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6화 (86/245)

86.

쾅, 쾅!

걷어차인 노아는 비참할 정도로 맥없이 연무대를 두어 번 굴렀다. 마치 어린아이가 심심풀이로 찬 조그마한 조약돌처럼.

그리고 한 번 더 쾅!

그렇게 구른 노아는 끝내 연무대에서 떨어져 훈련장 벽에 부딪혔다.

“이제 정신 좀 차렸냐?”

아드벨로 대장이 벽에 박힌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는 노아에게 물었다. 희뿌연 먼지 사이로 뭔가가 움찔거리며 흔들렸다.

노아의 팔이었다. 나는 괜찮다는 의미였다.

실제로 노아는 아무런 탈도 없었다. 그저 온몸에 뒤집어쓴 먼지와 조금 전에 떨어지면서 살짝 긁힌 생채기, 파편 찌꺼기투성이였을 뿐,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창피하게.”

제 실수를 빠르게 인정한 노아는 으으,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알려지진 않았지만, 두 힘의 근원은 같다. 그러나 힘의 우월함은 오러에 있었다.

오러는 마법을 상회하는 강한 힘이었다.

당연했다.

마법은 몸에 잠재된 근원의 힘을 술식과 주문이란 매개를 통해 발산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마력이라고 부른다.

반면 오러는 훈련이란 제련을 통해 몸속의 근원을 날카롭고 거칠게 벼린 것이다. 한마디로 자기 자신을 무기로 만드는 일이었다.

학계엔 아직 저 근원의 힘이 증명되지 않아 가설로만 여겨진 이야기지만, 아드벨로 대장은 피에타 가문 덕에 이를 확신하고 있었다.

“이제 오러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은 너 말고 없어.”

아드벨로 대장이 말했다.

“오러를 쓸 수 있는 경우는 둘뿐이지. 혹독한 훈련으로 마력 대신 오러를 먼저 깨닫는 자.”

그리고 피에타 가문의 핏줄들.

“전자는 이제 없다고 해도 무방해. 마탑이 폭발한 이후로 세상은 100년 사이에 엄청나게 발전했다.”

목숨을 건 훈련을 하지 않아도 사람을 단숨에 죽일 수 있는 무기가 속속 생겨났다. 대표적인 예가 총이었다.

“무식하게 검 휘두르고 창 찌르는 훈련은 구시대의 유물이 되었지.”

“…….”

“그러니 현시점에서 오러를 유일하게 다룰 수 있는 건 노아 너뿐이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글로리아가 물었다.

“…….”

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노아의 진짜 신분은 ‘행방불명’ 처리된 상태였다.

대다수는 피에타의 마지막 핏줄이 전쟁에 휘말려 죽었다고 생각하나, 사실은 아드벨로의 비호 속에서 정체를 숨기고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순 없었다.

노아가 피눈물을 흘리며 왕국으로 넘어와, 제 모든 것을 감추고 해군에 들어온 이유가 있었다.

“네 정체를 드러낼 때가 조금씩 오고 있어.”

글로리아가 그 이유를 대신 말했다.

7년 전 전쟁에 불을 지핀 놈이 왕국에 숨어 있다.

그자는 곧 피에타 가문을 멸문시킨 관련자이며, 노아가 반드시 죽이겠다고 수천, 수만 번을 각오했던 가문의 원수.

“얼마 전…….”

그리고 드디어.

“…그자의 흔적을 찾았다.”

노아의 손에 들린 마스에 휘감긴 푸른 오러가 폭주하듯 바닥을 무참하게 긁었다.

마치 원통한 울분을 끝내 참지 못해 땅을 긁는 손톱처럼.

폭발하던 오러는 곧 잠잠해졌다.

***

그날 저녁.

“아이고, 삭신아…….”

퇴근하고 돌아온 글로리아는 비스의 부축으로 제 방 침대에 겨우 누웠다.

“손녀 훈련 한번 해 주다가 골로 가지, 진짜……!”

“안 갈 거면서…….”

밖에서 몰래 혼잣말로 중얼거리던 레토는 후다닥 도망쳤다.

전부 듣고 있던 글로리아가 마법으로 그의 목을 움켜쥐려고 했기 때문이다.

“할머니 아파? 내가 뭐 해 줄까?”

“파스 좀 붙여 봐라. 온몸이 근육통이여…….”

“큰 주인님, 그 전에 따뜻한 물로 뭉친 근육을 좀 푸시는 게 어떨까요?”

“그렇게 합시다. 씻는 걸 도와드리죠.”

아스가 목욕물을 받고 근육통에 좋은 성분이 든 목욕 소금을 물에 풀었다.

글로리아는 비스의 도움을 받아 욕조에서 몸을 풀었다.

“훈련?”

도망쳤던 레토가 그 틈에 노아에게 물었다.

“가문의 비기를 배우고 있어.”

노아는 글로리아와 미리 입을 맞춰 둔 거짓말로 둘러댔다.

사실, 거짓말도 아니었다.

노아가 말한 ‘가문’은 피에타 가문이었다. 그리고 마력을 오러로 바꾸는 건 피를 이은 정통 후계자만이 배우는 기술이었다.

“고생이네.”

레토는 노아의 거짓말을 순순히 믿었다.

“어쩐지 할머님이 널 왜 그 훈련장에 데려가나 싶었지. 단순히 노동 때문이 아니었군.”

오히려 그는 훈련에 관심을 보였다. 도대체 무슨 훈련이기에 저 괴짜 대장이 저리 끙끙거린단 말인가.

“나도 해 보고 싶다고 하면 욕심일까?”

무인으로서의 호기심이 동했다.

“해 볼래?”

“…해도 돼?”

가문의 비기라며?

의외로 노아가 흔쾌히 수락할 것처럼 보이자, 레토는 퍽 당황했다. 하지만 이왕이면 해 보고 싶다는 게 진심이었다.

“검술? 아니면 체술?”

“둘 다려나?”

오러는 신체와 무기를 강화시키니까.

“음…….”

노아는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페미나는 어떻게 할 거냐?”

“애송이한테 줘야 하는 거 아니냐?”

“그래도 그 애송이라면, 네가 나라를 팔았다고 해도 꼬리 흔들며 따라올 거 같은데?”

훈련 첫날, 글로리아는 부부검의 다른 한쪽인 페미나를 레토에게 빨리 주는 게 좋을 것 같단 의견을 내비쳤었다.

그때 노아는 잠시 고민했었다. 제 비밀을 알게 된 레토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걱정이었다.

저를 사랑하는 그의 진심을 의심하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여러 변수를 생각해 두고 싶었다.

하지만 오늘 글로리아에게 원수의 흔적을 찾았단 말을 듣고 결심했다.

“준비해 둘게.”

노아는 페미나를 레토에게 건네면서, 제 비밀을 말하기로 결심했다.

시간은 그렇게 많이 필요하지 않았다.

***

다음 날.

아드벨로 가문은 관할하고 있는 남부 지역에 공문을 내렸다.

얼마 전 샤프 영지에서 일어난 유괴 미수 사건을 이유로, 치안 유지와 어린이 안전에 더욱 유념하란 내용이었다.

[한 번쯤은 해야 할 일이었어.]

벨로 저택에 전화를 건 제니우스가 수화기 너머에 있는 노아에게 말했다.

[남부는 워낙 평화로우니까, 가끔 이런 식으로 긴장감을 줄 필요가 있거든. 안 그러면 진짜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제대로 대처하지 못할 테니까.]

그러니 아무쪼록 잘 지내렴.

나중에 또 보자.

진심 어린 안부와 사랑이 담긴 인사를 끝으로 제니우스가 전화를 끊었다.

“네 엄마?”

글로리아는 돌아온 노아에게 눈길을 보냈다.

“공문 보냈다고요. 아마 내일부터 경찰과 경비대들의 순찰이 조금 더 강화될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도 시작하지.”

식탁에 모인 인원은 다섯이었다.

글로리아와 비스. 노아와 레토.

마지막으로 아스까지.

군 관련자가 아닌 아스가 참여한 건 조금 의외였지만, 아무도 여기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다.

레토조차 분위기에 탑승해 의아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다들 당연하단 듯이 굴었다.

“오케아누스 후작이 보낸 자료다.”

수도에서 알버스에게 밀명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녀는 간첩들의 정보와 그간 행적, 이들의 이동 동선을 파악하고 앞으로의 행보를 예측했다.

그리고 그걸 오늘 새벽에 벨로 저택으로 전달했다.

“잡아야 할 간첩은 총 다섯.”

식탁 위엔 다섯 장의 얼굴 사진이 있었다. 전부 자신들의 사진이 찍혔는지 모르는 것처럼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평범한 인상과 평범한 차림새.

어느 누구도 이들이 간첩이라고 의심할 수 없는,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작년 가을, 피니치 구역에서부터 넘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키르코 준장의 보고도 함께 논해야 할 것 같습니다.”

레토는 손가락 해적단의 은신처를 살피고 온 키르코 준장의 보고를 떠올렸다.

작은 무인도 절벽에 만들어진 해안 동굴. 그곳은 손가락 해적단이 숨어 있던 은신처였다.

키르코 준장에 의해 파견된 제8성분전단 대원들은 그곳을 탐색하던 중, 수상한 흔적을 발견했다.

바로 왕국에서 유통되는 과자 봉투였다.

“시카 리우스가 프레드 렐리와 마약을 유통하면서 식량을 조달받았을 겁니다. 하지만 거기에 유의미한 증거 하나가 나왔습니다.”

“뭐였지?”

글로리아는 알면서도 한 번 더 물었다. 그 사실을 아직 모르는 노아와 아스를 위한 배려였다.

“북부 어느 영지에서만 판매되는 수제 과자입니다.”

일명 ‘노란 송이’.

설탕에 소다를 넣어 노랗게 부풀린 뒤, 거기에 손톱 크기의 바삭한 비스킷을 버무린 과자.

“아주 유명한 북부 기념품 중 하나입니다. 구하려면 반드시 이곳 영지에 있는 제과점에서 사야 하는 것이고요.”

“영지 이름이?”

“이노스 영지입니다.”

“이노스…….”

비스는 미리 펼쳐 둔 북부 지형도 위로 제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어느 산맥 앞에서 멈췄다.

“노아, 간첩의 이동 경로에 이노스가 있니?”

지도에서 눈을 떼지 않고 비스가 질문했다. 노아는 서둘러 보고서를 펼쳤다. 곧 간첩들의 동선이 적힌 부분이 나왔다.

“보레알 산맥을 따라 이동했다고 나와요.”

“이노스 영지 바로 뒤에 있는 산이구나.”

이로써 간첩들이 시카 리우스를 소개해 줬다던 프레드 렐리의 증언은 사실로 확인되었다.

“자기들이 만든 마약을 제국으로 수출하는 유통책으로 손가락 해적단을 소개해 준 놈이, 바로 간첩이란다.”

레토는 락소에게 들었던 정보를 떠올렸다.

그때, 노아가 말했다.

“간첩들은 이미 제국으로 넘어가는 바닷길을 알고 있겠군요.”

북부에서만 판다는 과자가 그 작은 무인도 해안 동굴에서 발견되었다는 건, 간첩들이 시카 리우스를 비롯한 해적들과 접촉하는 방법을 알고 있단 뜻이었다.

“해적을 통해 넘어가려는 걸까요?”

“그건 어려울 게다.”

글로리아는 확신했다.

바로 얼마 전에 손가락을 완벽하게 없앴고, 키르코 준장이 파견한 제8성분전단 대원들이 근처 해적들도 체포해 압송해 왔다.

당분간 남은 잔류 해적들은 몸을 사리는 쪽을 선택할 테니, 간첩들이 얼마를 불러도 쉬이 움직이지 못할 터였다.

하지만 노아의 말대로, 저들은 바닷길을 알고 있다.

“해적이 아니라도, 돈만 있으면 제국으로 들어가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어.”

그러니 반드시 육지에서 저들을 잡아야 했다.

“마침 오케아누스 후작이 그 잡것들이 왕국에서 무슨 짓거리를 했는지도 알아냈군.”

아이트라는 간첩들의 동선을 파악하여, 그 지역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사건들의 순서를 전부 확인했다.

“동선과 시간 흐름을 따라 각 영지에서 공통적으로 발생한 사건은 두 가지다.”

차량 절도와 소매치기.

얼핏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두 범죄지만, 이것만으로 간첩들이 무엇을 저질렀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공작금 운반과 신분증 위조.”

“현금을 짊어지고 다니는 거군요…….”

아스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간첩들의 이동에 제한이 있다. 이들은 제국으로 가는 안전한 방법을 찾기 전까지 쉽게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우와아아!”

그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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