군사경찰들이 호위용으로 운전하는 게 있지 않습니까.”
“그거, 속도는 좀 빠르던가?”
“잘 못 들었습니다?”
“한번 알아보고 오란 말이야.”
“지금 말씀이십니까?”
“오전 훈련 시작하기 전에는 와야 할 거야.”
이왕이면 이륜차를 직접 몰고 오면 더 좋고.
레토는 당황하는 피스트 준위를 향해 씩 웃으면서 세 번째 서류에 제 서명을 남겼다.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피스트 준위가 물었다.
“내가 궁금해서.”
“…….”
“혹시 그래서 꼽나?”
“아, 아닙니다…….”
괜히 또 비꼬는 소리 들을라, 피스트 준위는 서둘러 나갔다. 레토는 잘 다녀오라며 친히 자리에서 일어나 손까지 흔들었다.
그리고 혼자가 되자마자.
“…여보세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아이씨, 네 전화였나?]
수화기 너머로 아직 잠이 덜 깬 목소리가 투덜거렸다.
[뭐 때문에 아침 댓바람부터 전화야.]
“뭐 좀 하나 부탁하려고.”
[야. 내가 그때 말했잖아.]
“진짜 목숨 걸고 알아낸 거야.”
피니치 구역 폭발 사건을 조사하면서 했던 락소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정보원이 추적을 당했고, 부상까지 입었으며, 본거지인 술집까지 들킬 뻔했다.
그 뒤로 락소와 그의 정보원들은 정말로 행동을 자제하고 조심하는 중이었다.
[진짜 죽을 뻔했다고! 아직도 눈치 살펴야 한단 말이야.]
“이번에는 그런 위험한 거 아니야.”
[내가 네 말을 믿을 거 같아?]
“사람이 사람을 믿어야지. 그리 마음 닫고 살면 너만 힘들어.”
[마음 열고 일 받았다가 나만 힘들어졌잖아!]
수화기 너머 욕설을 무시하며, 레토가 주문했다.
“샤프 영지에서 열리는 사업 관련 행사 좀 알아봐 줘.”
***
검은색 띠를 두른 회색 중절모를 쓴 사내의 앞에는 커피 한 잔과 조각 설탕 2개, 가판대에서 산 신문이 있었다.
“요즘 손님 같은 분들이 많이 오시는군요.”
카페 주인이 서비스라며 조그만 쿠키 두 개를 접시에 담아 슥 내밀었다.
사내는 눈웃음을 지으며 신문을 펼쳤다.
“재미난 소식이라도 있습니까?”
“그런 소식이 있으면 큰일이지요.”
신문에는 그저 지루하고 평범한, 딱히 별일 아닌 사건들만 있는 게 좋다며 사내가 대답했다.
“그래도 눈에 띄는 건…….”
사내는 카페 주인이 궁금해하는 신문 기사 몇 가지를 읊었다.
“오케아누스 일가족의 여름 휴가 소식, 아드벨로 가문의 괴짜 짓, 7년째 행방을 찾지 못한 성녀, 국왕 전하의 차기 후계 문제 등…….”
“확실히 어제 신문과 다를 게 없는 것이군요.”
역시 평화로운 게 좋긴 좋다며 껄껄 웃던 카페 주인이 문득 창밖을 바라봤다.
덩달아 뒤를 돌아본 사내의 고개가 비스듬하게 움직였다.
“요즘 순찰하는 경찰분들이 많군요.”
“얼마 전에 유괴 미수 사건이 일어났잖습니까.”
그 일로 아드벨로 가문이 남부의 치안에 조금 더 신경을 쓴다는 공문이 내려왔다고 한다.
“이런, 아이들은 안 다쳤어야 할 텐데요.”
“다행히 미수로 끝나서 무사하답니다. 어린아이를 대상으로 하는 범죄라니. 정말 비열하죠.”
시시껄렁한 대화를 나눈 뒤, 사내는 팁을 잔 옆에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피 한 잔치고는 상당히 두둑한 팁이었다.
덕분에 카페 사장의 입꼬리는 내려올 줄을 몰랐다.
살펴 가시라는 인사를 받으며 나온 사내의 손에는 조금 전 읽었던 신문과 시커먼 서류 가방이 들려 있었다.
때마침 경비대 무리가 옆을 지나갔다. 이들은 해군에 소속된 치안 부대로, 경찰을 도와 샤프 영지를 살피는 역할을 했다.
“…….”
사내는 쓰고 있던 중절모를 조금 더 깊숙이 눌러 썼다.
조금 더 걸음에 속도를 붙인 사내가 도착한 곳은 샤프 영지에서 유명한 관광호텔이었다.
며칠 뒤면 이곳에서 사업 박람회가 열린다. 자신은 그곳에 참여하여 제 사업 구상안을 발표하고 투자금을 받을 계획이었다.
표면상으로는.
“어서 오십시오.”
“반가워요. 오늘은 날이 좋네요.”
“적당한 여름 날씨네요. 해변은 산책해 보셨나요?”
“한번 나가 보려고 합니다.”
이제는 제법 친해진 호텔리어와 인사를 나누며, 사내는 자신이 묵는 8층으로 향했다.
“8층입니다.”
“고마워요.”
엘리베이터 안내원에게 두둑한 팁을 건넨 사내는 곧장 제 방으로 들어갔다.
철컥, 문이 닫히는 순간.
“젠장…….”
중절모를 벗은 사내가 욕지거리를 뱉으며 신고 있던 구두를 한쪽 구석으로 집어 던지듯 벗었다.
그가 내뱉는 말은 왕국어가 아니었다.
방에는 4명의 사내가 먼저 와 있었다. 아니, 그들은 사내가 이곳에서 투숙할 때부터 함께 있었던 동료들이었다.
“아무래도 계획을 수정해야 할 거 같다.”
사내의 말에 동료들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순찰이 늘었어. 아드벨로가 공문을 보내 치안 강화를 지시했다더군. 나가 보니 알겠어.”
“들킨 건가?”
“그건 아니다.”
사내는 카페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동료들에게 전했다.
“최근 유괴 미수 사건이 일어났다더군, 예방 차원에서 내려온 지시야.”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상의를 탈의한 채 누워 있던 짧은 머리의 남자가 입을 열자, 모두 조용히 경청했다.
이들의 서열을 짐작케 하는 순간이었다.
남자의 체격은 꽤 가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의 상체를 뒤덮은 근육과 그 위에 난 흉터들은 결코 범상치 않았다.
“네 말이 옳다.”
남자는 조금 전 외출하고 돌아온 사내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나저나 유괴라…….”
남자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나쁘지 않은 방법이군.”
***
“호루라기 받았다?”
클라레는 쌍칼을 등에 멘 채, 퇴근하고 돌아온 노아와 레토에게 학교에서 받은 호루라기를 자랑했다.
“나쁜 사람이 나타나면 이렇게 불래.”
후웁!
클라레가 숨을 들이켜기 무섭게 노아와 레토는 재빨리 귀를 손으로 틀어막았다.
삐이이이-!
곧 날카로운 호루라기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허억, 허억……!”
있는 힘껏 불어 젖힌 클라레는 가쁜 숨을 헉헉거리며 휘청거렸다.
“으으, 어지러…….”
“으이구, 그러게 누가 있는 힘껏 불랬어.”
“할머니가 말했단 말이야. 여자가 한번 하기로 마음먹었으면 끝장을 봐야 한다고…….”
“일단 실내에서는 호루라기 불지 마.”
귀 아프니까.
위로 올라가 옷을 갈아입고 나온 노아와 레토는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사업 박람회?”
“거기에 숨어 있을 가능성이 커.”
레토는 간첩들이 몸을 숨긴 장소로 자신들이 신혼여행 때 묵었던 호텔을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