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우리 자기가 비밀이 많은 여자였구나.”
레토는 반쯤 체념했다.
“왜 이렇게 예쁜가, 싶었더니. 비밀이 많아서 예뻤던 거였나? 그렇다면 이해가 가지.”
“그래도 나름 재밌지 않아?”
지루할 틈은 없잖아.
철면피를 단단히 깐 것처럼 뻔뻔한 노아의 태도에 레토는 잠시 말을 잃었지만, 곧 그러려니 했다.
그간 연애할 때 노아의 속을 썩였던 걸 생각하면, 이 정도 비밀에 놀라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사실, 아드벨로 같은 대귀족 가문에 비밀이 없는 게 더 이상했다.
오히려 비밀을 알게 될수록 진짜 가족이 되어 가는 기분이니, 레토 입장에선 좋았다.
“언제 얘기해 줄 건데?”
레토가 물었다.
“말하기 전에 예고할게.”
노아가 남편의 옷깃을 정리해 주며 싱긋 웃었다.
“언니!”
그때, 클라레가 입구 쪽을 가리켰다.
호텔리어의 정중한 안내를 받으며 다가오는 세 사람이 있었다.
“유괴범 할아……!”
유괴범 할아버지라고 외치려는 클라레의 입을, 아스가 서둘러 손으로 틀어막았다.
입이 막힌 클라레는 읍읍, 소리를 내면서 저기 보라며 손가락으로 거구의 백발을 가리켰다.
“…드디어 오셨군.”
홀로 여유롭게 다리 꼬고 앉아 신문을 읽던 글로리아는 선글라스를 쓴 채였다.
“가자꾸나.”
글로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주위에 서 있었던 가족들이 그녀의 양옆을 지키듯 나란히 섰다.
“와아.”
아스 옆에 있던 클라레가 순수하게 감탄했다.
“우리 꼭 깡패 조직 같다!”
어른들이 입술을 꾹 다문 채로 어깨를 들썩거렸다.
하필이면 또 이쪽으로 다가오는 오케아누스 일가족도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저기도 깡패 같아.”
상견례 자리라고 양쪽 다 멀끔하고 색이 차분한 정장을 입은 탓에, 아이의 눈에는 깡패 조직들의 접선처럼 보였다.
“그런 말 하면 안 돼.”
노아가 점잖게 주의를 주는 동안.
“오셨습니까.”
레토가 먼저 다가가 인사했다.
“우리가 늦은 건 아니지?”
아이트라 오케아누스가 쓰고 온 선글라스를 벗으며 물었다. 이지적인 미모의 여인이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얼핏 보면 화가 난 것처럼 보였으나, 자신들이 늦은 건 아닌지 걱정하는 중이었다.
“딱 맞춰 오셨습니다. 오시는 길 불편하진 않으셨고요?”
“차 타고 오는 데 뭐가 불편하겠니.”
“큰 꼬맹이.”
에헴, 알버스 오케아누스 장군이 굵직한 목소리로 점잖게 내뱉었다.
“잘 지냈느냐?”
“예.”
“밥은 잘 챙겨 먹은 거 같군.”
“결혼한 뒤로 살이 좀 쪘습니다.”
레토의 말에 뒤에 있던 아스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벨로 가문의 요리를 전담하는 사람으로서 뿌듯해지는 순간이었다.
옆에 있던 노아도 인사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노아 벨로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벨로 양.”
“편하게 노아라고 불러 주십시오.”
“그럼 그대도 날 편하게 불러 줘요.”
아이트라와 인사를 나눈 노아는 알버스와도 악수했다.
“벨로 대위. 수도에서도 그대의 활약은 유명하네.”
“과찬이십니다, 장군님.”
“편안하게 할아버님, 이라고 불러주게.”
거구의 알버스와 눈을 맞춘다고 올렸던 고개를 살짝 내리니, 상대적으로 지나치게 작은 소년이 눈에 들어왔다.
노아와 눈이 마주친 카리나가 얼굴을 붉혔다.
노아는 싱긋 웃으며 인사를 먼저 건넸다.
“노아 벨로라고 해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카, 카리나 오케아누스입니다…….”
“오늘 제 동생도 같이 왔는데, 부디 잘 지내 주세요.”
그 말에 카리나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보라색 원피스를 입은 금발의 여자아이가 있었다.
노아를 쏙 빼닮은 아이는 저도 빨리 인사하고 싶다며 부모님께 징징대는 중이었다.
카리나는 그런 클라레의 태도가 꽤충격적이었다.
“어휴 그래, 그래.”
끝내 어른들을 굴복시킨 클라레가 신난 걸음으로 달려왔다.
오늘을 위해 연습해 둔 인사말이 있었다.
“안녕하셔요, 사돈어른.”
아이트라의 정숙한 표정에 살짝 금이 갔다. 클라레가 너무 귀여운 탓이었다.
“저희 형부가 늘 폐를 끼치고 있습니다.”
“언니! 언니라고 하셔야죠!”
뒤따라온 아스가 서둘러 정정해 줬다.
“…에고?”
제 실수를 깨달은 클라레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나 실수했어요?”
클라레가 아이트라에게 물었다.
“틀린 거 없어요.”
아이트라는 무릎을 굽혀 몸을 낮췄다.
“우리 아들이 폐를 끼치는 게 당연하지. 영특한 사돈아가씨가 고생이 많겠어요.”
“조금 그랬는데, 요즘은 괜찮아요.”
“죄송해요. 제 여동생이 말썽꾸러기라…….”
“사실이잖아!”
절 탓하는 노아에게 삐친 클라레가 씩씩거렸다.
“와아……!”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게 제 할 말을 하는 클라레의 기세에 놀란 카리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사돈아가씨 말마따나 폐 끼치면 안 되겠지?”
다시 몸을 일으킨 아이트라가 레토에게 뭐 하냔 듯이 눈짓했다.
“어른들을 계속 기다리게 할 거니?”
조금 전, 그녀가 자신을 ‘우리 아들’이라고 불렀던 것에 놀라 넋이 나가 있었던 레토가 뒤늦게 움직였다.
그제야 양가 어른들이 인사를 나눴다.
“…어머.”
그 속에서, 아이트라가 가장 먼저 눈치챘다.
제니우스를 알아본 아이트라의 감탄은 무척 점잖고 조용했지만, 속내는 어느 때보다 요란한 상태였다.
“우리 오랜만이네요?”
제니우스 아드벨로가 선해 보이는 눈웃음을 지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아이트라가 물어보려던 찰나.
“으하하하하!”
엄청난 성량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난 쪽으로 돌아보니, 알버스가 목젖이 훤히 드러날 정도로 껄껄 웃어 젖히고 있었다.
옆에선 글로리아와 비스가 따라 웃는 중이었다.
“언니, 천장이 흔들려.”
노아 옆으로 후다닥 대피한 클라레가 천장 높이 달린 샹들리에를 가리켰다.
크리스털을 깎아 만든 샹들리에 끝부분이 장군님의 웃음을 따라 짤랑짤랑 흔들거렸다.
“…아직 눈치 못 채신 거 같지?”
지켜보던 노아가 레토에게만 들리게끔 속삭였다.
보아하니, 글로리아는 알버스에게 아직 제 정체를 알리지 않은 듯했다.
“어쩐지 며칠 전부터 선글라스 찾는다고 분주하시더니.”
“장군님을 너무 안 놀렸으면 좋겠어.”
하다못해 상견례가 다 끝난 뒤에 정체를 밝혔으면.
레토는 소리 없는 한숨만 깊이 내쉴 뿐이었다.
부디 이 상견례가 무사히 끝나기를, 그가 바라는 건 딱 그것뿐이었다.
***
준비된 레스토랑 별실은 넓은 창문 너머로 새파란 하늘과 넓은 바다가 훤히 보였다.
“와아, 하늘에 떠 있는 거 같아!”
창문에 얼굴을 누르고 구경하던 클라레가 발끝을 폴짝거렸다.
“…….”
반면, 옆에서 같이 구경하던 카리나는 조용했다. 그러나 바다를 바라보는 얼굴은 어느 때보다 상기된 채였다.
“곧 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자리로 안내해 준 지배인이 나가고, 가족들은 널찍한 테이블에 두런두런 모여 앉았다.
어른이 아홉 명이고, 아이들은 두 명이었다.
막상 앉고 보니 인원수가 제법 되었다.
“사돈총각.”
클라레가 제 옆에 앉은 카리나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클라레라고 해요.”
“아, 안녕하세요…….”
카리나가 수줍게 인사했다.
“저는 카리나입니다.”
“여기 호텔 음식이 참으로 맛있대요. 특히 후식으로 나오는 아이스크림이 끝내준다네요?”
무려 초코 시럽을 뿌려 준대요.
엄청난 비밀인 것처럼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소곤거리자, 덩달아 귀 기울여 듣던 카리나도 대단하단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돈아가씨가 붙임성이 좋네요.”
조용히 지켜보던 아이트라가 노아에게 말했다.
“아까 인사할 때도 생각했지만, 야무지면서도 예의까지 바르고.”
저 칭찬하는 소리에 클라레가 헤벌쭉거렸다.
“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돈어른.”
“저야말로 만나서 반가워요, 사돈아가씨.”
“제 이름은 클라레입니다!”
씩씩하게 웃던 클라레가 잠시 멈칫했다.
아이트라 옆에 앉은 거구의 할아버지와 눈이 마주친 탓이었다. 알버스와 클라레는 서로를 한참 바라봤다.
“…일단.”
먼저 말을 꺼낸 건 알버스였다.
“이 늙은이가 아주 큰 실수를 했었지요.”
알버스가 정중히 사과했다.
“사돈아가씨와 친구분들을 놀라게 해서 미안합니다.”
“괜찮아요.”
클라레는 사과를 흔쾌히 받아줬다.
“형부가요, 할아버지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해 줬어요.”
“어흠흠!”
부끄러워진 알버스가 레토를 곁눈질로 힐끔거렸다. 그는 큰 꼬맹이가 저에 대해 뭐라고 말했는지 궁금해졌다.
다행히 클라레가 알아서 술술 대답해 줬다.
“장군님은 엄청 근사하고, 자신만의 멋을 아는 사람이래요.”
“뭘 또 그렇게까지.”
별소리를 다 한다며 알버스가 투덜거렸지만, 수북한 수염 아래 감춰진 인중은 헤벌쭉 내려온 상태였다.
“그리고 또…….”
클라레는 바로 며칠 전, 레토와 글로리아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장군님의 방광이랑 요도가 튼튼하대요.”
푸우웁!
식전 포도주를 홀짝이던 아메타가 입에 든 것을 화려하게 뿜어 냈다.
“콜록! 커어억!”
“당신 괜찮아?”
사레가 들린 남편의 등을 두드리는 제니우스는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고 있었다.
“이잉, 아빠도 차암.”
그건 예의가 아니지!
사돈분들 앞에서 무슨 짓이냐며 클라레가 야무지게 혼을 냈다.
“…죄송합니다.”
노아가 고개 숙여 사과했다.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귀가 빨갛게 달아오른 채였다.
하지만 어른들은 사과를 받아 줄 정신이 아니었다. 다들 클라레의 발언에 몸을 바들바들 떨며 웃음을 참느라 모든 힘을 쏟아붓는 중이었다.
“…….”
“…….”
그 속에서 레토와 알버스만 웃지 못하고 있었다.
***
어수선하던 분위기는 음식이 들어오면서 부드럽게 풀렸다.
아이들이 음식에 집중하는 동안, 어른들은 비로소 상견례다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음식이 맛있다느니, 날씨가 좋다느니.
조금 딱딱하고 어색한 대화 주제였지만, 흐름은 끊기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그리고 그때까지도 글로리아는 선글라스를 벗지 않은 채 식사했다. 덩달아 알버스도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두 사람은 언제부터 사귀었던 거니?”
제니우스가 물었다.
“새삼 생각해 보니, 엄마는 네가 연애하는 것도 잘 몰랐네.”
스테이크를 썰던 노아가 어색하게 웃었다.
‘밝히기 떳떳한 연애는 아니었으니까…….’
사귀잔 고백도, 사랑한다는 말도 없었던 자신들의 사이를 어찌 남에게 말할 수 있을까.
레토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씁쓸하게 웃을 뿐이었다.
“둘이 연애할 땐 뭐 하고 놀았니?”
“남들이랑 똑같았지.”
노아가 대충 대답하던 찰나.
“응! 으응!”
입에 음식을 잔뜩 넣고 우물거리던 클라레가 손을 번쩍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