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레토의 자존감이 생각보다 낮다는 걸, 그와 싸우고 화해하던 날에 눈치챘다.
오케아누스 후작에게 입양되기 전에 그가 겪었던 힘든 과거가 커다란 상처를 남겼기 때문이다.
‘이것도 그거랑 관련된 걸까?’
오늘 제 눈으로 직접 본 오케아누스 가족은 그냥 ‘가족’이었다. 서로를 소중히 여기고, 누구보다 행복하길 바라는.
하지만 레토와 그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있었다.
노아가 연애할 적에 느낀 크고 단단했던, 그리고 겨우 부서트렸던 그 벽 말이다.
이건 단순히 레토 본인이 습관처럼 말하던 ‘난 양자잖아’ 같은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인 거 같았다.
“이만 가 봐야겠어요.”
때마침, 아이트라가 몸을 일으켰다.
차도 두 잔 정도 마셨고, 이야기도 적당히 나눴으니 이쯤에서 돌아가는 게 좋다고 판단했다.
“그러자꾸나.
계속 머무르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며, 자리에서 일어난 알버스가 글로리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사돈어른, 정말 즐거운 시간 보냈습니다.”
“…….”
글로리아는 저를 향해 내민 손을 빤히 바라봤다.
살짝 무안해진 알버스가 손을 뒤로 엉거주춤 치우려던 찰나였다.
그는 혹시 제가 무슨 실수라도 한 건지 빠르게 제 행동들을 되짚어 보던 중이었다.
“야.”
참다못한 글로리아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선글라스를 벗었다.
“너 이렇게 멍청했냐?”
아무리 그래도 선글라스 좀 꼈다고 사람을 못 알아봐?
놀리는 건 이제 상관없었다. 오히려 자신이 놀림당하는 기분이 든 글로리아가 온갖 험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래도 날 못 알아보겠느냐고.
“예?”
갑자기 치고 들어온 욕설에 마음에 상처를 입은 백사자는, 그제야 눈앞에 드러난 사돈어른의 얼굴이 어째 낯익다는 걸 인지했다.
“…으음.”
알버스가 커다란 손으로 갈기 같은 백발을 벅벅 쓸었다.
“사돈어른, 제가 아는 누군가와 닮으셨군요.”
“…….”
아이트라가 한 손으로 눈을 가렸다. 상상을 초월한 제 아버지의 대답에 할 말을 잃어버렸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름 이 상황을 흥미롭게 구경 중이던 제니우스와 아메타도 놀라움에 입을 벌렸고, 비스는 드물게 입가에 늘 머금던 미소를 싹 거뒀다. 그만큼 놀랐단 뜻이었다.
“장군님, 시력이 안 좋으셔?
노아가 레토에게만 들리게끔 조심히 물었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많이 떨어지셨나…….”
안경을 맞춰 드려야겠다며 레토가 늙어 가는 할아버지를 걱정했다. 약간 울컥했다.
“…….”
하지만 이 중에서 가장 놀란 사람은 바로 글로리아였다.
“너 나 놀리냐?”
“사돈어른. 아까부터 말씀이 너무 격하신 거…….”
“나랑 닮았다는 그 사람이 누구인데?”
“예전에 같이 해군에서 근…….”
근무했던 얄밉고 짜증 나지만 실력 하나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어 더 짜증 나는 여자.
그 여자를 닮았다고 대답하려던 알버스의 목소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
그리고 소스라치게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아, 아……!”
백사자는 그제야 눈앞에 있는 사돈어른이 자신이 아는 누군가를 닮은 게 아니라, 그 사람 본인이란 걸 인지했다.
“…아드벨로!”
“놀리는 재미가 이렇게 없는 것도 힘든데.”
글로리아는 흥이 다 깨진 상태였다.
***
백사자는 사돈 가족들의 배웅과 레토의 부축을 받으며 차에 탔다.
“으, 으으……!”
뒷좌석에 거의 드러눕듯이 앉은 알버스는 레토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충격으로 말문이 막힌 그는 제대로 된 질문을 꺼내지 못했다.
하지만 레토는 충분히 알아들었다.
“저도 결혼한 뒤에 알았습니다.”
“으으…….”
“말하는 걸 깜빡했습니다. 저 역시 사실을 알고 다음 날까지 몸살로 드러누웠습니다.”
그러니 장군님께서 충격을 받으신 지금 상황은 이상한 게 아니라고 위로하는 레토는 참으로 효심이 깊은 손자였다.
밖으로 나간 클라레는 파란 마동력차 안에 드러누운 알버스를 발견했다.
“사돈 할아버지, 자요?”
“으으으…….”
“왜 아파요? 몰래 맛있는 거 혼자서 먹으면 배탈 나는데!”
할아버지도 몰래 먹었어요?
클라레는 선심 쓰듯 알버스의 허벅지를 문지르며 배탈을 물리쳐 주는 주문을 외웠다.
“할아버지 배는 똥배! 내 손은 약손!”
“사돈아가씨는 착하네요.”
곁에 다가온 아이트라가 칭찬했다. 주문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올린 클라레가 아이트라를 빤히 바라봤다.
그리고 말했다.
“사돈어른은 울 언니랑 닮았어요.”
“어느 언니랑 닮았으려나?”
“노아 언니! 뭔가 비슷해요.”
분위기가 닮았다는 뜻인가?
아이트라는 노아를 힐끔거렸다.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정적인 표정은 확실히 저와 비슷했다.
하지만 클라레가 말한 닮은 점이란 건 아주 예상 밖이었다.
“예쁜 게 닮았어요.”
헤벌쭉 웃은 클라레는 제 할 말만 쏙 하곤 냅다 가 버렸다.
노아의 다리 뒤에 숨어 고개만 빼꼼 내미는 모습이, 조금 전에 자신이 한 말에 부끄러움을 타는 듯했다.
거침없는 천진난만함에 아이트라는 어느샌가 웃고 있었다.
“사돈아가씨가 너무 귀엽구나.”
아이트라가 제게 다가오는 레토에게 말했다.
“나중에 집에 한번 데리고 오렴.”
“시간 내서 가겠습니다.”
“…….”
제게 공손히 대답하는 큰아들을 빤히 바라보던 아이트라가 손을 올렸다.
“즐겁게 지내는 거 같아서 다행이구나.”
그녀의 손은 아들의 이마 언저리를 가볍게 쓸었다. 레토는 저도 모르게 움찔거렸지만, 겁을 먹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제게 이토록 과분한 애정을 쏟아 주는 후작님께 고맙고도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많이 웃으며 지내니?”
그런 레토의 마음을 알기에, 아이트라는 아무것도 아니란 듯이 손을 치웠다.
“다들 너에게 잘해 주고?”
“늘 즐겁기 지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
아이트라가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레토도 어색하게나마 그 웃음을 따라 그렸다.
“작은 부군.”
그때, 아스가 레토를 불렀다.
“흑, 흐윽…….”
곤란해하는 아스의 옆에는 훌쩍이는 카리나가 있었다.
“카리나, 세상에.”
깜짝 놀란 아이트라가 서둘러 카리나를 품에 안았다. 그러자 카리나의 울음이 점점 격해졌다.
“무슨 일입니까.”
놀란 레토가 물었다.
“혹시 어디 아픈 건…….”
“그게 아니라요.”
아스가 뒤에 감춰 둔 것을 내보였다. 그건 바로 레토와 클라레가 함께 찍은 사진이 담긴 액자였다.
“부러웠나 봐요.”
자신은 가장 존경하는 형님을 매일 보지 못하고, 사진도 그렇게 많이 찍어 둔 게 없었다.
그래서 클라레의 방에 있던 사진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런데 클라레랑은 이렇게나 찍고…….”
“나한테는 잘 안 웃어 주시는데….”
“만날 보지도 못하고…….”
“사진도 몇 장 없는데……!”
속상했던 카리나는 참고 견디다 끝내 눈물을 터트렸다고.
“카리나.”
레토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몸을 낮췄다.
아이트라의 품에서 훌쩍거리던 카리나가 손등으로 허겁지겁 눈물을 훔쳤다.
하지만 오랜만에 보는 형님께 이런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다는 사실이 더 창피해서 눈물은 더 펑펑 쏟아졌다.
“그러다 눈 아프겠어.”
레토가 피식거리며 동생의 손을 붙잡았다. 아이트라는 눈치껏 품고 있던 아이를 풀어 주며 뒤로 물러났다.
“카리나.”
“네, 히끅, 형님…….”
“속상하게 해서 미안하다.”
“아, 아니에요……!”
그 말에 카리나가 고개를 붕붕 저었다. 지켜보던 아스가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아가씨만큼이나 귀여운 아이가 있다니!
“말이 나온 김에, 오늘 사진 한번 찍을까?”
그 말에 카리나가 어찌할 바를 모르며 발을 동동 굴렀다.
눈물로 흠뻑 젖은 얼굴로 배시시 웃으면서도, 존경하는 형님에게 마냥 편안하게 다가서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카리나는 레토의 옷자락만 손가락으로 겨우 잡을 뿐이었다.
멀찍이 떨어져서 지켜보던 노아는 카리나의 조심스러운 행동을 눈치챘다. 가슴이 아렸다.
레토가 세우는 이유 모를 벽 때문에 저 어린 것이 과거의 저처럼 상처를 입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스럽게도, 지금의 레토는 그때보다 성장한 상태였다.
“읏챠!”
레토는 일부러 큰 소리를 내 가며 카리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안 본 사이에 많이 컸구나? 몸도 무거워졌고.”
순식간에 시야가 높아진 카리나가 어버버했다.
“그, 그러면 내려 주셔도…….”
“에이, 동생이랑 사진 찍는데 다 큰 형이 안아 주지도 못해?”
“와아…….”
“처형이 사진기 가지러 갔으니까, 그때까지 어떻게 지냈는지 말해 줄래?”
카리나의 얼굴에 화사한 웃음이 피어났다.
“오, 오는 길에요, 기차를 탔는데, 거기서 파는 감자 과자랑 오렌지 주스가 엄청 맛있었어요!”
“그래? 난 한 번도 안 먹어 봤는데.”
“제가 형님이랑 형수님 주려고 몇 개 샀어요. 저택에 있으니까, 꼭 오셔서 드셔 주세요.”
“그럼 주말에 갈 테니까, 꼭 주기다?”
카리나가 고개를 거세게 끄덕이는 동시에 아스가 사진기를 들고 왔다.
“히히, 사돈총각은 울보였네.”
지켜보던 클라레가 키득거렸다.
“자기도 울보면서.”
옆에 있던 노아는 지금이야말로 ‘사돈 남 말하는 소리’라는 관용어구가 딱 어울리는 때라고 생각했다.
***
레토와 카리나의 사진은 결과적으로 오케아누스 가족사진이 되었다.
같이 있던 아이트라도 은근슬쩍 끼어들었고, 충격으로 뒷좌석에서 앓아누웠던 알버스도 레토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도련님.”
오케아누스 가족이 사진을 다 찍고 돌아가려는 때.
아스가 카리나에게 속삭였다.
“실은, 아까 도련님이랑 작은 부군이 단둘이 있던 모습도 사진으로 찍었어요. 두 사람만 찍힌 사진이니까, 나중에 몰래 보내 드릴게요.”
카리나는 감사의 의미로 아스를 와락 껴안고는 볼에 입을 맞췄다.
상견례는 그렇게 끝났다.
그리고 다음 날.
하룻밤 묵은 제니우스와 아메타는 클라레가 잠든 사이에 노아와 레토, 아스를 불렀다.
“우리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보호마법과 추적마법이 걸려 있단다.”
그들이 건넨 건 새하얀 털 뭉치 장식이 달린 머리 끈과 열쇠고리였다.
아메타가 보다 자세히 설명했다.
“클라레가 지닌 마력으로 자연스럽게 충전될 거니까, 몸에서 떨어트리지 않게 하렴.”
“간첩이 잡힐 때까진 우리도 신중해야지.”
그날 아침, 학교 가는 클라레의 양 갈래에는 부모님이 선물해 준 머리 방울이 달려 있었다.
이러하듯, 모두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시끌벅적했던 상견례는 즐거운 추억이 되었으나, 지금부터 맞이할 나날은 꽤 힘들고 고된 추억이 될 예정이었다.
그 시작으로.
“귀환을 환영하오.”
아드벨로 대장은 해군 본부를 방문한 귀한 손님을 친히 영빈했다.
백사자, 알버스 오케아누스 국방부 장관이 해군 본부를 방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