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1화 (81/245)

81.

상견례 전날.

“너에게 해 줄 말이 있어.”

클라레의 방으로 찾아간 노아와 레토가 중대한 사실을 알려 주겠다고 말했다.

사뭇 비장한 두 사람의 표정에 클라레도 덩달아 긴장했다.

“처제.”

레토가 말했다.

“놀라지 말고 잘 들어요.”

“응…….”

클라레가 조그만 울대를 꿀렁거렸다.

“지난번에, 처제와 친구들을 유괴하려고 했던 사람, 기억해요?”

“나쁜 할아버지? 아이스크림으로 우릴 현혹하려 했어!”

어려운 단어까지 써 가며 그날을 떠올린 클라레는 크게 씩씩거렸다.

그렇게 무서운 일을 당했는데도, 아이는 놀라거나 겁을 먹지 않았다. 오히려 그때 제대로 반격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다음에 만나면 필살기를 반드시 쓸 거야!”

“안 됩니다!”

처제의 굳센 각오에 놀란 레토가 황급히 진실을 밝혔다. 이러다 장군님이 위험해질 판이었다.

“그분은 유괴범이 아니에요.”

“아니야. 유괴범이야. 나랑 친구들을 계속 쳐다봤는걸?”

“클라레…….”

노아가 보다 자세히 설명했다.

“그분은 정말로 널 보러 온 손님이었어.”

“잉?”

“레토의 할아버지였어.”

“이잉?”

조그만 머리가 갸웃거렸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클라레에겐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노아와 레토는 묵묵히 기다렸다.

다행히 그렇게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클라레는 영특한 아이였다.

“…형부 할아버지가 날 유괴하려고 했던 거야?”

“아니, 아니, 아니.”

다만 그 영특함이 가끔 엉뚱하게 발휘될 때가 좀 많았다.

노아가 한 번 더 차근차근 풀어 설명해 줬다.

“레토의 할아버지가 널 보러 왔는데, 클라레 너랑 친구들이 귀여워서 아이스크림을 사 줬던 거야.”

“우릴 유괴하려고 했던 게 아니야?”

“아니었어.”

“그럼 왜 경찰에 잡힌 거야?”

“이 마을에선 제 할아버지를 아는 사람이 없었거든요.”

레토는 설명을 위해 ‘장군님’ 대신에 ‘할아버지’란 호칭을 입에 담았다. 조금 낯설었지만, 그래도 의식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다들 좋은 의도였는데, 그게 조금 어긋났던 겁니다.”

알버스는 진짜 아이들이 귀여워서.

아이스크림 사장은 아이들이 걱정되어서.

경찰들은 본연의 임무를 다하기 위해.

‘…솔직히 장군님이 잘못하셨지만.’

평소 존경해 마지않는 장군님이지만, 레토도 속으로는 알버스가 조금 신중치 못했음을 인정했다.

“이해했어?”

노아가 물었다.

클라레는 자신이 이해한 걸 되짚었다.

“그러니까, 형부네 할아버지는 나쁜 사람이 아닌 거지?”

“바로 그겁니다.”

레토가 장하단 듯이 고개가 떨어져 나가라 끄덕였다.

덕분에 내일 상견례 때 알버스를 보고 ‘유괴범이다!’라고 경계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이젠 그도 제 처제의 돌발행동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역시 우리 처제는 똑똑하단 말이지. 어쩜 그렇게 빨리 이해할 수 있게 된 겁니까?”

“라디오 사연에서 들었어. 그거, 그, 사소한 오해가 만들어 낸 비극으로 파경을 맞은 부부 사연처럼.”

“…뭐, 그런 겁니다.”

다만 아직 모든 것을 짐작하진 못했다.

“그래도 라디오 사연이 도움이 될 때가 있네.”

레토는 거기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

오해는 풀었지만, 클라레는 잠들 때까지도 의심의 끈을 놓지 못했다.

“할아버지, 겁나 무섭게 생겼는데?”

“그건 무섭게 생긴 게 아니라, 근사하단 겁니다.”

“머리도 빗질 안 한 것처럼 나풀거렸고, 선글라스는 너무 컸는데?”

“자신만의 멋을 추구하는 분이죠.”

“넌 지금 애랑 무슨 이야길 하는 거야.”

노아는 길어지려는 대화를 서둘러 마무리하고, 클라레를 완전히 재운 뒤에 레토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우리도 이제 슬슬 잘까?”

“그 전에.”

이불 덮고 눈 감으려는 남편의 옆자리에 앉은 노아가 말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위에서 내려봐 주니까 짜릿한데.”

“인간아…….”

노아가 방정맞은 입술을 꼬집었다. 그 와중에도 레토는 큭큭 웃으며 노아의 허리를 두 팔로 안았다.

자연히 그의 머리가 노아의 허벅지 위에 눕혀졌다.

“뭘 물어보려고?”

“후작님이랑 무슨 대화 나눴어?”

그날, 집으로 걸려 왔던 오케아누스 후작의 전화를 받았던 레토는 꽤 오랜 통화를 나눴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게 대단한 이야긴 아니었어.”

레토의 대답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상견례 날짜랑 약속 장소 물어본 게 다였는데?”

“…….”

“네가 지금 무슨 걱정하는지는 알겠다.”

저를 내려다보는 노아의 표정엔 또 걱정이 가득했다.

혹여 이상한 소리라도 들은 건 아닐까, 한껏 좁혀진 아내의 미간을 손가락으로 살살 만지는 레토는 도리어 웃고 있었다.

저를 걱정하는 아내가 너무 사랑스럽지만, 그렇다고 마냥 걱정만 끼치긴 싫었기에 서둘러 덧붙였다.

“진짜 별 이야기 아니었어.”

순순히 대답하는 레토의 목소리엔 거짓이 없었다.

“안부 물어본 게 다야.”

그동안 잘 지냈냐느니, 그래도 연락은 좀 해 줬으면 했다느니, 카리나가 너를 많이 보고 싶어 한다느니.

그 말에 노아의 눈에 동그래졌다.

“후작님이 네가 연락 안 해서 서운해하셨어?”

“…그랬던 거 같아.”

머뭇거리며 대답한 레토도 조금 믿기지 않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표정은 썩 나빠 보이진 않았다.

그저 약간의 걱정을 했다.

“내 착각이면 실례려나?”

“실례는 무슨.”

노아가 코웃음을 쳤다.

그런 게 실례면 자신들 가족은 무례하기 짝이 없는 파렴치한일 거다. 자신들은 서로의 안부를 누구보다 걱정하는 사이좋은 가족이니까.

“그리고 착각이면 뭐 어때.”

노아가 입꼬리를 느슨하게 올렸다.

“그러면 나한테 와. 위로하고 안아 줄게.”

언제든 준비되었다며 팔을 살짝 벌려 제 품을 기꺼이 보여 줬다.

“…….”

그 모습을 넋 나간 듯이 지켜보던 레토는 몸을 꾸물거리더니 조금 더 가까이 노아의 품에 안겼다.

그리고 허리에 둘렀던 제 팔에 힘을 가득 실었다.

“내 아내는 너무 듬직해.”

“괜히 해군이겠어?”

“너무 멋져서 또 반했잖아.”

도대체 살면서 몇 번을 반해야 하는 거야.

말도 안 되는 투정을 부리는 레토의 귀와 목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노아는 그걸 모르는 척하며 토닥토닥 위로해 줬다.

“근데 레토.”

한참을 토닥이던 중.

불현듯 무언가가 마음에 걸린 노아가 확인차 물었다.

“너, 우리 부모님이 누군지는 알지?”

그 말에 레토가 고개를 들어 올려 노아를 바라봤다.

“전에 뵈었잖아. 마탑 수석 연구원이라며.”

“…….”

뭔가 이상함을 느낀 노아가 슬그머니 레토를 품에서 밀어냈다.

이제 보니 상견례 전에 미리 중대한 사실을 알아 둬야 하는 건 클라레만이 아니었다.

“내 할머니가 아드벨로 대장님인 건 이해했지?”

“그걸 이해하기 위해 내가 하룻밤을 앓아누웠잖아.”

저녁에 먹은 거 다 게워내면서.

레토는 힘겨웠던 그 순간을 아련히 떠올렸다.

“그래. 그러면 말이지…….”

노아가 차분한 목소리로 느리게 물었다. 마치 아주 쉬운 수수께끼를 물어보듯.

“우리 엄마는 누구게?”

“…….”

“아드벨로 대장님의 따님이겠지?”

“어…….”

슬그머니 상체를 일으킨 레토의 얼굴은 가관이었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그에게, 노아가 조곤조곤 말했다.

“상견례 때, 우리 부모님도 올 거야.”

“…….”

“그때는 진짜 모습으로 오실 거고.”

제니 벨로, 아메타 벨로가 아니라.

마탑주 제니우스 아드벨로와, 그녀의 수석 보좌관인 아메타 아드벨로로.

한참 말이 없던 레토가 힘겹게 한 마디 꺼냈다.

“…할머님한텐 비밀로 해 줘.”

놀릴 게 뻔하잖아.

노아는 알겠다고 약속하며, 체기가 도진 듯한 남편의 등을 토닥거렸다.

***

상견례 당일.

약속 장소인 호텔에 먼저 도착한 벨로 가족들은 로비에서 기다리는 중이었다.

“여기, 언니랑 형부가 신혼여행 왔던 데네?”

보라색 원피스 위에 소매가 짧은 카디건을 입은 클라레가 비스의 손을 잡은 채로 몸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와 본 적 있어?”

“응. 형부랑 모래성 만들면서 놀았고, 저기서 장난감도 샀어.”

비스가 클라레와 놀아 주는 사이.

레토는 노아의 부모님과 두 번째 인사를 나눴다.

처음 만났을 때와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었지만, 서글프게도 레토는 이쪽이 훨씬 친숙했다.

“이쪽이 더 익숙하지?”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제니우스 아드벨로가 레토의 팔뚝을 가볍게 두드렸다.

초록색 눈, 갈색 머리.

일할 때 종종 만났던 마탑주가 장모님으로 다시 나타났다.

“일로 만났을 때도 생각했지만, 우리 사위는 얼굴 하난 진짜 끝내주네.”

“그때부터 절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하는 성격도 끝내주고.”

“매사를 긍정적으로 살려고 노력합니다.”

“호호! 넉살도 좋아라.”

레토는 마탑주 제니우스를 보고도 능청스럽게 웃는 상을 유지했다.

글로리아가 노아의 할머니란 사실을 알았을 때 앓아누웠던 걸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실제로도 레토는 그날의 충격을 백신처럼 삼고 있었다.

다행히 아메타 아드벨로는 처음 만났던 모습 그대로였다.

“변함없는 모습에 감사드립니다.”

아예 아메타의 손을 잡고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아메타도 이쯤 되니 레토가 조금 불쌍해졌다.

“이제 더는 놀랄 일이 없다고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레토가 간절한 마음으로 물었다.

제 처가댁이 아드벨로란 사실, 거기에 아내의 오빠가 테네브레란 사실을 알게 될 때마다 심장이 아찔했다.

“…….”

“…….”

그러나 레토의 바람과 달리, 그들은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돌아오는 침묵은 여전히 놀랄 거리가 더 있단 뜻이었다.

레토는 노아를 밉지 않게 흘겨봤고, 노아는 아예 고개를 돌려 눈을 피했다.

“…또 있어?”

물어보는 레토의 목소리는 지쳐 있었다.

“자, 잠깐만…….”

노아가 드물게 말을 더듬거렸다.

양해를 구한 뒤, 노아는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으며 뭔가를 중얼거렸다.

레토는 노아의 손가락이 접힐 때마다 헛웃음이 나왔다.

“여보, 이러다 나 심장이 남아나질 않겠어.”

그래도 이번엔 레토의 칭얼거림이 통했는지, 노아의 손가락은 딱 두 개만 접혀 있었다.

“큰 거 하나, 작은 거 하나 있어.”

이 정도는 괜찮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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