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아이트라 오케아누스 후작의 예상은 정확했다.
“푸하하하하!”
유괴범의 정체가 알버스 오케아누스 장군이란 사실은 벨로 저택에 이미 빠르게 전해졌다.
그리고 글로리아는 숨이 넘어갈 정도로 자지러지는 중이었다.
“천하의 백사자가 유치장에? 그것도 어린애 유괴범으로 몰려서?”
“아이스크림으로 유혹했어. 나쁜 할아버지였어!”
클라레는 자신이 어떻게 그 유괴범을 무찔렀는지 열심히 자랑했다.
자기가 제압했다는 둥, 허풍과 과장이 많이 섞였지만 글로리아는 다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딱 하나였다.
“잘했어! 아주 잘했어!”
제 손녀가 그 망할 놈에게 엿을 먹였단 것.
한껏 들뜬 글로리아는 클라레를 꼭 끌어안더니, 이마랑 볼에 입술을 쪽쪽 맞췄다.
할머니의 격한 애정에 깜짝 놀란 클라레가 도망치듯 그 품을 벗어났다.
“그래도 앞으로는 낯선 사람을 따라가면 안 돼.”
알겠지?
비스가 손수건으로 클라레의 젖은 얼굴을 닦아 주며 진지하게 말했다. 클라레는 알겠다며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아이들은 어떻다더냐?”
“다행히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고 해요.”
아스가 대답했다.
조금 전에 각자의 집에 전화해서 확인해 봤더니, 조금 놀라긴 했지만 평소와 다름없다고 했다.
그래도 며칠 동안은 주시하기로 했다고.
“그럼 다행이지만….”
비스가 소파 한쪽을 힐끔거렸다.
구석진 끄트머리에 처연히 앉아, 고개를 두 손에 파묻은 채로 떨군 손녀사위가 마음에 걸렸다.
“자기야, 괜찮아.”
옆에 같이 있던 노아가 레토의 등을 살살 쓸며 위로했다.
“그냥 클라레 예뻐서 아이스크림 사 주시려고 했던 건데, 조금 오해가 생겼나 봐.”
“…….”
“그리고 너도 일부러 장군님을 욕한 게 아니잖아….”
레토는 더욱 상체를 고꾸라트렸다.
그는 조금 전 자신이 했던 말을 고스란히 돌려받았다.
나이 곱게 못 처먹은 유괴범인 줄 알고 욕을 했고, 범인의 손주가 해군이란 걸 알았을 땐 당장 내쫓을 거라고 못된 생각까지 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범인이 알버스였고.
그의 손주는 바로 저였다.
결국, 자기 얼굴에 욕한 꼴이었다.
레토는 알버스에게 미안해서 도저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창피하고 부끄러운 마음보다, 존경하는 장군님께 그딴 말을 내뱉었단 사실이 너무 충격이었다.
“그나저나 오늘 도착하셨나 보다.”
노아는 어색하게나마 화제를 돌렸다.
아스도 이에 동참했다. 그녀의 눈에도 지금의 레토는 너무 불쌍했다.
“곧 만나겠네요. 어떤 분들이실까요?”
분명 좋은 분이실 거라며 아스가 기대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노아도 같은 생각이었다.
“만나기 전에 연락 주신다고 했으니까, 기다려 보자.”
오케아누스 후작은 도착하고 좀 쉬었다가 며칠 뒤에 연락하겠다고 미리 언질했었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되어 버렸으니.
‘연락 안 하는 거 아냐?’
노아는 내심 걱정이었다.
“아이고, 뭔 되도 않을 생각을 하고 있어.”
노아의 생각을 읽은 글로리아가 아서라며 단호히 말했다.
“할머니 다 웃었어?”
클라레가 제 손목을 유연하게 뒤로 꺾으며 말했다.
“아까 보니까 할머니 허리가 이렇게 됐어.”
“네 덕에 실컷 웃었다. 4년은 회춘한 거 같다, 야.”
대견한 손녀에게 한 번 더 뽀뽀한 뒤, 글로리아가 말했다,
“그쪽도 억울하겠지. 하지만 잘못은 그 영감이 먼저 했어.”
그러게 누가 결혼식 연회를 그렇게 몰래 훔쳐보랬나.
“자기만 애들 얼굴 알지. 애들은 그 영감 얼굴을 모르잖아.”
“그래도 좋은 마음으로 하셨는데…….”
“좋은 마음이고 뭐고.”
누군가의 선의도 때와 장소가 안 맞으면 악의가 될 수 있다. 안타깝게도 이번이 바로 그런 상황이었다.
“애초에 그 영감은 혼이 좀 나야 해.”
알버스는 제 얼굴이 아이들에게 잘 먹힌다는 어마어마한 착각에 빠져 있었다.
“…잘 먹히는 얼굴입니다.”
레토가 은근히 반박했다.
“그분만큼 잘 생기고 근사한 남자가 어디 있습니까.”
“너나 그렇게 생각하겠지.”
“제 동생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백사자가 그런 착각을 하게 된 원흉들이 손주들이었군.”
글로리아가 혀를 짧게 찼다.
따르릉-.
“…….”
“…….”
전화가 울리자, 가족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전부 입을 꾹 다물었다.
“내가 받을까?”
어른 중 누구도 전화를 받지 않으니, 보다 못한 클라레가 용기 있게 나섰다.
“여보세요? 벨로입니다.”
“…….”
“…….”
어른들은 클라레가 전화 받는 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이게 무슨 짓인지.’
염탐하는 듯한 자신들의 행동거지가 뒤늦게 부끄러워진 아스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비단 더운 계절 탓이 아니었다.
“네. 네에. 그럼 잠시만요.”
수화기 너머 누군가와 열심히 대화를 나누던 클라레가 뒤를 휙 돌아봤다. 지켜보던 어른들이 움찔했다.
“형부!”
클라레가 레토에게 수화기를 내밀었다.
“형부 엄마가, 형부 바꿔 달래요!”
***
드디어 양가 상견례가 잡혔다.
장소는 노아와 레토가 신혼여행이랍시고 갔다가 한 번도 밖으로 나온 적 없었던 호텔이었다.
“그래서, 뭘 어떻게 해야 할까?”
점심 먹고 잠깐 쉬는 중.
얼마 전 클라레가 노래를 열창했던 등나무 정자 아래서 노아와 아미, 셀린이 식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노아는 곧 있으면 시댁을 만나는데, 뭘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몰라 친구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천하의 노아 벨로도 긴장한단 말이지…….”
아미가 매점에서 산 과자를 우걱우걱 씹으며 말했다.
“상대가 오케아누스면 떨릴 만하지.”
셀린은 아미의 입에서 떨어지는 과자 부스러기를 모며 오만상을 썼지만, 자기도 과자 얻어먹는 입장이라 뭐라 하진 않았다.
“으음, 일단 얕보이면 안 되겠지?”
“라디오 사연에서 들었는데, 시댁살이는 남편이 중심을 잘 잡아야 한대.”
“그럼 남편을 협박해야 하나?”
“일단은 침대 위에서 암바 같은 기술을…….”
아미와 셀린은 제 나름대로 주워들은 지혜를 발휘했다.
“…고려해 볼게.”
노아는 그냥 혼자 고민하기로 결정했다.
어쨌건 양가 가족들이 처음 만나는 순간이었다.
벨로 가족들은 각자 나름대로 긴장했고, 그만큼 준비하느라 바빴다.
“으음, 뭘 입어야 사돈어른이 날 예뻐하실까?”
클라레는 매일 거울 앞에서 자기가 가진 옷들을 꺼내 이것저것 비교해 봤다.
“순수한 느낌이 좋을까? 아니면 거친 느낌?”
“설마 그 거친 느낌이란 게 오른손에 들린 옷은 아니죠?”
어지럽혀진 옷을 정리하던 아스가 물었다. 클라레의 오른손에는 식칼토끼 인형 옷이 들려 있었다.
“식칼토끼는 거친 매력이 있거든! 이거 입으면 어른들이 엄청 좋아해! 내가 이걸로 작년에 과자 값을 벌었어!”
“그 털옷을 지금 입는다고요?”
반팔 입어도 더운 이 계절에?
심지어 작년에 입었던 거라, 아스가 눈대중으로 재어 보니 팔다리 소매가 다 짧아 보였다. 입으면 좀 끼일 거 같기도 했고.
“작아진 거 같은데, 이건 버려야겠어요.”
“싫어!”
클라레는 아직 식칼토끼를 보낼 준비가 안 되었다.
“이, 이건 잠옷으로 입을 거야! ”
“그러면 다른 걸 입어 볼까요?”
“빨간 거 입을래. 난 빨간 거 보면 불타오르거든.”
“얌전해야 할 자리니까 파란 걸 입죠.”
아스는 교묘한 수로 클라레가 식칼토끼 옷을 포기하고 평범한 원피스를 입게끔 했다.
“우리 강아지가 가장 열심히 준비하는구나.”
지나가던 비스가 흐뭇하게 지켜봤다.
그의 말대로, 이번 상견례를 가장 열심히 준비하는 건 클라레였다.
일찌감치 입고 갈 옷을 준비해 둔 것만으로 모자라, 노아와 레토를 재촉했다.
학교에서도 친구들에게 곧 있으면 사돈 가족을 만난다며 자랑까지 했다.
“빨리! 빨리!”
“뭘 빨리하라는 거야….”
퇴근하고 올 때마다 이유도 모를 재촉을 받는 노아 입장에선 귀찮아 미칠 지경이었다.
“형부 가족을 만나는 거니까, 어서 해야지.”
클라레는 야무지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뭘….”
“그냥 아무거나 다!”
“음….”
잠시 고민하던 노아가 레토를 힐끔거렸다.
시선이 마주친 레토는 클라레를 대신 맡아 팔에 안았다. 시선이 높아진 클라레가 오오, 하고 환호했다.
“처제, 뭘 준비해야 하나요?”
“사돈댁에 잘 보일 준비.”
“그런 거 안 해도 돼!”
씻고 나온 글로리아가 코웃음을 쳤다. 클라레만큼은 아니어도 다들 상견례를 나름 신경 쓰고 있는데, 글로리아 혼자만 여유로웠다.
하지만 다른 의미로 글로리아 역시 상견례를 가장 기다리고 있었다.
“백사자 그놈, 자기 사돈이 나인 걸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
차마 대답하지 못하는 레토의 표정은 굳은 채였다. 그도 알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될 장군님이 얼마나 큰 충격을 받을지.
글로리아는 바로 그걸 기대했다.
“내 얼굴 보고 바지에나 지렸으면 좋겠다.”
“장군님의 방광과 요도는 튼튼합니다.”
그간 얌전히 지냈던 레토가 오랜만에 반격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이상한 의미로 역겹잖아!
레토와 글로리아의 신경전이 제법 날 섰다.
“형부.”
이 모든 걸 지켜보던 클라레가 물었다.
“그놈이 누구야?”
“제 할아버지입니다.”
“나 좀 내려 줘.”
레토가 바닥에 내려놓기 무섭게, 클라레가 소파에 앉은 할머니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할머니!”
그리고 따끔하게 혼냈다.
“사돈이랑 사이좋게 지내야지!”
“에이, 나랑 그놈은 원래부터 아는…….”
“그놈이 아니라! 사돈어르신!
클라레는 아예 허리춤에 손까지 올린 채, 철딱서니 없는 소리를 하는 할머니를 타일렀다.
“우리가 사돈 가족들께 잘해 줘야, 거기서도 울 언니한테 잘해 주지!”
“뭐, 그 정도까지야…….”
“그리고 형부 엄마랑 할아버지면, 나한테도 어머니고 할아버지야. 다 가족이라고. 그렇게 괴롭힐 생각만 하면 어떡해!”
괴롭히는 건 나빠!
“…….”
글로리아는 바로 며칠 전에 알버스를 유치장으로 보낸 네가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클라레의 말은 틀린 구석 하나 없었다.
“알겠어.”
결국 패배를 선언한 글로리아가 두 손을 항복하듯 들었다.
“처제…!”
감동한 레토가 클라레를 번쩍 들어 안았다.
“절 이렇게나 생각해 주고 있었다니…!”
“내가 가끔 사고는 치지만, 여기서 가장 정상적인 사람이거든. 정신 바짝 차려야지.”
클라레는 걱정 말라며 주먹으로 제 가슴을 팡팡 쳤다.
“내가 형부를 지켜 줄게.”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주체 못 한 레토가 바닥에 쓰러진 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췄다.
“…눈꼴 시려.”
홀로 남겨진 글로리아는 방으로 쓸쓸히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