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9화 (79/245)

79.

“유괴를 당할 뻔했다고?”

그날, 퇴근하고 돌아온 노아와 레토는 아스가 들려주는 위험천만한 상황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특히 노아는 피가 마르는 기분에 눈앞이 아찔했다.

끝내 휘청거리는 걸 레토가 서둘러 붙잡아 지탱했다.

“다행히 아이스크림 가게 사장님이 경찰에 빠르게 신고해서 범인을 잡을 수 있었대요.”

아스는 사건이 잘 해결되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얼굴에 남아 있는 근심만큼은 쉬이 지워 내지 못했다.

“처제는 괜찮습니까?”

레토가 물었다.

“아가씨는…….”

아스가 말을 머뭇거렸다.

그 사이, 몸을 겨우 추스른 노아가 클라레를 찾았다.

“클라레!”

“언니? 언니 왔어?”

나 여기 있어!

위험한 일을 당할 뻔한 클라레의 목소리가 들린 곳은 욕실이었다.

“이것 봐라? 전에 형부가 사 준 식칼토끼 장난감!”

클라레는 이른 목욕 중이었다.

욕조 안에 식칼토끼 머리 여러 개가 두둥실 떠 있었는데, 클라레가 그걸 쥐어짤 때마다 거품이 보글보글 나왔다.

“…….”

노아는 이 모든 걸 황망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아이스크림을 온 얼굴이랑 옷에 묻히고 오셨거든요.”

뒤따라온 아스가 사정을 설명했다.

“그래서 저녁 드시기 전에 미리 씻기는 중이었어요. 그렇다고 안 놀란 건 아니니까 너무 혼내지 마세요.”

“그럴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어.”

지난번에 바다에서 다칠 뻔한 건 클라레의 장난 때문이었으니 혼을 냈던 거다.

반면 이번 유괴 미수는 전적으로 가해자의 잘못이다.

“클라레가 막무가내에 저 똑똑한 척은 다 하지만, 아직 판단이 미숙한 어린애라고.”

“무슨 욕을 그렇게 해…….”

욕실 밖에서 듣고 있던 레토가 기막혀했다.

“클라레.”

욕조로 다가간 노아가 클라레의 젖은 얼굴을 손으로 어루만졌다.

“언니, 나 괜찮아.”

노아가 뭐 때문에 그런 표정을 짓는지 짐작한 클라레가 씩 웃었다. 제 나름의 위로였다.

“내가 나쁜 사람 잡는 거 도와줬어!”

욕조에 앉은 채로 클라레가 턱을 높이 치켜들었다.

“하여튼 대단한 녀석이야.”

노아가 클라레의 머리를 벅벅 쓸었다. 클라레는 실없이 헤헤 웃었다.

“언니! 언니도 나랑 같이 씻자!”

“그럴까? 아스, 나머지는 내가 씻길 테니까 나가 봐.”

“그럼 전 저녁 준비하러 갈게요.”

“저도 도와드릴게요, 처형.”

노아와 클라레가 씻고 나오니, 맛있는 음식 냄새가 솔솔 나왔다. 코를 자극하는 향신료 냄새가 풍겼다.

“오늘 저녁은 파에야인가 봐.”

“파에야!”

저녁이 완성될 때까진 시간이 좀 필요했다. 글로리아와 비스도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그 사이에 노아는 클라레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금 더 상세히 물었다. 레토와 아스도 자리에 함께했다.

클라레는 놀란 기색 없이 침착하게 자신이 겪은 일을 들려줬다.

“공원에서 애들하고 노는데, 벤치에 이상한 할아버지가 우릴 보고 있었어.”

“미친 새끼…….”

레토가 저도 모르게 욕을 읊조렸다.

“레토.”

노아가 그의 손을 쥐며 차분히 타일렀다. 심정은 이해하나, 아이 앞에서 말을 조심해 주길 바랐다.

제 실수를 알아챈 레토가 숨을 고르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클라레가 계속 말했다.

“처음에는 나쁜 사람이라고 의심했어. 학교에서 모르는 사람을 따라가면 안 된다고 했거든.”

하지만 아이스크림에 정신이 팔린 건 자신의 잘못이라며, 클라레가 풀이 팍 죽은 얼굴로 고개를 떨궜다.

“네 잘못 아니야.”

노아가 여동생의 볼에 입술을 쪽 맞췄다.

“그게 왜 네 잘못이야. 넌 아직 어리니까, 아이스크림에도 흔들릴 수 있는 거야.”

“아가씨와 친구분들은 충분히 잘했어요.”

“마지막에는 정신 차리고 나쁜 사람을 혼내 줬잖아요.”

어른들의 위로 덕에 기운을 차린 클라레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근데…….”

나쁜 할아버지가 했던 말을 떠올리던 클라레가 노아와 레토를 바라봤다.

“자기 손주가 해군이랬어.”

레토가 다짐했다.

“그 새끼는 내가 반드시 불명예 전역 시킨다.”

“그러라고 네가 중장인 게 아니거든?”

노아가 황급히 말렸다.

“오히려 네가 그놈을 보호해야지.”

물론 저도 마음 같아서야, 그 범죄자의 손주라는 놈을 내쫓고 싶다.

하지만 클라레가 무사한 이상, 냉정하게 판단해야 했다.

진짜 나쁜 사람은 죄를 저지른 노인이었다.

그리고 그 손주는 그 조부의 또 다른 피해자가 될지도 모른다.

만약 그의 조부가 유괴 미수로 붙잡혔단 사실이 알려지게 되면, 그의 군 생활은 자연히 망가지게 될 거다.

레토가 무슨 짓을 하지 않아도 그는 자연히 전역을 선택할 수밖에 없을 거다.

“그리고 또오…….”

그러나 이어진 클라레의 말을 듣는 순간.

“결혼식에서 날 봤댔어.”

“…뭐?”

“내 손님이라고 했어. 내가 춤추는 걸 봤대.”

“…….”

섬뜩함을 뛰어넘는 공포가 노아를 덮쳤다.

‘누가?’

설마 제국에서?’

자신들이 살아 있는 걸 알아챘나?

“…….”

점점 가빠지려는 호흡을 노아가 황급히 가다듬었다.

살짝 흐트러졌던 호흡은 아주 찰나였고, 소리도 작았으니 아무도 듣지 못했을 거다.

적어도 노아는 그렇게 믿었다.

“…….”

하지만 레토는 노아의 과민한 반응을 전부 지켜보고 있었다.

“노아….”

“또 있잖아.”

클라레가 때마침 끼어들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만, 레토는 적절한 말 자르기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여기서 노아에게 괜찮냐고 물어봤다간, 노아는 아무 일이 아니라고 대답했을 테니까.

“그 할아버지, 하얀 사자 같았어.”

이번에는 레토가 당황할 차례였다.

“…저기, 처제님?”

레토는 존칭까지 써 가며 공손히 물었다.

“그, 뭘 닮았다고요?”

“하얀 사자! 하얀 머리가 길었고, 몸도 이렇게 컸고, 검은 선글라스를 꼈어.”

무섭게 생긴 사람이었다며 클라레가 몸을 잘게 떨었다.

“사람을 얼굴로 함부로 판단해선 안 된다지만….”

아스가 치를 떨었다.

“역시 생긴 대로 노네요.”

“아스, 그거 편견이야.”

진정한 노아가 질타했지만, 아스는 콧방귀를 뀔 뿐이었다.

“아가씨를 위험에 빠트린 놈에겐 편견도 아까워요.”

지금 이 자리에 클라레만 없었다면, 아스는 자신이 아는 욕이란 욕을 전부 쏟아부으며 저주했을 거다.

“나중에 큰 주인님과 큰 부군께서 돌아오시면 당장…!”

“저기.”

레토가 서둘러 끼어들었다.

“그, 죄송합니다만….”

어느새 허옇게 질린 레토의 얼굴은 어지간한 병자보다 아파 보였다. 어찌할 바 모르는 붉은 눈동자는 맥없이 흔들렸다.

“…그 유괴범, 누군지 알 거 같습니다.”

***

“…….”

“…….”

철창을 사이에 둔 부녀는 잠시 말이 없었다.

철창 밖에 있는 아이트라는 세상 한심하단 눈빛으로 아버지를 바라봤다.

이쯤 되니 아버지가 아니라 웬수였다.

반면, 철장 안에 갇힌 알버스는 고개도 들지 못했다. 절 노려보는 딸을 도저히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제가 살다 살다…….”

아이트라의 축 내려간 목소리에 알버스가 큰 덩치를 움찔거렸다.

“백사자가 유괴범으로 유치장에 갇힌 꼴을 보게 되는군요.”

“난 억울해…….”

“억울할 것도 없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옆에 있던 경찰들이 허리를 푹 숙이며 사과했다.

“아니네. 그대들은 자신들의 소임을 다한 것뿐이잖나.”

아이트라가 경찰들에게 말했다.

“이 일로 어떤 부당한 처분도 받지 않을 거니, 걱정들 말게나. 오히려 남부를 지키는 훌륭한 정신을 칭찬받아야지.”

“그건 맞는 말이군.”

알버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물론 아이트라의 매서운 눈초리에 냉큼 입을 다물어야 했지만.

“일단 사진부터 찍죠.”

이것도 기념이면 기념이라면서, 아이트라는 챙겨 온 사진기로 철장 너머 알버스를 찍었다.

“너 진짜 내 딸 맞냐? 왜 이렇게 잔인해?”

“아버지 딸이니까 이런 짓도 할 수 있는 거예요.”

그제야 유치장에서 풀려난 알버스는 기지개를 쭉 켰다. 팔을 높이 뻗으며 발치까지 들어 올리니, 거대한 체구가 더욱 도드라졌다.

말 그대로 거대한 백사자의 포효 같았다.

경찰서를 나온 두 사람은 밖에 대기하던 차를 타고 오케아누스 별장 저택으로 향했다.

“처음에 장난 전화인 줄 알았어요.”

아이트라가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봤다.

“하도 오지 않아서 걱정했다고요. 카리나도 일어나면서 할아버지 어디 갔느냐고 찾았어요.”

“아이고, 우리 작은 꼬맹이…!”

알버스는 먹히지도 않을 우는 시늉을 했다.

“난 그냥 사돈아가씨랑 애들이 귀여워서….”

“만났어요?”

깜짝 놀란 아이트라가 소리를 높였다.

“아버지!”

“안다, 알어!”

잔소리가 무서웠던 알버스가 순순히 제 잘못을 털어놨다.

“연락 없이 사돈댁에 들르지 말라고!”

“그런데 왜 그러셨어요.”

“걷다 보니까 사돈댁 근처더라고. 그래서 그 아래 공원에 잠깐 들렀는데, 사돈아가씨가 친구들하고 놀고 있길래…….”

공원 쓰레기 줍고 천진난만하게 노는 모습이 너무 기특해서, 할아버지 마음으로 다가간 게 이렇게 될 줄 몰랐다.

“…….”

아이트라는 기가 막혔다.

어떻게 들어도 유괴범의 핑계였다.

“…좀, 이상하게 보이긴 했구나.”

알버스도 그제야 인정했다.

저택에 도착한 아이트라는 고민했다. 지금이라도 레토에게 전화해서 사돈아가씨의 상태를 물어봐야 할지 고민했다.

사돈아가씨만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있었던 다른 아이들도 걱정이었다.

“그런데 아버지.”

아이들도 걱정이었지만.

“오늘 있었던 일 말인데요.”

“어…?”

알버스가 지친 얼굴로 돌아봤다. 천하의 백사자도 오늘 겪은 파란만장한 사건은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그…….”

주저하던 아이트라가 말했다.

“아드벨로 대장님께도 전해지지 않을까요?”

샤프 영지는 아드벨로 가문의 관할이었다.

즉, 오늘 경찰서에서 오케아누스 장군이 유괴범으로 오해받아 경찰 유치장에 갇혔단 소식이 그쪽으로 보고될지도 모른다.

“…아!”

알버스가 백발을 두 손으로 움켜쥐며 절망했다.

그는 유괴범으로 오해받는 것보다 더욱 끔찍한 것이 존재하고 있었단 걸,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

“집사.”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이트라가 명했다.

“전화 준비해 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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