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어머, 입에 음식 넣고 말하면 안 되죠.”
그건 예의에 어긋난다며 아스가 점잖게 타일러 시간을 벌어 준 사이.
“그러고 보니.”
노아가 사람들의 이목을 서둘러 저에게로 돌렸다. 살짝 격양된 목소리가 삐끗했지만, 크게 거슬릴 정도는 아니었다.
‘어서 빨리 대화 주제를 바꿔야 해……!’
저 왈가닥 여동생이 뭘 말할지는 뻔했다.
분명 레토와 사귀던 당시에 술 마시고 미친개라며 난리 치던 걸 말하려는 걸 테지.
‘그건 절대 안 돼!’
시댁과 싸울 각오야 미리 다졌지만, 그건 레토가 부당한 대우를 받았단 확신이 들었을 때를 가정한 것이었다.
다행히 노아에겐 썩 괜찮은 대화 주제가 하나 있었다.
“레토한테 들었는데, 이이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장군님이라 했거든요.”
“어흠흠!”
알버스가 괜한 헛기침을 또 내뱉었다.
그는 부끄럽거나 무안할 때면 헛기침을 습관적으로 토한다는 걸, 노아는 머릿속에 확실히 기억해 뒀다.
“얼마 전에 들었습니다. 전송식 때 배웅했던 장군님 돌고래의 이름도 오케아누스 장군님에게서 따왔다고 하던데요.”
“아 거참! 에헤헴!”
괜한 소리 말라는 듯이 헛기침하지만, 알버스의 허연 수염은 기쁨을 감추지 못한 채 들썩거리고 있었다.
“노아…….”
레토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말렸다.
“그런 말을 왜 하는 거야.”
“아시는 거 아니었어?”
노아가 답지 않게 능청을 부렸다.
그러곤 오히려 모두에게 들으란 듯이 큰 소리로 말했다.
“난 네가 하도 존경한다고 말해서, 당연히 장군님도 아실 줄 알았지. 네가 해군이 된 것도 장군님처럼 되고 싶어서였다며.”
“그, 그건…….”
“아니었어?”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레 레토를 향했다. 특히 알버스와 아이트라의 노골적인 눈빛이 그를 은근히 압박했다.
저 말이 진짜니?
거짓말이면 울 거다?
“…….”
끝내 레토가 벌게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고, 뭐!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알버스의 목소리가 방 안에 쩌렁쩌렁 울렸다. 그러고도 기쁨을 감추지 못한 그는 손뼉까지 짝짝 쳤다.
“우리 큰 꼬맹이가 보는 눈이 좀 있습니다! 거참! 그러니 저리도 참한 아가씨와 결혼해서 이리 멋진 처가를 만난 거지요!”
“아버지도 참.”
그나마 아이트라가 빠르게 정신 차리고 알버스를 말렸다.
“그런 자랑은 속으로만 하시라니까.”
하지만 아이트라 역시 아들 자랑에 은근히 가세했다.
“레토가 어릴 적부터 영민하긴 했죠. 그걸 사돈분들이 모르실까 봐요?”
“그건 또 네 말이 맞구나.”
“우리 형님은 엄청 대단한 사람이에요.”
얌전히 식사하던 카리나도 참가했다.
“우리 사위가 가족들한테 인기가 많구나?”
제니우스가 잔을 들며 제안했다.
“가족들에게 사랑받는 사위, 아니죠. 이젠 저의 또 다른 아들인 레토를 위하여.”
“좋습니다!”
알버스가 잔을 따라 들자, 나머지 사람들도 각자의 잔을 머리 위로 들었다.
아이들도 음료수 잔을 두 손으로 번쩍 들어 올렸다.
“위하여!”
“위하여!”
모두의 목소리가 레토의 앞날을 축복했다.
그 속에서 침묵하는 사람은 딱 두 사람이었다.
“…….”
한 명은 너무 부끄럽지만, 그래도 가슴 근질거리는 이 상황이 너무 감사하고 기뻐서, 고개를 푹 숙인 채 잔만 살짝 들어 올리는 레토.
그리고 다른 한 명은.
“…….”
이 훈훈한 분위기가 아주 조금 마음에 안 들었던 글로리아였다.
“클라레.”
그래서 글로리아가 일부러 막내 손녀를 불렀다.
“우리 똥강아지, 아까 뭘 말하려고 했니?”
노아와 레토가 내적 비명을 질렀다.
“으응.”
입에 넣었던 걸 다 삼키고, 음료수로 완벽하게 헹군 클라레가 말했다.
“언니랑 결혼하려고 형부가 집에 허구한 날 찾아왔다고.”
그거 말하려고 했다며 클라레가 똘망똘망한 눈을 순수하게 깜빡였다.
“사돈어른, 울 언니 아팠을 때도 형부가 병문안했어요.”
“어머나.”
아이트라가 레토에게 정말이냔 듯이 바라봤다.
대답하기 부끄러웠는지, 레토는 고개만 묵묵히 끄덕였다.
“…칫.”
글로리아는 소리 죽여 혀를 찼다.
***
식사를 마친 식구들은 언덕 위 벨로 저택으로 가서 차를 마시기로 했다.
호텔 내 카페에서 차를 마셔도 되었지만, 결혼식도 보지 못한 신랑 측 가족들을 위한 선택이었다.
그리고 알버스는 그때까지도 글로리아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그저 글로리아를 저처럼 선글라스에 대한 조예가 깊은 멋쟁이 할머니로만 생각할 뿐이었다.
“할머니.”
글로리아가 탄 검은 마동력차에 올라탄 노아가 물었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예요?”
“놀라긴 내가 더 놀랐거든?”
사실 글로리아도 당황한 상태였다.
적당히 때를 봐서 정체를 드러낸 뒤, 알버스를 놀라게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백사자가 저렇게까지 눈치가 없었을 줄이야.
“선글라스 좀 꼈다고 날 못 알아보는 그놈이 이상하지!”
글로리아는 그런 알버스와 협력해서 간첩을 잡아야 하는 자신이 더 불쌍했다.
“일이나 제대로 하겠어?”
“오랜만에 레토를 봐서 기쁜 모양이에요.”
“넌 이 와중에 시댁 편드냐?”
“아니, 솔직히…….”
머뭇거리던 노아가 제 생각을 털어놨다.
“우리가 아드벨로란 사실이, 장군님한테 충격일 거 아냐.”
레토도 처가의 정체를 알자마자 드러누웠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글로리아, 즉 아드벨로 대장이 할머님이란 사실에 충격을 받은 거지만.
그리고 이리 생각하는 나름의 합리적 이유도 있었다.
“할머니랑 장군님, 꽤 티격태격했다면서요.”
“뭐…….”
글로리아도 그 점까진 부정하지 않았다.
“그건 젊은 날에 서로의 혈기를 주체 못 하고 잠시 부딪혔던 것뿐이야.”
“…….”
“나만 걔 차 손잡이에 접착제 칠한 줄 알아? 그 영감쟁이는 내 의자에 방귀 소리 나는 방석 넣었다고!”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사실인데?”
노아는 방귀 소리 나는 방석을 넣은 알버스나, 차 손잡이에 접착제 칠한 글로리아나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했다.
잠시 후 언덕 위 벨로 저택에 3대의 차가 들어섰다.
제니 벨로의 검은 차, 오케아누스의 파란 차가 순서대로 주차되었다. 레토의 붉은 애마는 가장 마지막이었다.
“야, 내 방에서 놀래요?”
“좋아. 장난감 뭐 있어?”
클라레와 카리나는 제법 친해졌는지,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편하게 말했다. 그러고는 2층 계단을 올라가 자기들끼리 놀기 시작했다.
곁에는 보호자로서 아스도 함께 있었다.
“클라레, 이 토끼는 뭐야?”
“이거 몰라? 식칼토끼라고 엄청 유명한데!”
“눈이 가위표네?”
“죽음을 피하지 않겠다는 신념을 상징하는 거야.”
한참 인형을 살피던 카리나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책장에 진열된 액자들이었다.
“이건…….”
살펴보던 카리나는 어떤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거는 말이지!”
쪼르르 다가간 클라레가 사진에 대해 설명했다.
“형부랑 같이 바다에서 모래성 쌓은 거야! 엄청 잘 쌓았다고 형부가 칭찬해 줬다?”
“…….”
“이것도 형부랑 찍은 건데, 결혼식 연회 때 같이 춤춘 거야!”
“형님이랑…….”
카리나는 사진을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봤다.
아주 슬픈 표정으로.
아스는 그걸 기민하게 눈치챘다.
***
아이들이 없는 동안.
어른들은 응접실에서 차를 마시며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눴다. 차는 노아와 레토가 부엌에서 직접 준비한 것이었다.
“향이 좋구나.”
차를 음미하던 아이트라가 말했다.
결혼한 자식 이야기는 이미 호텔에서 대충 나눴기에, 이번 대화는 어른들끼리 서로 친해지고 알아 가려는 목적이었다.
서로의 직업은 어떻게 되는지, 흥미 있는 관심사는 무엇인지 등.
마침 양가 어른들이 전부 군과 관련된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아이트라는 군에서 자문을 요청할 정도로 유명한 전략 연구원 겸 책사이고, 알버스는 전직 해군 대장 출신인 국방부 장관이었다.
“…그럼 사돈 부부께서 개인 함선 개발에 참여하셨단 말입니까?”
사돈 부부가 마탑 군수 개발 영역에서 일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알버스가 놀랍단 듯이 말했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글로리아의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한 상태였다.
“여기에 나라의 영웅이 계셨군요!”
“그 말씀은 다시 돌려드려야겠습니다.”
아메타가 공손히 대답했다.
“저희는 그저 만들 뿐, 실제로 그걸 사용해 나라를 구하는 영웅은 따로 있지 않습니까.”
아메타는 은근히 레토를 칭찬했다.
하지만 알버스의 표정은 떨떠름했다. 아이트라는 물론이었고, 레토 역시 굳은 얼굴을 한 채 제 손가락을 연거푸 만지작거렸다.
노아는 그런 레토의 손을 꼭 잡았다.
하도 문질러서 뼈마디가 빨갛게 달아오른 손가락이 하늘에서 내려온 구명줄을 잡듯이 힘을 가득 줬다.
“…그때만큼 저 녀석이 우리 속을 썩였던 적이 없습니다.”
알버스의 이야기는 노아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저놈이 참전하겠다고 나섰을 때, 부끄럽게도 처음으로 손찌검을 했습니다.”
7년 전 왕국 기사단이 신형 함선에 불을 지르면서, 왕국군의 역공 작전이 물거품이 될 뻔했을 때.
졸업을 앞둔 생도 한 명이 아직 시험 단계도 거치지 않은 신식무기를 이고 바다를 횡단했다.
그의 용기와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결과는 찬사를 받아 마땅하지만, 가족들은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전쟁은, 그런 것이지요.”
여태 조용히 듣고 있던 비스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사돈 어르신의 말씀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안경알 너머로 보이는 자애로운 눈웃음은 알버스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고 대답하는 듯했다.
전쟁만큼 평등하고 잔혹한 것이 어디 있을까.
눈에 띄는 모든 생명체를 짓밟고, 동등한 인격체를 무시하고 부정하다 끝내는 자기 자신의 존엄성마저 망가트리는 끔찍한 지옥.
그런 곳에 아직 임관도 받지 않은 젊은 자식을 내보낸다는 게 어떤 의미일지.
“…….”
“…….”
응접실은 먹먹한 적막에 휩싸였다.
다들 제 나름, 전쟁으로 인한 상처가 하나 이상은 있었다. 그걸 잠시 감내하느라 말을 아끼는 중이었다.
노아 역시 레토와 어깨를 나란히 기댄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다만, 노아의 생각은 조금 다른 쪽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내 추측이 다 틀렸어.’
레토는 오케아누스에서 눈칫밥을 먹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레토 혼자 그들을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서로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평범한 가족일 뿐이었다.
‘그런데 넌 왜…….’
노아의 시선은 자연히 레토를 향했다.
시선을 내리깐 채 먹먹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는 과거의 제 결정으로 상처 입은 아이트라와 알버스에게 여전히 미안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이해가 안 갔다.
‘…왜 가족들에게 벽을 세우는 거야?’
마치 자신이 큰 죄를 지은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